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피무늬 의상실

최은주展 / CHOIEUNJU / 崔銀珠 / painting   2011_0401 ▶ 2011_0410

최은주_호피머플러를 한 고양이들_캔버스에 유채_50×50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pm~06:00pm / 일요일_12:00a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82.2.738.2745 www.gallerydam.com

비어있는 모피, 그리고 부재하는 욕망 ● 오랜만에 전화로 알려온 후배의 전시회 소식... 그리고 그녀가 보내온 이미지에는 호피를 그려 넣은 작업들이 몇 점 있었다. 멍하니 그녀의 작업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모피 입은 비너스'의 이미지였다. 차가운 대리석에 걸쳐 입은 모피, 그 강렬한 이미지는 그녀의 작업을 압도하며 필자의 글쓰기는 그녀의 작업 안으로 들어가기보다는 그녀의 작업 주위를 서성이는 것만으로 그칠 것 같다. ● 어찌 보면 모피는 모피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또 다른 것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마치 그리스도교의 예수를 상징하는 십자가처럼 일종의 이콘(Icon)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십자가처럼 정형화되지 않은 그녀의 작업(모피)들은 어떤 혐오스러움이나 공격성, 광기, 욕망들을 감추는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무정형(informel)적인 그녀의 작업은 조르쥬 바따이유(Georges Bataille)를 따라 말하자면 '형상(모피)과 배경(밀림) 사이에서 자아와 타자가 근본적인 구분이 사라지는 공간'으로 보인다. ● 한 가지 밝혀두고 갈 지점은 무정형(informel)이 밝히는 바는 미술사조의 추상표현주의- 구지 말하자면 그녀의 작업은 소박파(naïf art)에 가깝다-가 아니다. 단지 정형화(standardization)의 의미를 상쇄시키는 의도에서 쓰인 것이다. 언뜻 보면 모피라는 선택으로 그녀의 작업은 욕망을 상징하는 정형화된 패턴의 작업으로도 읽혀질 수 있지만, 욕망은 우리의 결핍상태의 표시이기도 함으로 그 결핍을 정형화 시킨다는 것은 모순이다. 없는 것을, 포착이 불가능한 지점을 정형화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또한 욕망의 대상은 언제나 초월적이고 우리는 쾌락과 유혹 등을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단지 그 욕망의 환각적인 감각을 희망할 뿐이다. 소유하지 못함에서 지속적으로 갈구하는 지점이 욕망의 본질이다. 들뢰즈(Gilles Deleuze) 말을 빌리자면 '욕망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향유(jouissance)를 추구한다. ● 하지만 다시 그녀의 작업을 보면 다른 이유에서 의문점이 생긴다. 왜 그 욕망을 재현하는 것으로서 그녀의 작업은 여기 이렇게 있는가? 이 구상적인 재현이라는 영역은 어찌 보면 진부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녀의 작업은 좀 더 내밀한 것이 필요한데 말이다. 재현이라는 속성 중에 재현은 그것을 내보이기위해 주변을 배제하고 작가의 의도만을 얻으려는 욕망이 들어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녀는 가장 진부한 것으로 가장 내밀한 작가의 의도를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최은주_호피무늬 원피스_캔버스에 유채_40×40cm_2011
최은주_호피무늬코트_캔버스에 유채_35×35cm_2011

그녀의 모피는 그 어떤 것을 욕망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필자는 말했다. 아직 욕망에 다다르지 않은, 지금 있는 모피는 무엇이며 그 모피가 그녀가 비너스를 향해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히스테리일 것이다. 히스테리는 애벌레가 성충이 될 수 있는 비정상적인 발아체이기 때문이다. 이 발아체는 진부한 것으로부터 탈주하게 하는 감각을 부여하며 그 감각은 하나의 범주에서 다른 범주로의 전이를 가능하게 해준다. ● 들뢰즈가 지은 감각의 논리를 통해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층에서 다른 층으로,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주체를 이동시킬 수 있다. 마치 우리가 레이디가가와 미드에 흠뻑 빠지면 환상의 아메리카로 다다를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 때문에 이 '감각의 발아체는 탈형식화(ėeformation)의 주역이다.' 즉 히스테리는 신체를 탈형식화하는 행위자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회화는 '재현아래서 재현을 넘어-분명하게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존재하는 힘과 같은- 현존(presence)을 추출하기를 기다린다. 히스테리로써 표현된 저 호피는 존재와 사유사이의 실재적인 단일성의 분활을 비판하며 변덕스럽게, 결핍으로 재배치되는 것이다. ● 이 히스테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건 변덕스럽고 결핍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다양체들은 아닐까? 들뢰즈가 언급한 '다양체의 요소들은 감각 가능한 형식도 개념적인 의미작용도, 따라서 지정 가능한 함수도 지니지 않아야 한다...' 바로 우발적이고 내재적인 것이어야 한다.

최은주_호피무늬 옷_캔버스에 유채_40×40cm_2011
최은주_호피무늬 옷_캔버스에 유채_120×90cm_2011

자 그녀에게서의 모피의 상징, 환상과 기다림은 어떤 속성이 있을까? 그것은 조금은 천대받은 비운의 천재 작가 자허마조흐(Sacher-Masoch, Leopold von)를 통해 찾을 수 있겠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잊혔던 비운의 천재를 발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앤디워홀(Andy Worhol)이었다. 1966년 앤디 워홀이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니코(The Velet Underground & Nico)라는 그룹과 '모피입은 비너스(Venus in Furs)'라는 음반을 내면서 마조호는 '매저키즘' 이라는 용어로 비하되었던 그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 이 비너스의 계보는 사실 마조흐 이전의 미술사 안에서 발견 할 수 있는데, -필자가 도상학(icon)을 살짝 경계하는 것은 이도상학의 이미지가 매우 강한 힘이 있어서 판단의 형평성을 흐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잔인한 여신의 모습은 보티첼리, 티치아노, 루벤스, 마네 등등 우리에게는 사실 낯선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순화된 나부로 나타나는 이 비너스의 모습에서 그 공격성과 잔인함은 거세되어 있었다.

최은주_호피무늬 치마_캔버스에 유채_40×40cm_2011
최은주_호피무늬 옷_캔버스에 유채_35×35cm_2011

하지만 마조흐에 의하면 모피는 아름다운 여자들의 공통점인 포악성(Tyrannei)과 잔인성(Grausamkeit)의 상징이며, 냉정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모피에 둘러싸일 때 잔인한 맹수의 품격을 띠게 되고, 냉정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모피에 둘러싸일 때, 잔인한 맹수의 품격을 띄게 되고 그녀는 잔인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의 극치- 즉 여신이 되는 것이다. ●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메디아(Media)는 조국을 배반하고 남편의 새 아내들을 독살하고 자기 자녀들까지 살인하는 잔인한 여인으로 나오는데 비너스나 메디아는 팜므파탈과는 다른 성스러운 폭력성을 가진 인물로 봐야한다. 악녀에서 여신까지 동일한 속성으로 보이는 폭력과 공격성이라는 네거티브의 여성성, 창녀 같은 어머니, 이미지들은 대지의 어머니 '가이아(Gaea)'나 '성모마리아'의 짝패나 동전의 뒷면 같은 존재로서 여성상이 가지는 중요한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 하지만 작가의 모피는 비너스가 부제 한다. 이는 그 빈 모피를 입는 자신을 상상하거나 모피와 어울리는 밀림을 상상한다. 순화된 공경성은 밀림(화면속 배경)으로 표현되며 숨겨진 공격성은 작가 안에 내제한다. 그럼 여기서 중요한지점이 발생한다. 부제하고 내제된 비너스, 그녀는 모피입은 비너스가 아니라 마조흐의 소설 『비너스』의 여주인공 반다(Wanda)가 아니라 제버린(Seberin)으로 미끄러진다. ● 따라서 그녀는 모피입은 비너스를 기다리는 마조히스트인 셈이다. 마조히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매를 맞고 굴복 당함으로써 얻는 만족감이 중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에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최은주는 부재하는 욕망을 성취하려는 그 태도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직접적인 성취를 위해 시간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그 상태를 자신의 그림으로 남겨놓는 것이다. ● 자 이제, 한 가지 가닥이 잡혔다면, 그녀의 작업은 사회와 이시대의 포괄적인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그녀가 생각하고(욕망의 부재와 갈망)있는 부분을 제시하고 그것을 관람자들과 그 의미를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그녀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는 장치로서의 재현과 그 매개체(모피)로서 충분히 관람객들에게 반영되고 그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거나 저마다의 스크린으로 각기 다양한 의미로 투영이 될 것을 관음하기를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 ■ 윤제

Vol.20110402c | 최은주展 / CHOIEUNJU / 崔銀珠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