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기획_이장욱
관람시간 / 11:00am~05:00pm
중국 북경 통조우구 송주앙 시아오푸춘 송주앙미술관 서측 리우펑즈 작업실 Tel. +86.13521002357
중국 당대 미술의 산 역사인 원명원 출신 대표작가로 90년대 가장 주목 받은 작가 중 1인이었다. 하지만 학연 및 배경의 상대적 부족으로 외면된 흑룡강성 하얼빈 출신의 조선족 작가이다. ● 하얼빈체육대학 교수인 부친을 두어 어린 시절부터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랐다. 아버지 자신이 그림에 대한 관심과 아마추어지만 상당한 회화실력을 가졌으므로 미술과의 접촉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 졌다. 또한, 그림 도구를 사주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어린 리우펑즈에게 권하였다. 공부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 리우펑즈는 그림에 소질이 있다기 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중 그나마 가장 나아 자연스럽게 하얼빈사범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게 되었다. 학창시절 현대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진 그는 기존의 낡은 사상에 기초한 중•장년층과 충돌이 잦았다. 학교를 졸업한 후, 시대적 변화에 상대적으로 더딘 보수적인 학교에서의 해방감과 세상을 알고 싶은 순수한 열정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흑룡강성 하얼빈의 미술직업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85년의 신사조(New Wave)운동 당시 사상적으로 어느 때보다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매일 중국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젊은이로서의 시대적 사명감과 미술을 전공한자로 미술을 도구로 한 사회변화를 가속화 시키기 위한 방법에 대한 토론으로 친구들과 밤을 새던 열정과는 다르게 2년간의 북서부내륙 관통 여행을 통해 개개인의 열정과 이상만으로는 사회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적 벽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리우펑즈에게 직업학교 교사로의 단조롭고 권위적인 조직생활의 삶은 처음 몇 달이 지나자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졌다. 이러한 무료하고 의미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더욱이 서로가 위안이 되고 대화를 나눌 벗들이 모두 떠난 상황은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더욱 강하게 하였다. 답답하고 무기력한 일상에서 탈출구를 찾아, 학교를 뒤로하고, 친구가 있는, 말로만 듣던, 북경의 서촌(西村)이라 불리던 원명원(圓明園)으로 향한다. ● 당시 리우펑즈 자신은 '일상에 대한 탈출 혹은 직장인이 아닌 작가로서의 영적 자유를 찾아 떠난 생존 여행'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작가의 심정은 살풍경한 직업학교 화실과 화실 창 너머로 보이는 러시아식 건물을 그린 작품에 잘 나타난다. 인물이 배제된 무감정한 사물들의 나열을 통해 획일화되고 조직화된 사회에 대한 염증이 나타나 있다.
처음 접하는 서촌 생활의 해방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생활상의 단면을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송메이(松梅)가 쓴 "화가촌 작가는 누구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小画家们是谁,从哪儿来,又去哪里呢]?"에 잘 묘사되어 있다. 『처음 화가들이 작은 농촌에 나타났을 때 마음 착한 촌부들은 '밥은 먹었는지?',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았는지?' 등등, 가난하고 괴상한 긴 머리 낯선 화가들에게 신경을 써주었다. 하지만 3명, 4명, …… 10명이 넘어서자 이제는 긴 머리에 괴상한 사람들이 돈으로 보이고, 이들을 바라보는 이상한 생각은 없어지고, 행복한 생활을 가져다 주는 존재가 되었다. …… (중략) …… 이후 머리만 길면 이 마을로 들어오는 입장권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제는 농민공(일일 노동자) 마저 머리가 길다. 넘쳐나는 괴상한 사람들로 집이 모자라 작은집도 생겨나고, 개 집 비슷하게 생긴 곳도 마다하지 않는 이도 나왔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화가 촌이 되었다. 다른 이에게 물어도, 심지어 외국인에게 물어도 모두가 다 아는 유명한 곳이 되었다. …… (중략) …… 작은 화랑이 생기고, 술집, 홍등가까지 생겨나자 처음 시작은 누구인지 모르지만 이제 이 작은 불빛은 농촌에 큰 불빛으로 도드라졌다. 숲 속에서 들려오는 남녀의 웃음소리는 마치 강아지들의 교미 소리 같이 자연스런 울림이 되었다. 나이 어린 소녀들은 긴 머리 인간들을 우러러 본다. 화가들은 돈이 없으면 짜차이(榨菜;무로 만든 짠맛이 나는 짱아치)와 국수로 하루 끼니를 해결 한다. 돈이 없는 화가들은 매일매일 얼굴색이 배추 색이 되어간다. 하지만 매일 고기와 술을 먹을 수 있다. 돈만 생긴다면, 오리, 돼지, 소, 물고기…… 술도 빠지지 않는다. 어떤 작가는 코가 예민해 어느 집에 술이 있는지 요리가 고기인지 야채인지 귀신같이 알고, 잔치판이 벌어진 집을 찾아간다. 비좁은 자리를 잡고 안자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며 맛있다고 외치고,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한끼 식사를 해결한다. 작가 본인(송메이)도 그렇게 했다. 당시 많은 이들이 가난한 현실에 고기 한 점, 술 한 사발의 맛난 추억에 많이들 마시고, 먹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기억이 아련하다. 마을 곳곳에 붉은 천으로 만든 깃발들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바람 따라 방향 없이 날린다. 식당이다. 화가들로 호황이다. 아침을 먹으러 간다. 실제는 오후 늦은 점심시간이다. 저녁은 보통 네 다섯 명에서 많게는 열명까지 모여 밥을 먹는다. 각자 돈을 내거나, 한 사람이 돈을 낸다.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배부른 후에 꼭 한 두 명은 시비를 걸고 싸운다. 싸움이 없을 때는 시를 낭송하고 이를 시인들이 지켜본다. 노래를 하면 시인들은 노래할 줄 모른다고 한다. 그 자리에 합석한 여대생이 있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화가에게 미소 짓는다. 밤이 깊어지면 두 사람씩 짝을 이루어 손을 잡고 밤길을 걸어가는 게 보인다. 여자 없는 누구누구는 남아 술을 마신다. 술이 동나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간다. - "화가촌 작가는 누구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小画家们是谁,从哪儿来,又去哪里呢]?" 송메이(松梅)작 중 일부분』 ● 리우펑즈에게 아내와 함께하는 서촌 생활은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 큰 힘이 되었다. 친구와 새로 알게 된 이들과의 교제는 사고 범위를 확장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 틀을 잡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광장, 펭귄, 탄두(彈頭)연(风筝) 계열을 구상하고 자리를 잡아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리우펑즈의 작품에서는 당시 중국에 열풍같이 번졌던 표현주의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중국 대다수 표현주의 작가들과의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후자는 이미지 창조와 자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감정적 발산에 치우쳐 형식이 바뀐 신형도구에 지나칠 뿐 사회적 모순과 생명 충돌을 직시하는 현실 의식이 부족했다. 어떤 의미에서 조금 엉뚱하지만 전통적 가부장적 이미지의 아버지가 잠시 현실 세상을 피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생긴 전형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현대적 미술을 경험하고 오늘날의 중국 현실 상황(모순덩어리)을 대면하게 된 리우펑즈는 단 한 명의 숨겨진 지식투사인 듯, 오늘날[진티엔(今天);1978년 12월 23일 창간된 예술의 자유와 정치 민주화를 요구한 문학그룹]과 같이 매 순간 고통을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도덕적 책임감과 뚜렷한 문화적 사명감을 유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 된다 할 것이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는 역사적 기억과 문화적 상처를 잊을 수 없고, 동시에 주변에서 중심으로 떠도는 체험조차 예술가들이 지우지 못할 생명의 잠재의식이 되어 있다고 말한다. ● 리우펑즈의 작품에는 모종의 패러독스가 존재한다. 즉, 권력공간을 없애고 정복의식을 숨기는 것이다. 전자는 어린 아이들이 낙서하듯이 그려내는 표현수법을 이용하여 권력공간의 대표인 천안문을 분석했으며 강렬한 포화상태의 색채로 기존 상식적 시각논리를 벗어나 또 다른 아이러니와 슬픔이 드러나게 하였다. 후자는 상징적 부호를 이용하는 표현수법으로 '탄두 연'을 반복적으로 운용하였다. 초기 작품들에는 연을 그림 속 풍경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조연 이었지만 붓 놀림과 구도가 장엄한 형식미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해학이 있었다. 장중하면서도 풍취가 있어 고공에서 내려다보는 자태가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 조직을 느슨하게 해주었기에 전자들의 시적인 분위기와 애처로운 심정을 잃지 않는다. 최근 작품 중에서 '탄두 연'이 화면의 주인공이 되어 비좁음과 억압 당한 거대한 형체로 상처 입은 거인처럼 포효하며 다가온다. 천지간이 공허하고 암담하여 혼돈한듯하고 '탄두 연'은 침울하게 가로지르거나 바닥으로 내리 찔러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무모하였다. 예를 들어 기존의 작품은 반항과 해소할 가치의 객체라고 할 수 있다면 최근의 작품은 주체의 막막함과 낙담, 상심 및 분노를 드러내어 화면에 한줄기의 슬픔과 처량함이 흘러 넘친다. 이 또한 지식인들의 결연한 자아희생정신이 아니겠는가?
리우펑즈는 작업 전 스케치를 통해 미리 작품 구상을 하고, 구상한 대상을 직접 모형으로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모형을 살펴보면 작품 평면에서 보여지는 것 이외의 효과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흔적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중국현대미술의 선구자들과 함께 활동했었고, 마지막까지 원명원을 지켰고, 이후 동바(东坝)를 거쳐, 통센(通县) 빈허(滨河)에 머문 것이 14년이 흘렀지만, 오랜 시간 변함없이 상업적인 길보다는 작품성을 추구하는 자세로 많은 후배작가들에게 존경 받는 선배이다. 작년 친구가 마련해준 송주앙(宋庄) 작업실로 이사를 했고, 가족이 생활하고 있는 통센 빈허 작업실과 송주앙의 작업실을 당분간은 함께 병행하며 활동 할 예정이다. 경제적 현실을 도외시하고 한길만을 걷는 자세가 가족에게는 순탄하지 못하겠지만 변함 없는 자세가 스스로를 골동품과 같은 지위에 오르게 한 것 같다. 이제는 어느덧 젊은 열정을 안고 있던 청년을 지나 자신을 따르는 젊은 작가들에 둘러 쌓여 있다. 자신의 연작들을 발전시켜 오늘날 우리가 처한 환경문제, 매스컴에 의해 조작되는 여론, 빈부격차 등 중국에만 제한되지 않은 결과적으로 운명공동체가 된 세계적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작가자신에 대한 평가는 당대인에게 평가 받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고지식함이 북방인의 기개를 느끼게 한다. 봄을 맞아 송주앙 작업실에서의 첫 봄을 맞은 벗을 위해 친구들이 나무심기에 여념이 없다. ■ 이장욱
Vol.20110417b | 리우펑즈展 / Liu fengzhi / 刘锋植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