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의 사회학

유정훈展 / YUJUNGHOON / 兪政勳 / painting   2011_0317 ▶ 2011_0330

유정훈_기호의 사회학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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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318_금요일_06:30pm

기획_제지마스

관람시간 / 10:00am~12:00am

제지멀티예술공간 JazzyMultiArtSpace 서울 강남구 신사동 532-4번지 MASA빌딩 B2 Tel. +82.2.3445.8069 www.jazzymas.co.kr

'개인적이고 살아 있는 것을 그린다는 것에 대하여' ● 화가라면, 누구나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할 무렵에는 평범한 그림은 그리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충만해 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붙이는 까닭은 그가 의도적으로 어떤 작품을 그리겠다는 확신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다. 소설가가 작품 속 등장인물에 이름을 붙여 이야기를 전개하듯이 화가는 작품에 이름을 붙이고, 그 작품들이 모이는 공간에 테마를 부여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한다. 이렇듯 좀 더 만족할 만한 그림을 향한 화가의 의지는 작품을 상징적으로 설명해주는 갖가지 '기호'로 압축되어 나타난다.

유정훈_기호의 사회학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10

그런데 가끔씩, 혹은 일정 단계를 지나면 그런 보편적인 방식을 그만두고 싶을 때가 찾아온다. 이런 그림을 두 번 다시 그리고 싶지 않다, 이건 내가 정말로 그리고 싶은 그림이 아니다, 라는 회의감에 빠진다. 이런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신의 이름은 널리 알릴 수 있되 시지각(視知覺)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방식에 확신이 들지 않을 것 같아서 붓을 멈추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정작 화가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성공 공식의 궤적 아래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미술'계(界)'의 냉엄한 벽에 부닥칠 때이다. 비록 겉으로는 미술계의 동향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작가라도 어떤 커다란 덩어리처럼 이물감이 느껴지는 불합리 앞에서는 씁쓸한 고독을 맛보게 된다.

유정훈_기호의 사회학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10

내가 만나본 유정훈도 그러한 작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가급적 세상과 거리감을 두고, 남들이 한 번쯤 흘깃거리는 유행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하고자 입을 앙다문 듯 보였다. 그렇기에 그가 거둔 미학적 성과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흑백의 결합선이 화면을 자유로이 오가는 가운데, 그의 손을 거친 세상사를 구성하는 갖가지 삶의 기호들은 정형적이지 않아서 눈에 쏙 들어온다. 일견 유희적으로 다가오는 그의 그림은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을 새겨 넣고, 인간의 사회적인 관계성을 고민하고, 이성과 감성을 교차시키고, 모두들 앞만 보고 달려가는 '고독한 군중'의 소외감을 차분히 아로새기는 지혜로움을 담고 있다. 그의 그림 앞에 서노라면,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철 지난 유행가의 가사가 어지간한 사변(思辨)보다 더욱 더 절실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유정훈_기호의 사회학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10

유정훈이 취한 화가로서의 태도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은 그가 그리기라는, 화가로서의 본분에 고도의 집중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화가라는 업(業)이 무한히 가변적인 인간의 한 유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화가가 잉태한 예술작품이 인간이라는 변화무쌍한 요소와 지구 위에 굳건히 고정된 자연을 조합시키는 흔치 않은 가치를 지닌다는 자부심까지 버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의 소설가 마루야만 겐지가 "소설가의 재능은 다른 세계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세상을 위해서라는 둥 인간을 위해서라는 둥 떠드는 소설가"에게 등을 돌렸듯이 우리 시대 작가들의 갈지 자 행보가 영 마뜩치 않다는 속내를 부러 속이지 않는 그에게서 근래 맛볼 수 없었던 청량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유정훈_기호의 사회학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45cm_2010

그래서 유정훈은 오늘도 '개인적이고 살아 있는'(에밀 졸라)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그에게 모든 그림은 오로지 그를 위해 존재한다. 흑과 백의 선의 경계로 캔버스를 구성하고, 삶의 희로애락의 경계를 진실함으로 재현하고, 일상과 세상의 경계가 그렇게 거창한 것만은 아니라는 자연스러움의 미학을 실천하고 있다. 그에게 작품이란 결국 화가의 정신과 육체가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분비물이다. 그렇기에 너무도 소중하고, 또 그렇기에 짐짓 무거운 척할 필요가 없다는 겸손함을 잊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미술계의 모든 것이 지금의 억지스러움을 벗어 던져야 한다고 소리 없이 읊조리는 건 이 때문이다.

유정훈_기호의 사회학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10
유정훈_기호의 사회학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10

그의 작업실을 나서기 전, 나는 유정훈이 마음을 다해 그린 드로잉이 스치고 간 자리에 남은 이미지는 결국 화가의 손이 기억하는 인간이라는 종족의 발가벗겨진 모습일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 속에서는 웃음도 눈물도 결국 매 한가지라는 걸,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세상과 좀처럼 타협할 줄 모르는 유정훈의 그림은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는, 그리하여 내 그림이라고 떳떳하게 말하기 힘든 그림이 왕왕 보이는 시절에 여전히 그림 속에 답이 있다고 믿는 우직스러운 화가가 생존해 있다는 안도감을 안겨준다. 정보를 통한 이성적 인식의 전달이 느낌이라는 정서의 파동을 능가하는 이때, 유정훈의 그림은 무의미하고 무감동적인 것이 오히려 높은 가치를 지니는 현대미술의 현실을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물론 유정훈이 선택한 삶의 방식은 대부분의 화가들이 닿고자 하는 목적지와는 상관없는 곳으로 멀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친숙한 공간에서 아무런 고통과 고민 없이 길을 찾는 것보다, 낯선 공간에서 두려움을 안고 어딘가를 헤맬 때 세상과 실제적으로 만난다는 선(善)을 잊지 말기 바란다. 나는 유정훈이 언젠가 길을 잃고 곤경에 처할 때, 급기야 더 이상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 에밀 졸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이 명제를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 "당신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려 하지 말고, 그저 단호하게 당신의 속성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두려운가? 당신은 힘들여서 죽은 언어로 더듬거리며 말하려 노력할 것인가?"윤동희

Vol.20110319g | 유정훈展 / YUJUNGHOON / 兪政勳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