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비치다 Glimmering

인주리展 / INJURI / 印珠里 / photography   2011_0412 ▶ 2011_0417 / 월요일 휴관

인주리_어리비치다#1_울트라 크롬 프린트_73×110cm_2010

초대일시 / 2011_0412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pm~06:30pm / 월요일 휴관

류가헌 ryugaheon 서울 종로구 통의동 7-10번지 Tel. +82.2.720.2010 www.ryugaheon.com

호흡하는 기억 ● 400년도 더 된 그 집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아들의 아들, 또 그 아들의 아들로 대를 이어 내려온 집. 하지만 이제 그곳은 빈 집이다. 마치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계처럼 그 집은 아버지의 죽음을 기점으로 멈추었다. 집이 지어지던 때 함께 심었다는 배롱나무만이 400년 세월을 증언한다. 해마다 허물을 벗고 여름 내내 100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우는 거대한 나무는 이 집안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내력의 연표라도 되듯 집을 껴안고 있다.

인주리_어리비치다#2_울트라 크롬 프린트_48×63cm_2010

아버지가 부재한 공간. 작가는 아버지가 떠난 후 자꾸만 그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적막에 싸여 돌처럼 굳어가는 집과 어둠을 닮아 가는 나무들 사이에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는다. 대청마루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라도 된 듯 그는 행여나 자신이 모르는 새 아버지의 혼이 다녀가지는 않았을까, 애달파하며 그 흔적을 집요하게 쫓는다. 아버지가 다녀간 건 아닐까? 나비가 되어, 빛이 되어, 바람이 되어 잠시 들렀다 간 것은 아닐까? 그러니 방으로 너울져 쏟아지는 오후의 나른한 햇볕도, 바람을 타고 마당으로 불어 들어온 낙엽도, 덜컹 열렸다 조용하게 닫히는 문소리도. 그 무엇 하나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부재한 것(혹은 결핍된 것)의 흔적을 쫓는 그의 작업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주 사소하고 미묘한 디테일이다. 그의 시선은 아버지가 한번은 앉았을 방석이나 손과 발이 닿았을 바닥과 벽에 멈춘다. 오래 된 집이면 으레 있기 마련인 얼룩이나 자국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지만 무언가 사연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작가가 아버지가 부재한 집을 피사체로 하면서도 정작 아버지에 대해서는 어떤 직접적인 단서도 보여주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시선의 거리를 유지하며 피사체에 다가서는 그의 선택은 결정적으로 옳았다. 그가 드러내고자 한 것이 결국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라면 굳이 "이것이 무엇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아니, 그것은 애초에 말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

인주리_어리비치다#3_울트라 크롬 프린트_48×63cm_2010

그는 아버지의 어머니가 기대어 앉았던 벽에 남겨진 머릿자국과아버지의시신을염한후에묶은천을잘라내며바닥에남겨진칼자국같은것들은보여주지만, 아버지의 사진은 보여주지 않는다. 분명 방 한쪽 벽엔 아버지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하지만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은 작아서 잘 안보이거나 카메라 앵글에서 벗어나 잘려진 채다. 설혹 아버지의 얼굴이 선명히 보인다고 해도 그 사진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얼굴을 닮았을 뿐, 결코 아버지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카메라 루시다』에서 바르트가 어머니에 대해 말했듯이 아버지의 존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사진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곳에 없는 아버지를 보여주기엔 터무니 없이 부족할 것이니까. 그 어떤 직접적인 것도 부재한 존재를 경험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오직 예기치 않은 순간에만 부재한 존재와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뿐이다. "프루스트가 어느 날 구두 끈을 풀려고 허리를 굽혔을 때, 갑자기 기억 속에서 할머니의 진정한 얼굴을 보았던 것처럼",무의지적인 기억만이 단번에 전체를 생생하게 불러내는 것이다.

인주리_어리비치다#4_울트라 크롬 프린트_48×63cm_2010

작가는 이번 작업에 '숨'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어했다. 사람의 삶이 들숨과 날숨으로 이루어지듯 기억의 삶 역시 숨쉬듯 우리를 감싸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일까? 그의 사진 속 세계는 강한 도발이나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덤덤하고 차분하고 평온하다. 그리고 그것은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의 순환구조를 닮았다. 결국 호흡한다는 것은 살고 죽는 것과 다름 아니다. ● 솔직히 대개의 죽음 체험은 타인을 통해, 그리고 그 타인의 부재를 감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정작 죽음의 본질을 만나는 것은 그것이 누구의 죽음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죽음을 대하는 한 개인의 시선에서 결정된다. 죽음에 대해 거리를 둘 때 우리는 알 수 있다. 죽음이 고통이거나 동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또 다른 힘을 가진 그 무엇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인주리-어리비치다#5_울트라 크롬 프린트_73×110cm_2007

이제 집은 아버지다. 부재하는 존재가 살아 숨쉬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상상 속의 공간이다. 빈 집에서 부재하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작가는 슬픔과 사랑을 느낀다. 그 과정을 통해 결핍의 자국들은 존재를 증언하고, 기억과의 대면은 죽음에 대한 인정으로 이어진다. 먼저 떠난 자에 대한 헌사라 할 수 있을 그의 작업이 그리움의 사진인 동시에 결국 우리 모두 죽음에 닿을 것이라는 평온한 예언으로 읽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 전미정

Vol.20110412b | 인주리展 / INJURI / 印珠里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