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희락락 : 유희하는 인간

2011 수원시수원미술전시관 젊은작가 기획초대展   2011_0412 ▶ 2011_0423

이정원_Cube #3_MDF, 우레탄 도장_가변설치_2011

초대일시 / 2011_0413_수요일_06:30pm

참여작가 김승훈_김효준_소북_요원_이정원_최창훈

주최·주관 / 수원미술전시관 후원 / 수원시 총괄기획 / 조두호 기획·진행 / 박소화_박진희 어시스턴트 / 정다현_김혜지_지소강

관람시간 / 10:00am~07:00pm / 관람시간 30분 전까지 입장마감

수원시미술전시관 SUWON ART CENTER 경기 수원시 장안구 송정로 19(송죽동409-2번지) Tel. +82.31.243.3647 www.suwonartcenter.org

수원미술전시관은 수원의 유일한 공공기관으로서 이미 잘 알려진 작가들이 아닌 새로움을 향해 도전하는 작 가들의 실험적이고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소개해 지역 미술에 신선한 자극제 역할을 하기 위해 젊은 작가 전 시를 2004년부터 꾸준히 진행해 오고 있다. 2005년에는 지역 미술현장에서 의도적, 비의도적으로 간과되어 온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여 작가생성의 발전 과 변모를 근원적으로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평론가 김성호, 심상용, 최태만, 고충환, 김종길과 공모 선정작가 8명과 초대작가 2명이 참여한 『수원 신진작가 발굴』 전시를 진행하였고, 2008년에는 타이틀을 『통과 의례』로 바꿔 수원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작가들을 공모를 통해 선발하여 작업을 소개하고 지역 대학과 연계 하여 지역 젊은 작가들 간의 자율적인 미술교류가 활성화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지난 5년간 수원미술전시관에서 펼쳐졌던 신진작가 발굴, 통과의례의 젊은 작가를 발굴 소개하는 맥락에 이어 2011년에는 수원에만 국한되지 않고 보다 다양한 장르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을 소개하고자 젊은작가 기획초대 형식의 전시를 기획하였다. 그 시작으로 지난 2월 중앙대학교 조소과 출신 작가 10명과 함께 그들 삶의 이야기가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녹아 담겨져 있는 『IBAGU』 전시에 이어 이번 『희희락락 : 유희하는 인간』전시를 기획하였다.

김승훈_그, 그녀의 기억_석고, 노끈_405×170×1750mm_2010

"인간은 왜 놀이를 즐기려고 하는가" (요한 호이징아 『호모 루덴스』 中) ● 합리주의와 순수낙관론을 숭상했던 18세기에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라고 불렀다. 이후 현대인들은 인류를 호모 파베르(Homo Faber : 물건을 만들어내는 인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호모 루덴스』 저자 요한 호이징아는 인류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faber(물건을 만들어내는)라는 말이 sapiens(생각하는)라는 말보다 한결 명확하지만, 많은 동물들도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말 역시 부적절하다고 이야기하며, 인간과 동물에게 동시에 적용되면서 중요한 기능을 놀이하기라 하였다. 이 책에서는 인간을 놀이하는 인간으로 규정짓고 더 나아가 인간의 문화는 놀이로부터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문화가 얼마나 논리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를 법률, 전쟁, 지식, 시, 철학, 예술, 신화 등에 비유하여 이야기함으로써 문화가 놀이로부터 파생되었다는 명제를 논증한다. 최근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 성향을 들여다보면 거대 담론이나 7,80년대 시대에서 보여진 거친 표현으로 작업하는 작가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하여 작업으로 이어지는 작가들이 두드러진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으로서 작업에 임하는 김승훈, 김효준, 소북, 요원, 이정원, 최창훈 작가의 작품들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서는 마치 유희하듯, 즐기며 신나게 작업하는 작가들의 내면의 깊이가 전해지는 작품들을 볼 수 있다. ● 고정관념으로 가려진 이면을 없애버리고 앞뒤가 같도록 동형반복으로 표현하여 일상적 고정관념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김승훈, 일상에서의 익숙함을 비틀어 낯설고 생경하게 바라보게끔 하는 김효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무에 결이 생기듯 자신이 살아온 흔적의 시간성을 보여주는 소북, 자신을 성찰하고 사유하듯 반복적인 행위를 일삼는 요원, 하나의 형태가 수천가지의 형태로 변형 가능한 작업에 매료되어 관람객과 함께 작품이 완성되는 이정원, 유년 시절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파생된 생각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를 반추하고자 하는 최창훈의 작품을 통해 예술이라는 매개로 유희하고 있는 작가들의 독특하고 다양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 스스로가 굉장히 즐겁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자유가 뒷받침 되는 행위, 실제생활에서 벗어나 그 나름의 성향을 가진 일시적인 행동으로 작업에 온 신경을 몰두하여 진지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의 모습에서 놀이의 총체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놀이하듯 작업하는 그 자체로써 만족감을 느끼는 그들의 작품을 통해 과연 나는 무엇을 할 때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느끼고 기쁨과 환희를 느끼는지 한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 박소화

김효준_공포_Oil on Canvas_162.2×130.3cm_2008

네모의 꿈 ● 전시공간에 놓여 있는 커다란 '네모'들이 눈에 들어온다. 거인이 지나간 흔적인가. 사람머리통만한 크기의 네모들은 마치 방금 장난을 마친 듯, 누군가가 무엇을 조립해 놓은 듯 굳어져있다. 유심히 살펴보니 알록달록한 색이 칠해진 네모는 공룡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혹자는 일어서있는 강아지의 형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본인의 기호체계에서 해석된 네모들의 조합은 공룡을 의도한 조립체임에 틀림없었다. 전시공간이 주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 설치된 원색의 네모, 유치한 아이들의 장난감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거대한 몸집이 주는 스펙터클은 공간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 이정원은 네모의 조합을 통해 유희하며, 그 과정의 결과가 작업으로 완성된다. 그의 네모는 정육면체의 도형이다. 도형은 여섯의 면이 정사각형이며, 대각선의 길이가 같고 동시에 수직으로 중점에서 만난다. 이 도형은 입방체(立方體)이며 궁극적으로 이정원의 네모는 큐브(cube)로 귀결된다. 큐브의 성체를 유심히 관찰하다보니 친숙한 컴퓨터 게임이 하나 떠올랐다. "아, 테트리스!" 유년시절에 한 번쯤 이 게임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테트리스는 공간지각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1985년에 러시아의 연구소에서 개발된 게임이다. 7개의 조합된 큐브가 중력방향으로 떨어지면서 맞춰지고 선이 완성되는 순간 동일선상의 큐브는 소멸된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빨라지는 속도감에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큐브덩어리들이 천정까지 쌓여 게임은 종료된다. 이 단순한 게임은 상당한 중독성을 지니는데, 본인 역시 눈을 감아도 하늘에서 툭툭 떨어지는 네모난 큐브들의 공습에 머리가 복잡해지는 날이 많았다. ● 이정원이 '네모의 꿈'을 꾸게 된 것은 어쩌면 유년시절의 기억에서 부터인 듯하다. 유난히 기하학적 구조와 수학적 사고에 관심이 많았다는 그는 큐브퍼즐의 코드를 이용해 작업을 진행한다. 어린 시절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이 작업 전반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테트리스가 2차원의 퍼즐이라면 현재 이정원은 3차원의 '소마 큐브'를 활용한다. 7개의 덩어리를 통해 퍼즐을 구성하는 소마큐브는 다양한 사고와 형태로 구성될 수 있다. 마치 큐브조각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세포조직처럼 가변적이고 반응하는 방식을 취한다. 아마도 작가가 지향하는 조각의 꿈이 네모를 통해 나타난 것은 아닐까. 수 만 가지의 열려있는 조립과 해체의 방식을 통해 움직이는 네모의 꿈을 실현해 나가는 이정원의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소북_Triangle_드로잉_37×47cm_2011 / 소북_River_캔버스에 실_218×181cm_2011 소북_Turtle Thread Resin_1600×1000×700mm_2011

그릇된 편견과 고정관념에 보내는 메시지 ● 사람들은 문자와 언어, 행동, 다양한 이미지 등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형성한다. 무수한 상징과 도상, 지표에 의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누군가의 생각을 읽으며, 서로의 의사를 소통한다. 이러한 대상을 해석하는 행위에서 의미작용이 발생하며 이 일련의 과정을 기호학이라 정의내릴 수 있다. 기호학은 어떠한 학문의 분야라기보다는 대상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통칭하는 것 같다. 이유는 이미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누구나 이미지를 해석하고 상징과 기표를 해석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미 지니고 있는 기호 해석 능력을 통해 김승훈의 작품을 들여다보겠다. ● 김승훈은 작업을 통해 불특정 대상을 응시하는 목적 없는 시선, 그릇된 편견과 선입견으로 굳어버린 고정된 관념의 접합을 보여줌으로서 현대인에게 쉽게 노출되는 인지장애에 대한 권고적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조형언어는 입체조각, 설치의 방식을 따른다. 먼지 한 톨 앉지 않을 것 같은 하얀 좌대 위에 마찬가지로 하얀 조형물을 올려놓는 방식이다. ● 좌대 위에 하얀 흉상이 놓였다. 매끈한 곡선으로 처리된 석고재질의 조각상은 어떠한 터치나 묘사도 없다. 보고 있는 것이 사람의 형상을 지시하는 기표라면 안면의 윤곽이 부제한 이 면은 뒷모습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앞면을 찾기 위해 흉상의 뒤로 돌아가 본다. 하지만, 발견된 이미지는 방금과 똑같은 동일 반복적 이미지이다. 앞도 뒤도 아닌 동일한 이미지의 매끈한 흉상일 뿐이다. 한 면과 다른 동일한 형상의 면을 이어주는 경계선에 누런 노끈이 발견되는 것을 제외하고 이미지의 맥락을 읽어주는 기호에 대한 해석의 방식이 착란을 일으키는 순간이 초래된다. 이 작업을 해석하기 위해 이미지×맥락×시간×공간×시선의 주체 등으로 이어지는 다항방정식을 대입해 보았다. 하지만 이미 학습되어진 앞과 뒤의 구분은 앞을 봄으로 뒤를 인식하고 뒤를 봄으로서 앞을 고정화하여 인지해내는 착각일 뿐이었다. 세상의 사물과 대상을 보는 방식은 보이는 것 자체로서의 해석이 아닌 보는 이의 성장환경, 교육과 학습되어진 영역을 통해 해석되어진다는 말이다. 이미 편견과 그릇된 선입견 등 수많은 고정관념을 통해 세상을 대하고 있으며, 성급한 일반화를 통해 다양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우리일 것이다.

요원_하모니_마벽지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90×1040_2011 요원_하나비_숯벽지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104×1300cm_2011

자유로운 꿈, 가상의 낙원 ● 김효준의 캔버스에는 도시의 단면이 담겨있다.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은 우리의 일상을 둘러싼 아주 평범한 주변의 풍경이다. 작가의 화면에 등장하는 도시는 가까운 과거 편리함과 윤택함 그리고 손쉬운 통제의 수단으로 생성되었다. 자본주의와 산업발전으로 급격히 늘어나버린 잉여가치가 인구증가를 촉진시켰고 다양한 인류는 크고 작은 도시의 일원으로, 도시의 파편으로, 거대한 기계의 부속으로 살아간다. 어느새 도시는 대부분의 인간을 둘러싼 주변의 풍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 김효준은 도시의 풍경을 그린다. 상당히 사실적인 묘사의 방법을 통해 마치 사진처럼 대상이 갖는 물성을 현실감 있게 화면에 옮겨낸다. 실재로 전시장에 걸려있는 그의 작품 앞에 선 많은 관객들이 사진작품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하지만 이내 사진을 닮은 그의 화면에서 생겨난 기묘한 틈을 발견하곤 한다. 그는 현실세계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편집의 방식을 실행한다. 여기에서 시뮬라크르simulacre의 개념이 적용된다. 과거 플라톤(Plato, BC 428/427~BC 348/347)이 규정지은 시뮬라크르는 세계의 원형이라 일컫는 이데아idea의 복제품으로서의 현실세계와 그 복제된 세계에 다시 복제를 행함으로서 생성되는 하찮은 모방에 불과했다. 예술은 복제에 대한 복제임으로 이미 태생부터 모방체인 현실에 대한 모방 또는 재현이며 고유의 빛을 잃은 빈껍데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개념화한 시뮬라크르는 복제가 아닌 새로운 창조물, 나름의 새로운 의미구조를 띠는 독립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김효준의 그것은 후자인 들뢰즈의 개념에 가깝다. 그는 자신의 시선에 담긴 도시를 재구성하고, 그 세계는 현실에 대한 모방이 아닌 그만의 새로운 세계로 구현된다. ● 그는 자신의 일련의 과정을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서 자유로운 꿈을 꾸는 방법"으로 정의한다. 도시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무의식적으로 반복 학습되는 제도와 지배구조 속의 다양한 음모들에 대한 염증을 자신의 작업에서 풀어나간다. 한없이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 한참을 들이킨 술에 취한 듯, 먼가에 홀린 듯 멍하니 도시의 야경을 그려나간다. 결국 자유를 꿈꾸며 철근 콘크리트와 그사이를 뚫고 나온 현란한 색체의 조명 빛, 기호들이 난무한 간판, 자극적인 광고사인물과 하늘을 찌를 듯 거대한 건축물로 구성된 가상의 파라다이스를 재현하는 것이다. 대우주를 향한 변주곡 ● 소북의 작업은 마치 수도승이 행하는 종교적 수행의 방식처럼 정적이고 진지한 가운데 끝 모를 반복의 행위 속에서 탄생된다. 작가의 고단한 인내의 결과물은 구체적 형상으로 나타나지만 형태와 의미가 지니는 상이한 차이는 이내 관자들의 해석의 차원을 교란한다. 형상이 주는 강한 특성 때문에 여타의 조각 작품을 감상할 때처럼 단순한 형태적 쾌감에 매료되기 쉽다. 이 난해한 해석의 층위를 극복하지 못한 관객은 작품의 맥락이 갖는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돌아서기 쉬울 것이다. ● 2차원 평면의 이미지를 통해 설치나 조각 같은 입체작품을 온전히 언어적 기법만을 통해 글로서 설명하기란 매우 난해하다. 특히 소북의 작업처럼 작품의 전체가 갖는 형태적 요소와 세부적 묘사의 기법에서 오는 극소적인 요소를 모두 설명하고자 할 때는 더욱이 그렇다. 소북의 작업은 구조적으로 단순한 형상의 자연물을 뚜렷한 형태적 기호를 통해 나타낸다. 거대한 바다거북의 등껍질이나, 사냥꾼의 별장에 걸려있을 법한 순록의 뿔 등 즉각 의미 작용이 일어나는 일차적 형태의 작업이다. 하지만 작품의 내적 영역에서 살펴보면 형상이 갖는 의미를 뚫고 나오는 강렬한 기운이 존재한다. 좀 더 작품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소용돌이 치고 있는 선재의 흐름이 포착될 것이다. 가운데의 정점에서 외부로 돌아 나오는 선은 나무의 나이테가 찍히듯 일정하고 촘촘하게 이루어져 원의 형상으로 마감되었다. ● 유클리드(Euclid, BC300~?)가 정의하기로 원은 도형의 내부에 있는 한 정점으로부터 곡선에 이르는 거리가 똑같은 하나의 곡선에 의해 둘러싸인 평면도형이다. 또한 원은 점, 선, 면으로 이루어진 도형들 중에 각이 존재하지 않은 가장 완성된 기하학적 도형이다. 원은 대우주의 천체이며 끝없이 확장되고 무한 팽창할 수 있는 존재이다. 둥근 원의 섭리는 거대한 순환의 고리가 되어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의식의 끝에 서있다. 천지가 열리고 만물이 창조될 때 끝 모를 어둠 속에 찍힌 점 하나가 가느다란 선으로, 원으로 돌아 나오며 자동기술법으로 무한 반복되어 돌아 나온 선은 소우주의 자연물로 변환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작가 소북이 우주를 대하는 방식일 것이다. ● 소북은 작가의 예명이며 소리북의 약어이기도 하다. 그는 순수미술을 전공했지만, 소리북(전통 북의 일종)을 치는 소리꾼으로 수년을 살았고 한때는 과학연구소에서 나노(nano, 단위)를 연구하는 연구원으로 근무했었다.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온전히 자신의 예술적 조형언어를 표현하기 위한 삶의 과정이라 칭한다. ● 작지만 장엄한 소리가 들려온다. 은근한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소북이 연주하는 대우주를 향한 변주곡이.

최창훈_그들이 살아가는 세상_혼합재료_430×230cm_2009

극락정토에서 핀 인고의 花 ● 새벽 내내 지구 반대편에 숨어 빛을 발하던 태양은 이내 오롯이 대지를 덮어 기운이 생동하고 충만한 가운데 존재하는 생명에게 축복을 내린다. 하지만 기다림에 익숙하지 못한 연꽃이란 녀석은 찰나에 음습한 진흙을 뚫고 홀로 수려한 자태를 뽐내며 수면 위로 떠오른다. 태생적으로 강인한 생명력과 더불어 신비로운 외모를 지닌 녀석은 과거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적 의미를 포함해 영생, 행운, 풍요 등 다양한 상징의 주인공으로 발현되었다. 이집트나 그리스신화, 인도신화 등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극동아시아 문화권 중 불교에서 말하는 연꽃은 석가모니의 탄생을 알리는 꽃이며 극락세계를 뒤덮는 낙원으로 가는 길목을 맞이하는 상징으로 자리한다. 연꽃의 형상은 기와집의 처마 끝을 마감하는 와당(瓦當)의 무늬로 쓰이며 고구려 시대부터 발견된다. 복을 비는 민속신앙과 불교와의 접점에 놓이며 전통의 상징적 이미지로서 발전했다. ● 요원은 인고의 花, 연꽃을 그린다. 정확히 말하면 '그린다.'라는 1차적 행위를 지시하는 동사가 갖는 의미보다는 조금 더 다양한 형태로 연꽃을 찍어 낸다. 그의 연꽃이 안착되는 배경이나 소재는 유리병, 천, 종이, 벽면, 변기, 보석, 공업용 쓰레기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때론 아주 거칠게 잘게 부서진 유리가루를 쓰기도 하고 화려한 LED조명을 배경으로 깔고 반짝거리는 보석으로 수놓기도 한다. 그리고 매우 반복적이고 일정한 간격으로 찍어낸다. ● 그는 다른 여타의 동양적 소재를 다루는 한국화를 전공한 젊은 예술가들처럼 일종의 의무감 때문인지, 동양적 사유와 이미지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색채와 표현의 확장, 질감과 표현의 극대화, 자존적 이미지의 탐닉을 적극 가시화함이 눈에 띠는 부분이긴 하지만 특별히 그의 화면에서 강조되는 부분은 반복적으로 점철된 연꽃이라는 상징에 머문다. 하지만 반복적인 패턴이 사고의 확장에 대한 장애를 불러 올지라도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강한 기운과 분위기, 운율, 시각적 요소의 강조 등이 괴이하지만 기묘한 기운 띠며 상징이 갖는 맥락을 압도하는 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작업이 그가 찾아나가는 동양적 내러티브와 개인사적 감정의 통로로서의 작용함이 눈에 띤다. ● 요원은 자신의 작업이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입혀지기를 바란다. 실내 인테리어의 독특한 소품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작금의 주변 환경을 가득 채우는 벽지나 장판을 뒤덮으며 일상과의 특별한 조우를 시도한다. 그는 기존의 전시공간을 탈피해 자신이 만들어가는 낙원의 재현공간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찾아간 최상의 전시공간은 어느 '모델하우스'였다. 이 집은 건축회사들이 자신들이 앞으로 만들 아파트의 선전용, 본보기, 견본용 주택으로 마련한 환상 속의 집이다. 이곳은 가상의 생활공간이지만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지상 낙원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마치 걱정이나 근심 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낙원의 사전적 정의와 같이 현대판 유토피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듯하다. ● 요원이 그려나가는 와당에 찍힌 연꽃은 진흙을 뚫고 나온 신성한 꽃이다. 이 극락정토에 핀 꽃은 인간이 만든 극락세계, 인공의 파라다이스를 파고들어 묘한 화합을 시도한다. 이 교묘하게 맞닿는 지점에서 요원의 작업이 뿌리를 내리게 되며 그가 바라는 일상과 부분 교합된 친인간적인 예술이 싹틀 것이라 생각된다. 삶을 실천하는 노동의 미학 ● 주변에 크고 작은 공사가 한창이다. 건축물의 크기에 따라 지하를 깊게 파내려가기도 하고 대형 크레인이 높이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높은 곳에 무엇인가를 실어 나르곤 한다. 도시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공사현장의 모습은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지나칠 수밖에 없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우연히 어느 작업현장을 지나다 건물의 둘레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길다란 쇠파이프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짜임새 있게 이어붙인 쇠붙이의 구조물에서는 사람들이 연신 무엇인가를 나르고 만져대고 있었다. 위태로워 보였지만 건축물의 뼈대 사이로 둘러쳐진 철제 구조물은 일명 아시바(あし-)라 불리는 건축용 비계파이프였다. 비계파이프는 건축공사 때에 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설치하는 임시가설물이며 주로 재료운반이나 작업원의 통로 및 작업을 위한 발판으로 이용되는 상당히 고마운 존재이다. ● 최창훈은 일명 '아시바 아티스트'로 불린다. 아시바는 속칭 '노가다판(작업현장)'에서 인부들의 입을 통해 사용되는 잘못된 일본식 표현이다.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비계파이프'를 사용해 그를 부르고 싶으나 어감 상에 어색함이 묻어나 일본식 외래어 표현에 따르는 윤리적 책임의식을 뒤로 한 체 그대로 아시바 아티스트 '최창훈'이라고 부르겠다. 최창훈은 건축현장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노동자의 모습을 구현한다. 노동자의 모습은 어지러운 구조의 집합 속에서 아시바로 형상화된 선재 사이사이로 나타난다. 시원한 원색의 색체와 오밀조밀한 목제 구조물로 구성된 그의 작업은 회화보다는 조각 작업에 가깝다. 평면의 캔버스에 색을 입힌 후 역동적인 노동자의 모습을 삽입하고 그 위에 마치 나무젓가락을 이어붙인 것 같은 목제 구조를 편집해낸다. 작가는 서양화를 전공하였지만 조각에 가까운 작업을 이어나간다. 제주도에서 목공소를 운영하시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년시절부터 줄곧 나무라는 소재를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그의 작업에 있어서 나무는 필수요소로 자리 잡았다. ● 작가는 작업을 통해 노동의 미학을 실현하고자 한다. 산업의 역군으로서 열심히 일하시던 아버지의 노동에서 참다운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삶을 실천하는 예술적 의지를 캔버스에 담았다. 최창훈에게 공사장의 풍경은 참된 가치를 실현하는 장이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최적의 공간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가볍고 재미있는 접근을 통해 진의를 파악 했을 때 전해지는 잔잔한 감동을 의도했으며 유희하는 과정 속에서 기발하고 흥미로운 발상이 주는 예술의 긍정적 효과를 노린다고 본다. ■ 조두호

Vol.20110412k | 희희락락 : 유희하는 인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