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밭에서 한밭을 만나다

권인숙_사윤택_윤소연展   2011_0409 ▶ 2011_0507 / 월요일 휴관

권인숙_작은방, 우울한 일기 그리고 행복한 나의무대 II_캔버스에 혼합재료_97×162cm_2009

작가와의 대화 / 2011_0409_토요일_06:00pm

기획_박정구(스페이스 씨 큐레이터)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오픈스페이스 배 OPENSPACE BAE 부산시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 297-1번지 Tel. +82.51.724.5201 spacebae.com

세계를 그리는 세 개의 時角 ● '오픈스페이스배'에서 매년 주최하는『배밭에서 한밭을 만나다』전이 올해로 4번째를 맞았다. 한 지역의 '대안공간'이 다른 지역 작가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전시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배가 위치한 부산이라는 지역의 미술이 지닌 정체성을 찾고,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작가들의 작업이 펼쳐 보일 지향이 보다 탄탄한 근간 위에 서도록 도우려는 노력 가운데 하나로서, 타 지역 미술과 견주고 소통하는 일을 의미 있게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면에서 여의치 못한 여건을 가진 '대안공간'이 이러한 프로그램을 단지 운영상의 기법이나 일회적 이벤트로 여기지 않고 꾸준함을 버리지 않음에 대해 깊은 공감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대상이 다름 아닌 한밭이라는 점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이번 『배밭에서 한밭을 만나다』전은 '세계를 그리는 세 개의 시각'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대전을 근간으로 활동하는 작가 3인이 자신이 생명활동을 꾸려가고 있는 이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와 소통방식, 혹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보여주는 작품전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인생관, 혹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사적인 사물과 공간, 그리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우리가 대하는 일상적인 그것과는 다른 낯선 세계를 창출해 보여준다. 장르 파괴와 설치, 영상과 테크놀러지가 일반화 된 지금,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린 그림만으로 전시를 하고자 하는 이유는, 회화가 그것들에 비해 작가의 신체가 가장 중요한 매개체인 생산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신체를 매개로 한 생산물은 인간의 정신이나 감정을 가장 순수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육화해 낸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작가의 본성과 미적인 감각이 가장 명쾌하게 들어나는 수공품(手工品)일 것이라는 생각인 것이다. 전시가 그러한 전제를 가진다는 것은 결국, 회화를 통해서 '한밭'을 근거로 삼고 있는 작가들과 '부산'을 근거로 하는 작가들 사이에 구별을 둘 만한 감수성이나 미적 취향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들 삼인조차 대전에 연고를 둔 많은 작가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한밭 인근에서 벌어진/벌어지는 회화의 정서가 가진 어떤 한 단면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우리나라 미술에서 지역적 특성을 구별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어떤 식으로든 확인해낸 구별이 미술의 지역적 정체성을 부여하는데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지역성과 세계성, 특수성과 보편성, 그리고 지역적 정체성 등의 문제는 별개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다만 이렇게 지역을 옮겨 함께 전시를 함으로써, 한 지역을 감싸고 있는 대기의 기운에 의해 미처 충분히 주목하고 있지 못했던 것, 즉 미술과 그것을 둘러싼 많은 것들에 대한 접근과 해석에 무수한 다양성이 존재함을 재차 각성함으로써, 자신 지역에 혹시 묵인되고 있을 수도 있는 정태적·퇴행적 양상들을 경계하는 계기로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이처럼 지역 간의 교류나 비교가 꾸준한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원인이나 목적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고 보아야하는 면도 존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중앙' 대 '지역'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루어지는 지역의 연대는 각자가 가지는 결핍을 메우고 해소하며, 또한 동질감과 동료의식을 채우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미술이 해결해야할 난제들은 무수히 많고, 중앙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점들도 많다. '광역시'라는 허울로 '특별시'에 버금가는 수혜를 받고 선민의식을 지닌 대한민국 제 2의 도시 부산과 중부 최대 도시 대전은 미술에 있어서만큼은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할 만큼 난형난제의 형편에 놓여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한 형편은 여타 광역시 또한 마찬가지이다. 문화예술은 여전히 '서울 빼면 다 시골'이라는 현실적인 상황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지역의 문제들 해결하고 나름의 경쟁력이나 정체성을 확보하는 필수적이고 선결적인 과제는 다름 아닌 내부의 모순과 불합리의 해결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중앙보다 앞서 내적인 문제들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해결해 나갈 때 비로소 경쟁력과 자생력의 끄트머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소위 '대안공간'이 궁극적으로 견지해야할 노선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이들 내적 불합리와 모순을 보다 직접적으로 지적하고 대결해 나가야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배밭(부산)과 한밭의 교류와 협력이 가지는 의의 또한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한 연대로 발전할 가능성을 만드는 일이라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고 본다. 이번 전시가 네 해에 이르는 한밭에 대한 배밭의 노력과 정성에 조금이나마 답이 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아울러 한밭에서도 조만간 배밭이 공들여 찾아내고 있는 부산미술의 성과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져 한밭과 부산 모두에게 실질적인 힘과 격려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권인숙_작은방, 우울한 일기 그리고 행복한 나의무대 IV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10
권인숙_투명한 자유 VII_캔버스에 혼합재료_112×162cm_2010

권인숙은 기본적으로 본인이 인연을 맺었던 일상의 사물이나 공간을 소재로 작업한다. 자신의 소지품이나 집, 작업실, 여행지 등이 그것이다. 그는 그러한 사물이나 공간을 이용하여 시간과 사건, 기억과 자기존재가 축적된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통상의 3차원 세계와는 달리 시간과 공간이 휘어지고 왜곡된 듯이 보이는 사뭇 기묘해 보이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어떤 한 시점(時點)에 그린 작업실 모습에는 그 이전에 그렸던 작품과 물건들이 당시에 놓였던 위치나 모습대로 등장하고, 다음 시점에 그려진 작업실에는 그렇게 그려졌던 그림이 다시 소품이나 배경으로 등장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여행했거나 기억에 남는 장소를 그리면서 예의 그림이 포함된 작업실이 본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양 '슬쩍' 삽입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낯선 여행지 속에 작가의 개인적인 공간과 사물이 놓이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다음에 그려진 그림의 어디엔가 놓이는 축적이 반복됨으로써, 작가에게 익숙한 공간과 사물은 작가 개인의 삶을 알려주는 정보나 소소한 사적인 신변잡기의 기록으로서의 단편적인 역할에서 벗어난다. 평범한 사물과 공간이 통상적인 삼차원적 질서를 벗어나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 놓이고 중첩됨으로써 보는 이에게 새로운 경험과 감정적 충격을 일으키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소소한 일상적 사물이나 장소와 사적이면서 유일무이한 기억이나 관계를 맺고 만들며 살아간다. 작가 자신에게 사적인 일상 사물과 공간은, 그림을 보는 이 누구에게도 해당되는 개인적인 기억 속의 사물과 공간일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사물과 공간은,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의 세계를 드러내고자 했던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과 일견 흡사해 보이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우리들 각자의 사적인 기억과 이야기가 담겨 있는 대상으로 일반화되어 그 사물이나 공간에 대해 잊고 지내던 의식 깊은 곳의 감정과 정서를 끄집어 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윤택_순간의 유희-TV의 기억_캔버스에 유채_132×162cm_2010
사윤택_Momentary play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1
사윤택_Momentary play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1

이번에 전시되는 사윤택 그림의 특징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관심이다. 그것도 우리가 사는 일상적인 시공간이 아닌 전혀 뜻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의 그림이다. 그의 그림에는 테니스공이 흔히 등장한다. 그러한 그림에서는 갑작스레 어디에선가 날아온 공을 맞거나, 날아온 공에 당황하여 대응하는 순간이 화면의 중심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사건의 배경으로는 대체로 주변 풍경이 그려지게 된다. 한데, 사건의 주인공의 모습은 다중노출 사진처럼 두개 혹은 그 이상의 동작이 겹쳐지며, 공 또한 이리저리 튕겨 움직인 흔적들이 화면 속에 공존한다. 이는 짐작대로 여러 개의 시간이 한 화면에 중첩된 표현이다. 그러니까 그는 한 화면에 여러 개의 시간을 함께 담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충격이 가해지는 순간 열리는 새로운 시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림 속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은근히 써둔 'The Open Time'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을 맞거나 갑작스런 사건이 발생한 순간 주인공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이 열리면서(또는 틀어지면서, 깨지면서…) 다른 시공간들과 겹치거나 교차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교차일 수도 있고, 물리학에서 말하듯 평행한 여러 세계가 겹쳐 다른 층위의 세계에 존재하는 나를 만나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그림들도 마찬가지이다. 다이빙을 하는 사람과 낙하산을 탄 사람이 교차하는 순간,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 휘익 지나치는 순간, 고급 자동차가 단속카메라를 눈치 채고 급히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그리고 광고 중인 TV를 리모콘으로 끄는 순간, 상대의 공을 쫒던 테니스 선수가 그 공을 놓지는 순간도 모두 일순 여러 개의 공간과 시간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극히 짧은 시간이다. 자연스럽게 연결된 듯 보이는 배경들도 차원의 모서리에 끼어 동서남북 창마다 아프리카 사막, 북극 빙원, 아마존 밀림, 그리고 뉴욕 도심이 동시에 열려 있는 집처럼 제각기 다른 시간과 차원의 공간들이 교묘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하늘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로 상징되는 태초의 시공간과 현재의 시공간이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회화가 시간을 표현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것이 영화와 비디오가 생겨난 오늘날 회화의 한계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이유의 하나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이기 때문일까. 사윤택은 연속된 흐름이나 중첩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의 중첩과 교차라는 방식으로 다중(多重)의 시공간을 동시에 표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는, 그가 조합해 놓은 한 화면 속의 사건들과 대상들은 제각기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건들의 조합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순간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의 배경이 되고 있는 건물들, 인물들과 그들의 행위들은 그의 기억 속에 깊이 박혀 문득문득 의식 속으로 튀어 오르는 잊기 어려운 사건의 기억들이거나 잠재된 욕망의 기호들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이 자신의 무의식이나 억압된 의식, 카오스, 혹은 파토스적인 요소들과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도 크게 틀리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된다. (박정구의 개인전 서문에서 발췌)

윤소연_동행_캔버스에 유채_72.7×116.7cm_2011
윤소연_문을 열면 어느새 나는 그 곳에 와 있다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0
윤소연_희정당-그와의 떨리는 조우_캔버스에 유채_130.3×89.4cm_2011
윤소연_좋은날_캔버스에 유채_112×194cm_2011

윤소연의 근작은, 자아를 투과하여 재구성된 세계의 형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을 바탕으로, 밖을 향해 조심스럽게 내어 놓은 촉수에 감지되는 상념들을 자신의 자취가 남은 특정한 공간과 사물을 조합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전부터 그가 그려온 개인적이며 동시에 여성적인 취향을 느끼게 하는 옷가지들, 장신구, 집안과 작업실의 가구들은 지극히 일상적인 평온함을 느끼게 하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로 구성된 화면은 그저 평온하다거나 따뜻하다는 생각을 가지기에는 무언가 불온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불온함은 그가 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소박하고 친밀한 소품들로 구성된 자신만의 일상적 공간을 단순히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데서 야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말대로 "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인 일상의 단면들을 무대 위로 끌어냄으로써 특별하고 의미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일로 전위(轉位)됨으로써, 일상적 공간, 혹은 일상적 세계는 진동하고 균열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결국은 '사적이고 일상적인' 외피 저변에 깔린 삶 또는 세계의 근원적 부조리, 혹은 나와 외계가 맺고 있는 관계의 가벼움, 혹은 불안정성에 대한 진술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공간을 슬쩍 드러냄으로써 보는 이를 끌어들이는 통상적인 방식보다는, 적극적으로 의도된 노출을 통해 우리를 그의 사적 공간으로 초대하는 방식으로 세계(외계)와 소통한다. 그리곤, 현실세계에서 그가 희망하는 소통, 혹은 관계란 속성상 유리처럼 깨지기 쉽고 불안정한 것이기에, 그는 화면 속의 그것이 자신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초대한 자와 초대받은 자, 즉 주객의 관계가 모호한 모두의 무대, 모두의 공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소품과 그것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개방적 공간(여행지나 명소, 혹은 익명의 자연공간)과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4차원적 결합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화면에서, 우리는 사적인 공간(세계)와 공적이고 개방적인 공간(세계)이라는 그 두 세계 사이의 문턱에 마주서있는 그와 우리의 모습을 본다. 아울러 그가 있었음직한 빈자리 옆의 또 다른 빈자리는 다름 아닌 우리의 자리였음을 본다. 그는 화면에서는 간간이 카멜레온을 보게 된다. 어쩌면 카멜레온은 영원히 등에 집을 짊어지고 다니는 달팽이가 부러울지도 모른다. ■ 박정구

Vol.20110409c | 배밭에서 한밭을 만나다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