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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414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ARTSPACE H 서울 종로구 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서울을 치유하기 위해 나타난 노자 - 윤세열의 작품에 관한 단상 ● 겸재의 오마주를 통한 불편한 경계의 인식 ● 윤세열이 이번에 보여준 일련의 그림들은 겸재에 대한 오마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화풍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겸재의 진경산수를 차용하려 했다면 윤세열의 작품들은 그 어떤 예술적 지향점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겸재가 진경산수를 통해 조선 후기 실사구시의 정신을 담으려 했다면 윤세열이 자신의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인간이 상실된 도시의 삭막함 그 자체일 것이다. 전통 산수화에서 여백이란 그 그림의 운치와 분위기를 살려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 면에서 윤세열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여백은 극단의 경계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 여백은 오로지 하늘과 한강뿐이다. 여백이란 그림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중요한 요소지만 이번 윤세열의 작품에서 여백은 주제 그 자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시의 첨탑과 같은 빌딩들이 만들어낸 마천루와 콘크리트로 분명한 선을 그어버린 한강의 모습을 통해 그의 작품에서 여백이란 이미 인간이 사라지는 거대도시의 공허함을 적절히 나타내는 소재이자 주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기술의 발달이 가상과 실제의 경계를 허무는 지금, 아무리 사실적 묘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겸재가 살던 시대에 그의 그림이 가졌던 사상 철학적 세계와의 연관성은 단 1퍼센트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윤세열의 작품에서 단순히 인간 소외, 자연 파괴, 황금만능과 같은 뻔한 주제들만 읽어냈다면 그것은 그의 작품을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오브제를 화폭에 옮겼다면 그 기법이 아무리 훌륭하고 화려해도 예술 작품으로서의 온전한 가치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유행처럼 사회, 예술, 철학 등 전반의 분야에서 화두가 된 적이 있다. 물론 아직도 그 흐름의 연장선에 있기도 하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분명히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성립한다. 이성 중심적 사고의 총체이며 그로 인한 근대성이 모든 가치의 종착점이라 생각하며 발전론적으로 세계와 사회는 발전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달려왔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앞에 나타난 가장 명확한 결과물은 '도시'라는 이름의 거대 괴물이 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다. 과연 우리는 이성과 발전의 최대 결과물인 이 도시 안에서 무엇을 얻고 있는가? 윤세열의 그림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 물음을 던지고 있다. 한강과 고수부지를 경계 지은 그의 붓끝이 단순히 그림으로만 그어진 선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편한 경계'를 나타낸다고 생각해 본다면 그의 예술 세계를 조금 더 깊이 있게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일 것이다. 조선시대 겸재가 그의 진경산수를 통해 비판하고자 한 점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대와 사회상이었다면 윤세열이 보여주고자 한 점은 무엇일지 함께 더 고민해 본다면 그의 작품세계를 조금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다가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2011 인왕제색도 그리고 서울 ● 서울은 우리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문화의 충돌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여의도를 얻고 밤섬을 잃으면서 우리 사회는 전례 없는 새로운 삶으로 전환을 이루어 내었다. 서양의 물결을 타고 들어온 분석적이고 실제적인 사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경제 성장의 기적과 그 기적에 힘입은 절대적 빈곤의 해결과 질병의 퇴치. 자유의 인권의 신장. 하지만 서울은 호흡이 고달프다.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생태계 파괴, 자원 고갈은 서울에게 인공호흡기가 필요한 상태로 병들게 한다. 개인과 집단의 분리와 단절, 경쟁의 심화에 따른 구성원 상호간의 반목은 서울을 외롭고 삭막한 섬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서울은 외롭고 고달프다. 현대의 합리성이 서울을 해방시켜가면 갈수록 동시에 자기로부터 소외라는 역설적 생채기가 서울을 더욱 감옥같이 옥죄여온다. 윤세열의 산수화는 역설적이다. 산수화는 말 그대로 '산수(山水)'를 그린 그림이다. 산수화의 자연은 신비와 경외의 대상에서 시작하여 현실세계로부터의 은둔과 속세 초월의 관념을 포함하는 유유자적의 공간이다. 윤세열의 「서울의 산수」에는 산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가 바라본 서울에는 '산수'가 역설적으로 재등장한다. 술통을 가득 싣고 뱃놀이를 가는 선비, 학이 노니는 마당이 있는 초가집. 거대한 서울의 압도감에 마치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듯 띄엄띄엄 배치된 산수의 흔적은 멈출 줄 모르는 불도저 뒤에 가려진 우리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윤세열이 서울의 산수화에서 사라져 감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비단, 괴물같이 거대해지는 서울의 외면에 반비례해 사라져가는 옛 모습 뿐만이 아니다. 그가 주로 소재로 삼는 '재개발 된 도시의 풍경'은 달동네의 키 낮은 지붕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모습, 그 지붕아래 미로 같은 골목길을 뛰노는 아들의 부서지는 건강한 웃음소리, 새벽바람에 일을 나서는 이웃을 따뜻하게 지켜주는 가로등의 모습들을 세밀하게 캐치함으로써 서서히 잃어가는 외로운 사람들의 외로운 따뜻함을 간직하고 싶어 한다. 윤세열은 노자를 서울의 산수에 그려낸다. 급속한 현대화의 과정 속에서 겪는 아노미와 서구적 합리성에 의해 병들어 가는 서울의 슬픈 모습을 치유하기 위해 노자를 불러온다. 인생과 자연, 우주에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이라는 약을 짊어진 2011년의 노자를…….
밤섬을 찾아온 '무위'의 노자 ● 윤세열의 작품에서 소재로써 '밤섬'은 서울의 변화를 보여주는 그만의 아이콘이다. 63빌딩이나 국회의사당 등의 주변 환경에 홀로 우뚝 선 밤섬은 그가 '서울의 산수'를 그려내는 데 있어 독특한 영감을 제공한다. 시인 함민복은 "섬이 혼자가 있으면 섬이 아니다"라고 한다. 하지만 밤섬은 이제 孤島가 되어버렸다. 1968년 2월, 여의도를 얻기 위해 폭파 해체된 밤섬은 이제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쓸쓸한 섬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왜 윤세열은 우리에게 다시금 밤섬에 주목하는가. 그것도 노자를 서울로 데려 와서 말이다. 인위는 부작용을 만든다. 인간은 유전자부터가 이기적이라는 말을 받아들여야 할까? 인위는 욕심이다. 내가 무엇인가 잘 해봐야겠다는 생각,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인간에게 욕심을 만들어낸다. 이는 반목과 필요 이상의 경쟁, 사회·정치적 모순을 초래한다. 톱니바퀴에 끼여서 돌아가는 모던 타임스의 채플린처럼, 밤섬은 호흡이 가쁘다. 모두 자연적인 것을 거부하고 인위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에서 비롯된 부작용이다. 인위의 치유제로써 '무위(無爲)'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떻게 서울의 밤섬으로 노자를 데려와야 할까.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인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발생하는 해롭고 이기적인 행동에 대한 거부다. 거짓 행위를 버리고 자연의 자연스러운 순리에 따라 순응하며 살아가는 '더욱 적극적인 인위'다. 노자의 무위는 노자 사상의 핵심 용어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자연에서 인간이 갖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돌아가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하는 모든 작위와 강제에 대한 거부다. 무위는 노자의『도덕경』에서 열두 번이나 언급된다. 이 중에 절반의 사용은 통치자들이 무위를 실천해 올바르게 세상을 통치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어가 있다. 노자는 당시 통치자들의 인위의 정치가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고 보고 무위자연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자연은 무엇일까? 자연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천연적인 변화의 총체이다. 사람은 이러한 길을 갈 때 완벽하고 조화로운 움직임을 갖게 된다. 자연적인 상태에서의 사람은 원래 행복하지만 인위적인 사회의 변화로 인해 스스로 시지프스의 고통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문제를 만들어낸 원인으로 다시 돌아가면 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여의도를 버리고 밤섬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결국 무위는 순리에 맞도록, 자연의 변화에 맞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적극적인 처세 철학이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위로써 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게 없다(爲無爲則無不治)' 윤세열은 작품을 통해 물음을 던진다. 오늘날 생태계의 파괴와 인간의 소외는 어디에서 오는가. 누가 밤섬을 홀로 있는 외로운 섬(孤島)로 만들었는가. 윤세열의 조형언어_사라져가는 시간의 흔적들에 대한 애착 ● 윤세열은 서울로 노자를 데려왔다. 황량한 도시의 거친 숨결 위에 노자의 아이콘을 그려낸다. 술통을 가득 싣고 뱃놀이를 가는 선비. 학이 노니는 마당이 있는 초가집. 작가는 황량한 서울의 眞景에 '무위'라는 약을 처방한다. 수없이 반복되는 겹겹의 선으로 숨이 가쁜 도시 풍경. 그 앞에서 노자의 처방이 담긴 아이콘은 왜소하고 초라하다. 숨이 가쁜 도시의 풍경이 '인위'라면, 초라하고 왜소한 아이콘은 '무위'의 처방이다. 하지만 그 처방의 효과는 크다. 무위로써 처방하면 작아도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윤세열은 화폭을 그렇게 처방한다. 화폭에는 우리시대의 산수가 담겨 있다. 숨 가쁜 우리의 일그러진 산수가 있고, 우리가 지향해 가야 할 미래의 산수가 있다. 황사비가 내린 것 같이 뿌연 잿빛의 도시 가운데에는 우리의 내면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지향점이 있다.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인류가 만들어 낸 문명과 야만이라는 흑백의 절멸 속에 등장하는 빨간색 옷을 입은 소녀가 있다. 윤세열의 그림이 그러하다. 우리는 그 빨간 옷을 입은 소녀를 보면서 마지막 남은 희망을 떠올린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노자의 아이콘을 보면서 자연스레 숨 쉴 수 있는 서울의 산수를 희망한다. 그 속에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가득하다.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은 아름답다. 그것이 사라져 가기에 더 아름다운 것이다. 화폭에 등장하는 노자의 아이콘에는 그런 따뜻한 애정의 편린이 가득하다. ■ 박상환
Vol.20110411h | 윤세열展 / YOONSEYEOL / 尹世烈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