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월~금_11:00am~07:00pm / 토_12:00p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차 GALLERY CHA 서울 종로구 통의동 35-97번지 Tel. +82.2.730.1700 www.gallerycha.com
기억을 기억하는 방법 ● 우리의 주변에는 무심코 생활하고 지나치는 거리, 공간, 장소들이 있다. 너무나 익숙해서 주목 받지 못한 채 관심의 저편에서 존재하는 일상의 공간들. 작가 정진은 이러한 일상의 공간들을 그녀의 경험과 경험의 기억, 그 기억을 기억하는 통로의 조건으로 경험한다. 사방 2km를 넘지 않는 지역에서 20여 년을 살아온 그녀는 일상의 공간, 즉 '동네'의 구석구석을 20여 년의 시간의 켜가 응축된 고유한 장소로서 경험하고, 이를 캔버스 위에 물질화시켜 기억하려 한다.
정진이 공간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방식의 특이한 점은 공감각적이고 시간적으로 중층적이며, 푼크툼punctum적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에 있다. ○○동 몇 번지, ▲▲몇 동과 같은 지리적 위치로서 공간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무슨 용도의 장소인지, 지대가 얼마이고 주위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 지와 같은 타인과 공유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공간을 바라보는 것 또한 아니다. 그보다는 칠흑 같은 밤에 나무잔가지의 잔잔한 흔들림, 벽돌담의 쏟아질 것 같은 투시감으로 압도하는 좁은 골목, 2층 방의 불 켜진 창문, 일시에 날아오르는 비둘기떼, 현관문 위의 켜진 비상등, 비 오듯 떨어져 내리는 햇빛, 공터를 구르는 테니스 공..과 같은 훨씬 사소하고 하찮은 세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예리하게 심장을 꿰뚫는 것들을 통해 공간을 경험한다. 작가가 공간에서 느끼는 이러한 푼크툼의 요소들은 그녀를 특별한 감정상태로 이끌면서 무의지적인 기억들을 불러일으키고, 화면 위에서 프루스트적으로 확장하며 개인적인 상징과 조우한다.
'주인의 실수로 갑작스럽게 길가에 홀로 남겨진 한 짝의 장갑을 보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를 쫓아가다 돌에 걸려 넘어진 어렸을 적 일을 떠올리며, 당시 빨리 그녀를 쫓아가지 않으면 홀로 덩그러니 남겨질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정진)
정진이 어릴 적 경험한 불안의 감정은 '한 짝의 장갑', '멀어지는 뒷모습의 여인' 같은 상징적 이미지에 고착되었다. 이것은 외상적 충격과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이 기억 속에서 순화되어 변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서사가 들어있는 수수께끼와 같은 상징들은 작가의 '동네'- 현재에도 그대로 남아있거나 재개발을 통해 사라져버린-의 이미지 위에 불쑥 등장하면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정진은 완성된 이미지를 계획적으로 구상하고 그리는 방식이 아닌,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을 취한다. 장소의 선택과 개인적인 상징과의 결합 또한 무의지적인 기억의 연결지점에서 이루어진다. 한편 그녀의 내부를 깊숙이 찌르면서 작업의 시발점이 된 '하찮은 세부의 요소들'은 조형적으로 강조될 당위성과 무관하게 화면 곳곳에서 관람자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일련의 시리즈에 등장하는 동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작가의 개인적 상징처럼 유년기의 희미한 기억 안에서 형성되는 상징들이다. 이들은 세부적인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레퍼토리와 심상만으로 기억에 남아 일련의 감정과 감동을 재생시킨다. 작가는 어릴 적 동화를 접했을 때의 경험적 기억을 불러일으켜, 그 감정과 맞닿아 있는 일상적 공간에 삽입하여 서사를 만들어낸다. 동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한 짝의 장갑'과 '멀어지는 뒷모습의 여인'보다는 집단적인 상징이기 때문에 관람자로 하여금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마주할 수 있는 좀더 개방된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마주침은 극히 개인적인 것이 될 것이다. ● 정진은 공간, 기억의 상징들을 감각적으로 전이시켜서 화면에 표현한다. 그녀는 정돈되지 않은 붓 터치, 비결정적으로 흘러내리는 물감의 자국들, 메꾸어지지 않은 채 남아있는 화면의 여백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곧 사라져 버릴 듯한 감정들을 아슬아슬하게 쫓는 유희를 계속한다. 하지만 이는 고정되지 않는 것, 명확히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서, 춤추듯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풍경과 수수께끼와 같은 개인적 상징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고 사라져가는 기억을 기억하기 위해 작가는 경험과 기억, 환상을 모두 모아 펼쳐낸다. '기억의 감각으로의 전이'를 통해서, 그녀는 사소한 내용들을 잃어버릴지라도, (혹은 원래의 기억과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더라도) 더욱더 농밀하고 극대화된 기억을 간직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프루스트적인 확장의 시작에는 일상 공간이 있다. 작품의 제목에서 제공하는 객관적인 정보로 파악할 수 없는 공간을 행인 하나 없이 텅 비워낸 후, 상징적인 존재들로 채워 넣는 유희적 행위. 정진은 기억을 기억하기 위해 실재하는 공간을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변모시켰다. ■ 최솔구
Vol.20110404d | 정진展 / JUNGJIN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