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6층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정선주의 질료적·유기적 단색 회화 ● 1. 탈재현의 존재론적인 회화 ● 회화가 회화로서의 독자성을 획득하는 데 기초가 되는 것이 재현 구도를 벗어나는 것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를 확정한 인물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였다. 그가 모더니즘 회화란 모름지기 회화의 장르적인 고유성인 평면성 자체를 그려야 한다고 했을 때, 다름 아니라 재현 구도를 벗어나는 데서 모더니즘 회화가 성립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었다. ● 하나의 회화 작품이 모더니즘을 추구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재현 구도를 벗어난 작품인가 아니면 재현 구도에 사로잡혀 있는 작품인가가 중요하다. 재현 구도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회화가 인간 삶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인간 삶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회화가 예술로서 지녀야 할 초월성을 그만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보이는 사물들에서 일체의 인간 삶의 흔적을 삭제한다고 해서 사물 자체를 삭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물에 덧씌워져 있는 유용성과 도구성을 삭제함으로써 오로지 보일 뿐인 사물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때 사물은 순수한 시각적 대상으로 노출되면서 보는 자로 하여금 일체의 인간적인 감정들을 씻어내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한다. 그러면서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혼연일체가 되는 '봄 자체'라고 하는 거대한 사건을 일으킨다.
봄 자체의 경지에서 현존하는 일체의 것들은 질감, 빛, 색채, 깊이, 형태, 선, 윤곽, 운동, 표정 등 회화의 근원적인 요소들만으로 넘쳐난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이것들을 '존재의 갈래들'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이에 견주어 보면, 그린버그가 평면성을 애써 강조한 것은 그야말로 아예 메타적인 형식의 차원에 스스로를 가두어버린 꼴이다. 그가 스스로를 칸트주의자라고 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칸트는 현존하는 일체의 사물들을 오로지 인간의 인식 능력이 갖추고 있는 선험적인 형식에 의거해서 구축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에 반해 메를로-퐁티가 제시하는 존재의 갈래들, 즉 회화의 조형 요소들은 현존하는 것들의 존재 자체에서부터 이미 늘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 메를로-퐁티는 회화가 재현의 구도를 벗어남으로써 독자성을 갖는다고 해서 그린버그적인 형식적 모더니즘으로 귀착될 이유가 없음을 존재론적인 방식으로 정확하게 제시한 셈이다. 마크 로드코의 신비롭기 이를 데 없는 색면 회화의 위력은 평면성을 추구한 데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위력은 색 자체의 운동에 의거한 깊이를 지닌 질감 자체의 표정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데서 유래한다.
2. 정선주의 단색 회화 ● 「Organic form-life」라는 제목을 단 이번 전시회를 통해 제출되는 정선주의 작품들은 한국에서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해서 80년대를 풍미했던 '단색 회화'라 번역되는 모노크롬 회화의 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단색 회화의 조류를 한 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다. 작가들에 따라 워낙 다른 형상(形狀)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박서보의 '묘법 시리즈', 이우환의 '점·선 시리즈', 김창열의 '물방울 시리즈' 그리고 서승원의 '동시성 시리즈' 등은 당시 민중미술과 전격적인 대립각을 세우면서 모더니즘의 첨단을 형성했다. 정선주의 이번 작품들은 이들 중 특히 서승원의 작업과 많이 닮아 있다. 이렇게 닮아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름대로 새로운 회화의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넘어서지 못하는 한, 아류로 폄하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정선주의 작업은 서승원과 상당히 다르다. 서승원의 '동시성 시리즈'의 작업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단색 회화가 풍미하기 직전에 있었던 기하하적인 추상의 흔적들을 남기고 있다. 기하학적인 형상(形狀)들은 질료적인 방향으로 하강하는 것들이 아니라,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형상(形相)적인 방향으로 상승하는 것들이다. 그런 까닭에 서승원의 작업은 기하학적인 형상들의 지평을 이루는 바탕의 색들이 상승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에 반해 정선주의 작업은 유기적인 추상의 형상들을 추구한다. 그녀의 전시 제목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듯이, 원시적인 생명을 닮은 것 같은 형상(形狀)들이 바탕의 색들과 교환되면서 실제로는 어느 것이 진정 형상이고 배경인지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한다. 워낙 평면성이 강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서승원이 추구하는 쪽이 '상승의 간결함'이라면, 정선주가 추구하는 쪽은 '하강의 간결함'이다. 말하자면 질료적인 차원에서 빚어지는 근원적 형상들을 추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정선주의 작품들에 대해 함부로 '질료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질료적'이라고 할 때 함께 떠오르는 '끈적끈적함'이 워낙 제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붓질에 있어서도 그렇고 표현 자체에 있어서도 그렇다.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그 표현 방식 간에 불일치가 있다. 이 불일치가 작업의 일관성을 떨어뜨리는 쪽으로 작동할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작품의 특유성을 만들어내어 힘을 부가하는 쪽으로 작동할 것인지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 보는 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동안 팝 아트적인 회화들이 너무 크게 성행했다. 극사실주의도 그렇고, 기괴한 재현적 형상들을 추구하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디지털적인 형상을 재현하는 것도 그렇다. 팝 아트적인 경향은 시대적인 흐름에 의거해서 재현 구도를 다시 도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와중에 정선주는 '한 물 간' 것 같은 단색 회화를 들고 나왔다. 이는 한편으로 회화의 근원성을 다시 성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작업은 분명 모더니즘적이고 따라서 복고적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녀는 단색 회화를 질료적·유기적 추상에 의거해서 되살리고 있다. 그래서 그저 '한 물 간' 것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다. ● 질료적·유기적 단색 회화는 형상적·기하학적 단색 회화에 비해 존재의 근원적인 요소들을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저 평면성만으로는 결코 해소될 수 없는 것이 '봄 자체'의 지독한 경지임을, 그리고 거기에서 언제든지 인간을 넘어선 존재 자체의 근원적인 감각들이 넘쳐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 조광제
Vol.20110420a | 정선주展 / JEONGSEONJU / 鄭仙珠 / pani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