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주최 / 갤러리 무이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무이 GALLERY MUI 서울 서초구 서초동 1658-14번지 무이빌딩 1층 Tel. +82.2.587.6123 cafe.naver.com/gallarymui.cafe
동심원 사이의 실 한 가닥 : 소북의 첫 개인전에 부쳐 ● I ● 소북은 한국인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기엔 사뭇 낯선 명칭이다. 얼핏 듣기에 한자어처럼 들리는 그 낱말은 '소리 북'의 준말로서, 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낸 학교 선배의 예명(藝名)이다. 그는 자신의 독특한 예명만큼이나 예사롭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미술대학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추상 조각에 타고난 직관을 지니고 있는 미술학도였다. 그의 작품은 형태와 색채의 절대적인 순수함을 추구하여, 말레비치나 몬드리안을 연상시키는 절제된 숭고미를 격조 있게 드러내었다. 하지만 그는 순수 추상을 지향하는 자신의 작품이 인간의 삶과 괴리되어 있다며 항상 푸념 섞인 불만을 털어 놓았다. 그가 표방하는 예술관 속엔 오윤과 케테 콜비츠, 루쉰과 같이 사회 현실을 깊게 끌어안은 작가들이 상찬되었고, 그의 작품과 직결되어 있는 추상 미술의 대가들은 언제나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그러한 예술관을 자신의 작품 속에 수용시킬 수가 없었다. 타고난 작가적 성향과 예술관 사이에 나타나는 모순은 물과 기름처럼 갈무리가 되지 않은 채 계속 평행선을 그렸다. 결국 그는 미술 작업을 한없이 유보해 둔 채, 자신의 예술관에 부합해 보이는 판소리라는 예술 형식에 열정을 쏟게 되었다.
그 후 오랜 수련의 세월을 거쳐, 그는 판소리 명창에게서 소리 전수를 권유받을 정도로 자질을 갖춘 소리꾼이 되었다. 그는 가끔씩 학교에서도 공연을 가졌는데, 두루마기를 걸쳐 입고 뭇 사람들의 삶이 짙게 배인 소리를 구성지게 우려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오윤의 판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그가 자신이 원했던 예술관에 무척 근접해 있다고 생각했고, 그가 품고 있었던 예술적 모순이 판소리의 영역 속에서 해소되었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어느 순간 그렇게 신명나게 몰두하고 있었던 판소리를 등지고, 그는 어이없게도 대전 표준과학연구소의 연구원이 되었다. 누구나가 농담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괴팍스런 행보였다. 그런데, 실재로 그는 표준연의 연구원으로 채용되어 3년여의 기간을 나노 연구를 하면서 보냈다.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 모두가 신출귀몰하는 그의 삶에 혀를 내둘렀고, 나노 공정 기술특허 출원을 할 정도로 전문직의 경계선을 손쉽게 넘나드는 그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내재된 모순을 해소할 수 있는 예술적 수단을 확보하지 못해 결국 예술의 영역을 떠나버린 그의 처지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과학의 영역에서라도 그가 자신의 모순을 해소하고, 거듭되었던 오랜 방랑길을 매듭짓기를 기원했다.
II ● 그랬던 그가 불현듯 미술계로 되돌아왔다. 그는 전시를 잡았고, 작업실을 얻었고,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돌발적인 행보에 만성이 되어 버린 주변 사람들은 또 무슨 바람이 불어 미술로 복귀한 것일까 가볍게 생각했지만, 나는 그의 복귀에 설레는 마음을 가졌다. 대전 연구소에서의 체험이 그에게 무엇인가 궁극적인 결론을 가져다주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때문이었다. 알려져 있다시피 나노 연구는 곧 일상의 경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극소 세계에 대한 탐구이다. 이는 순수 추상의 세계를 지향하였던 그의 미술 활동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실재 삶과의 괴리가 항상 문제되었던 미술의 영역과는 다르게, 나노 연구가 진행되는 과학 영역의 극소 세계는 아무리 일상의 경험 세계를 벗어나 있다 해도 어디까지나 실재 삶 속에 내포되어 있다. 즉 그 세계는 극도로 추상적이면서도 실재 삶에서는 결코 이탈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나는 그가 자신의 오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영감을 확보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미술에로의 그의 복귀가 일견 납득이 갔고, 이제까지 목격하지 못했던 미술의 새로운 차원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
III ● 그는 전시 오픈 날짜 보다 일주일 앞서 작품 설치를 마친 후 나를 전시장에 초대하였다. 나는 그 때도 여전히 극소 세계의 경험에서 그가 어떤 요소를 이끌어 내어 작품 속에 반영시켰을까 하는 의문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일종의 반전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그의 작품이 예상과는 정반대로 극대 세계의 시점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처음으로 받았던 인상은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의 「하늘에서 본 지구」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은 아득하고 낯선 거리감이었다. 일단 전시장의 작품들은 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인간의 일상적인 경험세계를 벗어나 있는 자연물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전시장 초입의 벽면에는 화폭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해서 프레임이 끝나는 곳까지 동일한 무늬가 반복되고 있는 평면 작품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전시장 안쪽 벽에는 거대한 거북의 등껍질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순록의 뿔이 원거리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부착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관객의 관심을 끌어들일 만한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않은 채, 지극히 무심한 자태로 전시장에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뒤통수를 맞은 듯 당황했지만, 전시장에서 그의 작품들이 나타내는 의미를 곰곰이 되짚어 보니, 이와 같은 자연물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는 다분히 나노 연구의 극소세계가 형성했던 여건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극대 세계를 표방하는 자연물들은 관객에게 실재 삶과 관계하고 있다는 느낌을 유지시키면서도, 인간적 일상을 초월해 있는 추상적 영역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있어 극소 세계와 극대 세계가 일상적 삶과 관계 맺는 방식은 동일한 차원에 있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오랜 방랑 끝에 획득할 수 있었던 최적화된 환경 속에서, 그는 오랫동안 억누르고 있었던 자신의 미술가적인 천분을 마음껏 펼치고 있었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모든 형태는 다양한 종류의 색(色)실에 의해 표면이 감겨져 있는데, 그가 실을 사용하는 태도는 추상조각에 몰두하고 있었던 시절에 금속이나 나무를 다루었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완강했던 작품의 질료가 실이라는 유연한 질료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실은 그 시절의 금속이나 나무와 마찬가지로 불순물이 섞이면 안 되는 순수 조형적인 요소로서 엄격하게 취급되고 있다. 물론 그는 구체적인 자연물의 형태와 실을 연계시켜 질료에 내재되어 있는 추상적인 성격을 통제하고 있지만, 형태의 표면 위에서 구연되는 실의 조형미는 말레비치나 몬드리안의 이름을 다시 소환시켜야할 정도로 극단에 이른 추상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얘기가 과장된 것이 아님을 확인하려면 그의 작품의 표면을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된다. 그랬을 때 관객은 오랜 시간 실을 감았던 사람의 손길마저 완전히 표백해 버리는 순수 자족적인 추상성을 접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앞서서 이번 전시의 작품들 가운데, 자연물의 형태를 띠지 않은 작품이 하나 있다고 언급하였는데, 나는 그 작품에서 그가 오랜 방랑을 거쳐 획득하게 된 해법, 즉 추상과 실재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여 미술 작업을 지속시킬 수 있는 그의 해법을 압축적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 작품은 천장과 바닥의 자그마한 동심원을 수직으로 잇고 있는 실 한 가닥이다. 가장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라 일컬어지는 원이 쌍을 이루어 전시 공간의 한계지점인 천장과 바닥에 붙어 있다. 이러한 상황은 나에게 다분히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추상적인 완벽함이란 언제나 인간적 실재의 한계지점에 걸려 있다는 그의 직관을 추측할 수 있었다. ● 이러한 추측에 내 생각을 덧붙여 좀 더 이야기를 이끌어나가 보자면, 인간은 당연히 한계 지점의 피안을 꿈꾸지만, 그것은 도리어 인간적 실재를 약화시켜 피안을 꿈꾸었던 사람을 정처 없는 방황의 길로 내몰게 된다. 아마도 천장과 바닥의 동심원을 잇고 있는 실 한 가닥은 이처럼 방황하는 이들이 붙잡을 수 있는 정처이자 길잡이로서 제공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실 한 가닥 또한 '두 지점의 최소거리를 나타내는 직선'이라는 기하학적인 이상(理想)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상 세계의 이상일 뿐 관객의 몸 앞에서 느슨하게 아른거리는 실 한 가닥은 결코 그러한 최소거리의 직선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장과 바닥의 동심원에 견고하게 붙들려 있는 실 한 가닥은 여전히 이상적인 직선을 지향하는 유사(類似) 직선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만들고 있는 작품이 모두 이러한 유사(類似) 직선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할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를 사이비라 부정하고 실을 끊어버리는 행위는 하지는 않으리라. 그는 오히려 유사(類似) 직선의 다양한 변용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극소 세계와 극대 세계의 원근법 아래에서 추상과 실재가 공존하는 예민한 균형의 지점을 관객에게 체험케 하는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이야말로 그러한 가능성이 실현될 수 있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 강정호
Vol.20110321g | 소북展 / SOBOOK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