초대일시 / 2011_0420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권여현_김남표_박성환_박지훈_신기운_신미경_오용석_정연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songamfoundation.org
'융합', '통섭', '퓨전'을 다시 생각한다. ● 현대미술, 그 이전 그리고 그 이후 본 전시의 제목으로서 『Convergence · 융합 · Fusion』이라 이름 붙인 기획의도를 먼저 명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1980년대 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가 유행했듯이, 요즈음 '융합', '통섭', '퓨전'과 같은 용어들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 봄바람의 산불처럼 번지고 있다. 생물학을 전공한 것으로 아는 어느 유명교수는 아예 '통섭원(Hall of Consilience)'을 발족했는가 하면, 어느 대학에서는 '통섭포럼'을 개최하고, 필자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서는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이 생기고, 교수들 간의 학제적 융합연구를 촉진하기 위하여 30억 규모의 '브레인 퓨전(brain fusion)'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 사회적으로 '융합 커뮤니티'가 생기고, 경제적으로 IT산업을 위시한 첨단기술의 융합현상은 이제 새로울 것도 없다. ● 미술이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비껴갈 리 없다.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미술내부에서부터의 융합의 징조는 있어 와서 새삼스럽게 '장르의 해체'니 '경계 허물기'니 하는 이야기들을 할 것도 없다. 특히, 사진, 비디오, 컴퓨터 등 새로운―적어도 우리의 현실로서는―매체의 활성화와 함께 현대미술 역시 급격한 속도로 변화하여 기존의 형식주의적인 분화로는 도저히 이야기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여기 모인 여덟 작가―권여현, 김남표, 박성환, 박지훈, 신기운, 신미경, 오용석, 정연두―는 모두 이러한 경향성의 세례를 받은 작가들로서, '매체의 확장'이니, '경계 허물기'니, '혼성'이니, '퓨전'이니 하는 개념과 용어들에 익히 젖어온, 그리고 이러한 경향성으로 이미 미술계에서 나름대로의 창의적 역량을 쌓아온 30~40대의 작가들이다. 형식적으로 이들은 기존의 사진, 회화, 조각, 공예, 설치, 영상 등 모든 매체와 장르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그들의 태도와 아이디어에 따라 평면과 입체, 시간과 공간, 현실과 이상, 상징과 개념 등을 넘나들며, 즉 사유와 형식의 고유한 틀을 벗어난 상태에서의 '창의성'이 그들의 작품에 기본으로 깔려있다. ● 이들의 창의적 역량과 그 결과를 새삼스레 '융합'이니 '퓨전'이니 하며 함께 묶어 놓는 것 자체가 흠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우리 사회의 통념상 '융합', '통섭', '퓨전' 등의 개념과 성격이 이미 하나의 굳어버린 틀로서 고착화되어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우리나라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랬듯이, '융합'과 '통섭'이 유행처럼 담론화 되는 것을 매우 경계한다. 바꾸어 말하면, 지식의 서사성과 유연성이 담보되었을 때만 그 지식이 제 노릇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필자는 이들 여덟 작가의 작품에서 이러한 지식의 서사성과 유연성을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융합'과 '퓨전'이라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결국 '창의성(creativity)'의 극대화를 꾀하고자 하는, 또는 창의적인(creative) 현상과 결과를 다른 측면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하나의 전략이다. 이 전략의 서사성과 유연성이 살아 숨을 쉴 때에, 어쩌면 지금(now), 여기(here), 우리(we)의 난제(難題)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전시는 독자들에게 시지각(視知覺)을 통해 이러한 문제의식을 환기시켜주는, 질문 같은 화두(話頭)의 전시다.
II. '융합'과 '통섭'의 관점에서 지난 20세기의 서구미술을 돌이켜보면 '장르의 해체'나 '경계 허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예로, 피카소의 1912년 작품 「기타(Guitar)」는 회화와 조각을 넘나든 그야말로 '융합'의 소산으로 그의 꼴라쥬(collage)와 함께 현대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경전 같은 것이었다. 아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 르네상스야말로 진정 '통섭'의 시대였다. 언제 미술이 자연과 과학, 기술, 종교, 인문, 정치, 사회 등과 동떨어져 존재했던 적이 있었는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미술은 태생적으로 '통섭적'이었고, '융합' 지향적이었다. 수학과 기하학, 철학과 수사학, 음악과 미술 등의 통섭으로 이상(理想)을 이성(理性)으로 추구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지혜는 '융합적'이지 않았던가? 부루넬레스키(Burnelleschi)와 알베르티(Alberti)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야말로 회화, 조각, 건축을 넘나든 '통섭인'들이었다. 그들이 고안한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이야말로 모든 분야의 융합과 통섭을 가능하게 한 '재현(representation)'의 핵심으로 미술과 자연과학, 그리고 인문학의 융합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발견이었다. 동양의 회화도 마찬가지다. 과학이라 말을 하지 않았을 뿐, 관념과 형이상학으로서의 자연과학과 '서화일체(書畵一體)'의 정신은 미술과 문학의 융합으로, 이 셋의 관계 또한 대단히 '통섭적'이다. 그러니, 이러한 지식의 서사성을 먼저 인식하고, 그에 따른 지식의 축적을 염두에 두고,시대의 변화와 함께 어떻게 '융합'과 '통섭'을 읽을 것인지 생각할 일이다. 우리는 지식과 학문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풀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무조건 합친다고, 기관을 만든다고 '융합'과 '통섭'의 창의성이 저절로 나오겠는가? 물론, 서구 모더니즘을 답습하면서 우리의 지식과 학문체계도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각각의 전공들이, 영역들이 서로 간의 소통을 차단하고 있다는 우리의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전공은 뒤로하고 남의 전공이나 기웃거리면 이 또한 큰 일 아닌가? 자신의 전공으로 일생을 파도 지식으로서의 새로운 축적이 될까 말까 하는 판국에 '융합'과 '퓨전', '통섭'이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지 걱정스럽다. 세상에는 보편적인 지식을 두루 섭렵하여 그 해박함의 경지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우물을 깊게 파 그 심연의 새로움을 발견해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조금은 다른 비유일 수도 있겠는데, '융합', '퓨전', '통섭'의 사회현상을 우리나리의 '길'의 문화와 비교해보자. 우리나라는 과히 '길'의 천국이다.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로, 순환도로, 민자 유치 도로 등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도로가 뚫리고 개통된다. 거기에 최근 제주도의 '올레길'과 지리산의 '둘레길'을 시작으로 하여 전국의 지자체들이 다투어 '무슨 무슨 길'을 만드느라 난리법석이다. 녹색성장을 외치면서 녹색은 점차 사라져가는 이윹배반이 도처에 즐비하다. 우리의 '융합'도 이런 식이다. 길의 본질이 '녹색'과 관련하는 것과 같이 융합의 본질은 '창의성'과 관련한다. 그러나 이 둘의 본질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풀어가다 보니 이제, 본질은 퇴색하고 유행처럼 껍데기만 부유하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III. '융합'과 관련한 위와 같은 사회현상을 미술이 어쩔 수는 없다. 다만, 융합과 상관없이 '창의성'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가 상대적으로 미술 분야에서는 그나마 정치, 경제적으로 덜 휘둘렸다고나 할까? 또한, '창의성'의 화두는 언제, 어디에서나 미술의 역사만큼 작품과 붙어 다녔으므로 설령, 매체와 형식, 개념과 태도가 변화하더라도 그렇게 휘둘릴 성질의 것은 아니다. 여기 참여한 여덟 작가는 각자의 '창의성'에 관한 스스로의 화두를 내려놓지 않으면서, 나름대로의 매체와 형식, 그리고 개념과 태도를 유지하며, 국내외의 미술계와 조응하고 있다. 권여현과 김남표는 형상성의 회화 작품으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실력파다. 그 둘은 무엇보다도 데생의 기본이 탄탄한 화가들이다. 그 탄탄함을 깔고 있기에 이미 반은 먹고 들어간다. 권여현이 자신의 의도를 표출하기 위해 드러내놓고 연출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김남표는 보다 감각적이다. "자유로운 이성"을 표방하는 권여현의 작품이 연출의 효과를 극대화 하는 쪽으로 과감하다면, 김남표의 작품은 매우 회화적(painterly)이며 감성적이다. 여러 가지의 측면으로 동서양의 문명과 정서를 넘나드는 두 작가의 주제의식과 시대정신이 '융합'과 어울린다.
박성환과 박지훈은 보다 개념적이다. 두 작가 모두 설치작품을 선호하여 전자가 회화적 설치 쪽에 가깝다면, 후자는 조각적이다. 박성환은 지도와 경로 등을 통해 지역과 경계의 이동에 따른 현대문명의 노마디즘(nomadism)을 부각시킨다. 금속성의 차가움이 개념과 어울리는 박지훈의 작품은 다분히 물리학적이다. 대학 산악부 출신답게 캐러비너와 프랜드 등의 암벽장비를 사용한 것이 돋보인다. 긴장과 갈등이 충만한 현대인의 심리적 균형상태를 설치로 치환한 보편성과, 상태는 다르지만 역시 긴장과 갈등의 '암벽타기'를 연상할 수 있는 보다 개인적인 특수성의 두 경험을 융합한 것 같다.
신미경과 정연두는 국제적으로도 어느 정도의 발판을 굳힌 괄목의 작가들이다. 조소과 출신답게 신미경은 동서양의 고대조각이나 도자기를 비누로 매우 정교하게 재현해낸다. '융합'과 관련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는데, 가령 밖에서 비바람을 맞힌 「쿠로스(Kuros)」와 너무 얇아 깨질 것만 같은 투명한 도자기 등에서 '유물'에 관한, 또는 그것을 바라보는 여러 관념들을 느낌으로 만날 수 있다. 정연두는 솔직히 어디로 튈지 몰라 내심 어떤 작품을 내놓을지 궁금했다. 다행히 사진작품이라 전시는 간단했지만 그 사진의 '융합적'인 연출의 묘미와 사춘기(adolescence)를 떠올리는 기억의 편린들을 이미 독자들은 간파했을 것이다.
오용석과 신기운은 비디오 작업으로 시공간의 융합을 꾀한다. 과거에서 미래를 보고, 미래에서 과거를 보는 오용석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에는 짙은 페이소스(pathos)의 허무주의가 깔려있다. 신기운은 유리잔과 장난감 자동차의 '충돌'을 통해 복합적인 상징구조를 구성했다. 결국, 작가의 궁극적인 질문은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현대인이 겪는 '시뮬라크르(simulacre)'의 문제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에게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실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방법은 다르나 두 작가 모두 같은 화두를 가지고 있다. ● 각각의 작가들이 시각으로, 조형으로 던지는 이러한 질문들이 단순한 미술만의 문제가 아님을 독자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미 '융합'과 '퓨전', '통섭'의 개연성은 현재에도, 그 이전에도 열려있었고, 또한 그 이후에도 열려 있을 것이니, 그렇게 요란 떨지 말고 새마을 운동하듯이 '융합'하지 말자. ■ 정영목
Vol.20110420e | Convergence·융합·Fusion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