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0416_토요일_04:00pm
기획_갤러리 리즈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리즈_LIZ GALLERY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192-5번지 제1전시실 Tel. +82.31.592.8460 www.galleryliz.com
이희숙의 회화에서 보여지는 시야의 영역은 일반적이고 물리적인 의식의 영역뿐만 아니라 의식의 바깥을 포함한 영역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금 그 모든 영역을 초월하여 시간성을 함축한 제3의 공간을 부여하려는 회화적 실험의 구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조형적인 조건을 완성 지으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작가가 사유를 거듭하면서 체득한 대상들의 공허함을 비껴 나가는 철학적인 목적을 두고 접근해 가고 있는 것 같다. 이희숙의 관심사는 줄곧 '시간'의 정체성을 논하면서 그것의 회화적 완성을 추구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을 함축적이면서 철학적인 과제로 설정하고 '시야'라고 하는 언어의 선입견을 끌어들여 그것을 극복해내는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의 시공을 초월한 의식 세계를 찾으려는 시도자체가 신선하고 충격적으로 와 닿는다. 시야는 수평적이지만 지구는 둥글다는 진리 때문이다. 흔히 그림은 정지되어 있는 시각에 대한 표현이나 수많은 시각의 중첩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희숙 작가는 복잡한 현상계의 논리 속에서 빠져 나와 시각과 시각 사이의 물리적인 간극을 혹은 그 단위량을 화면에 모두 표현 해내고 있는 것이다. ■ 장승현
서로를 비추는 두 개의 꽃 ● 회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거움(pleasure)이다. 캔버스 위에 발려진 부드러운 질감의 안료들은 살아있는 것의 신체에서 분비되는 쾌감의 징후들처럼 생생한 윤기를 띠면서 표면을 얇게 덮는다. 그것이 가벼운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그림이건, 아니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두운 표정의 인물화이건 상관없이 내부의 부드러운 색으로부터 강렬하고 중후한 외면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톤의 변화와 대비를 통해 회화는 억제된 전율에는 깊은 호흡을, 은근한 열정에는 화려한 계조들의 리듬을 연결시킨다. 회화는 하나하나의 붓질을 통해 생생한 감정의 경험을 확인해가는 과정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화가는 매 순간을 최선의 현재로 각인시킨다. 이것이 화가에게 주어진 가장 근본적인 미션이면서 동시에 모든 가능성의 최대치를 이끌어내는 예외적인 메커니즘이다. 바로 이 가능성으로 인해 회화는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하기 어려운 매체가 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회화가 만들어내는 것은 각각의 그림들이 속하는 세계의 함축, 그 것으로의 초대, 또 다른 표현으로는 그러한 세계의 입구일 것이다. 회화는 현실과 평행한 세계를 보여준다. 그 안에서 관객은 회화의 직접적이고 간결한 표현만이 허락하는 '놀라운(wondrous) 세계'의 표상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단지 색채나 붓질과 같은 추상적인 요소들로만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좀 더 사실적이고 세부적인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또 다른 세계의 징후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으로, 관객은 그것을 회화의 '기분(ambiance)'를 통해서 전달 받는다. 즐거움과 기분, 이 두 가지 요소는 기술적인 효과만으로는 생성되거나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로 화가가 그것을 그리면서 자신 안에서 만들어낸 것으로 충족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시선 안에 녹아드는 것은 화가의 시선 안에서 빛나는 즐거움 그리고 그의 몸을 감싸고 그를 고조(高潮)시키는, 대상으로부터 기인한 매혹이다.
이희숙의 작품을 처음으로 인상 깊게 본 것은 2008년 ASYAAF(아시아 학생 및 청년작가 아트 페스티벌)에 출품되었던 「Scene #07;11;25」와 「Scene #07;12;07」 두 작품이었다. 커다란 사이즈의 다른 그림들 사이에 걸려있던 이 두 점의 유화는 탁자 위에 놓인 커피 잔과 그 안에 담긴 커피를 위에서 본 시점에서 그린 것이다. 얼핏 보아서는 메조틴트(mezzotint)로 제작한 판화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결이 고운 터치와 차분한 채도, 세밀하고도 객관적인 대상의 묘사로 이루어진 이 그림들은 독특한 색채의 조합을 통해 섬세한 회화적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매력을 전해주었다. 무엇보다도 이 그림들의 특징은 누군가 칼로 자른 듯 두 부분으로 날카롭게 나뉘어진 화면의 구성에 있다. 화면은 동일한 장소에서 그려진 두 개의 그림을 임의로 잘라 이어 붙인 것처럼 보인다. 혹은, 짧은 시간적 간격을 두고 동일한 대상을 촬영한 두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인 뒤 그것을 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개의 화면이 이어진 자리는 정확히 같은 위치가 아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실수로 이미지들을 잘못 포개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경우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화면에 수직으로 거울을 세워놓았을 경우다. 거울에 의해 반사된 대상의 일부는 그것이 가리고 있는 위치로부터 정확히 거울에 대칭된 모습을 비춘다. 이 경우 화면에 보이는 대상은 다소 잘못 나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희숙의 그림들에서 왼쪽 혹은 오른쪽의 이미지가 거울에 반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좌우가 대칭이 아니라는 점으로 금방 알 수 있다. 화면의 왼편과 오른편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미지는 동일한 대상을 두 번 다른 위치에 그린 것이다. 화면을 분할하는 선을 기준으로 나뉜 이미지가 어떻게 서로 연결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작가가 이 이미지들을 정확한 위치에서 이어지도록 배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차이는 관객에게 또 다른 차이에 대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바로 시간적 차이, 즉 두 개의 이미지가 일정한 시간적 차이를 두고 반복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예를 들자면, 영화필름이 느리게 감기다가 천천히 정지할 때처럼 한 스크린에 두 개의 프레임이 동시에 보이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것이다. 24분의 1초에 해당하는 각각의 필름 프레임이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실질적으로 거의 동일해 보인다. 그러나 하나의 화면에 투사된 두 개의 프레임은 아주 조금 다르다. 수많은 프레임들이 이어져 있는 필름을 빠른 속도로 돌리면 우리는 사실적인 운동을 재현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화면 위에 세 개 이상의 프레임이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경우 스크린에는 한 개 혹은 두 개의 프레임이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두 개의 프레임, 두 개의 대상, 두 개의 면이 의미하는 것은 시간의 경과, 동일한 대상의 이동, 반복, 그리고 이를 통해 생성되는 미세한 차이들이다. 이희숙의 회화가 반복, 병치, 변주를 통한 시간성을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여기에는 대상을 재현하는 방식으로서의 회화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에 대한 물음이 있을 것이다. 얀 반 아이크나 프라안젤리코로부터 프란시스 베이컨 등으로 이어지는 유럽회화의 세폭화(triptych)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적 병치, 중첩의 전통은 회화가 지니는 기본적인 조건인 동일한 화면 안에서의 동일한 시간성이라는 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된다. 세폭화는 정확하게는 세 개의 프레임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의미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그림 안에 여러 개의 프레임을 동시에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입체파, 미래파 회화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들은 동일한 대상을 그리면서 면이나 잘게 나누는 선들, 혹은 합성에 가까운 병치에 의해 상이한 순간들을 하나의 대상 안에서 나타낸다. 관객은 그림을 바라보면서 흐르는 자신의 시간과 회화에 재현된 상이한 시간들의 병치가 두 개의 레이어로 포개지면서 구체적이고 특정한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경험한다. 회화는 영화처럼 지각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순간들을 한꺼번에 보여주지는 못하는 대신 특정한 순간들을 최소한으로 제시함으로써 그것들 사이의 빈틈을 관객이 스스로 채우도록 한다.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관계를 채우는 것이 회화를 감상하는 핵심적 조건이다. 관객은 화면이 분할되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둘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라는 기호이면서 동시에 이 그림이 이를 통해 역동적 서사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이해한다. 즉 중요한 것은 화면을 분할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다. 그것은 잘린 면처럼 보이지만, 뚜렷한 굵기를 지닌 선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기표이자 이 그림을 움직이는 핵심적인 장치다. 동일한 이미지로 이루어진 두 개의 프레임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이희숙의 그림에는 자주 '꽃'이 등장한다. 클로즈-업으로 인해 묘사가 더욱 사실적으로 보이는 이 꽃들은 가장 절정에 이른 개화의 생동감과 묘사의 부드러움으로 인해 시선을 잡아 끈다. 그리고 어두운 배경은 꽃의 색채를 한층 더 강조해 줌으로써 작가가 의도적으로 강렬한 대비를 통해 화면의 명확한 구성을 드러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 꽃들 역시 화면의 중심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수직의 구분선으로 인해 단순히 아름다운 대상으로 그린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 되고 있다. 2010년 작 「Inter-Poppy 2」는 이슬을 머금은 아름답고 넓은 연지색의 꽃잎과 강렬한 꽃술을 드러낸 채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그림은 꽃 한가운데에 있는 화심의 일부만 남은 채 꽃의 대부분이 잘려나간 오른편의 화면과 꽃잎의 일부만 잘려나간 왼편의 화면이 이어진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이동하면서 화심의 일부가 아주 조금 남아있는 꽃의 나머지 부분을 마치 왼편에 있는 꽃의 잘려나간 기억처럼 보여준다. 심지어 화면을 나누고 있는 수직선은 직선이 아니라 꽃과 그것의 배경으로 그려진 잎사귀들의 형태를 따라 다소 휘어진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떠올리는 어떤 다른 것, 혹은 다른 순간의 잔상을 통해 좀 더 신비로운 것이 된다. 이를 위해 화면의 화려한 색채의 얼룩들은 그것이 꽃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뿐 아니라 시간 속에서 아련히 움직이는 꽃의 기억들을 나타낸다는 사실까지 알려준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꽃은 이러한 시간적 흐름의 순간성, 일시성, 덧없음을 가리키는 기호로 지각된다. 화가가 꽃을 그린다는 사실 안에는 그것의 눈을 찌르는 아름다움을 재현하려는 욕구 뿐 아니라 그것이 시간 속에서 흔들리는 덧없지만 절정의 순간이라는 인식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작가가 처음으로 화면의 분할을 통한 대상 내부의 시간을 다루기 시작한 것은 2006년의 정물화와 인물화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의자, 커피잔, 과일과 같은 일상적인 소재들은 그것들이 속해 있는 친근하고도 정적인 시간이 무엇보다도 주된 배경임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들이 표상하는 예측 가능한 안정감과 그것들을 분할하고 있는 수직선의 결합은 어떤 다른 조건들이 일상과 그것이 나타내는 시간의 속성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예측하게 한다. 이 당시 작품들의 제목이 대부분 「Scene」인 것은 이 그림들에 나타난 대상들이 일상적 상황 속에 놓여있는 사물들이 아니라, 어떤 특이한 '장면' 혹은 '사건' 속에 놓여있는 사물들임을 알려준다. 이는 필연적으로 대상에 가해지고 있는 외적 조건, 혹은 대상 자체의 내부의 변화를 전제로 한 것이다.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이 대상들은 화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의해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의 심상이 투사될 수 있는 수용체(recipient)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일종의 거울처럼, 공간과 사물의 분할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분열을 이끌어낸다. 2007년에 그려진 인물화들은 자화상처럼 보인다. 이 그림들의 제목이 「카프카의 변신」인 것은 작가가 인물을 그리면서 나타내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카프카의 '변신'은 주체(subject)의 극적인 자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세계가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낯선 것, 결국 주체 안에서의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고야 마는 어떤 것임을 보여준다. 물론 이 경우, '나'로 표현되는 주체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분열을 일으키거나 서로 모순된 기억의 잔상들로 인해 지속적인 긴장상태에 놓여있어야만 한다. 왼편과 오른편 가운데 어느 것이 실체이고 어느 것이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것인지 알 수 없다면 이 둘은 그 자체로서 실체의 모습을 구성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희숙의 인물화는 서로 크기가 조금 다른 인물의 모습과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는 시선을 병치시킴으로써 대상의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독특한 제안을 던지고 있다. 앞서 인용한 바 있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초상화들이 파괴에 가까운 극적인 인물의 변형과 다시점을 통해 바라본 얼굴의 평면성을 통해 그것에 나타난 분열과 시간적 중첩을 표현하고 있다면, 이희숙의 작품 속에서는 그와 유사한 대상의 변화가 얼굴의 분절을 통해 시도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인물화를 둘러싼 이러한 서사적 구조는 다른 대상들-의자, 커피 잔, 꽃 등-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 그러나 이희숙의 그림들에서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것은 지난 몇 년 간 더욱 더 세련되어가고 있는 회화적 터치들이다. 물감을 캔버스에 바르고 그것으로 화면을 채워나가는 동안 작가가 느끼고 있는 관능적 감각이 그림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마치 내적 변화의 움직임조차 이 회화들 안에서는 감내할만한, 감미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것은 조용히 일어나고 있는 변형이자 가장 부드러운 의미에서의 시간의 왜곡처럼 느껴진다. 이 회화에 대한 작가의 신뢰감이 그의 그림들에 독특한 분위기를 부여한다. 그것은 단순하지만 복잡한 것이다. 마치 우리를 둘러싼 이해할 수 없는 일상처럼. ■ 유진상
Vol.20110416i | 이희숙展 / RHEEHUISUK / 李喜淑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