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902c | 이흥덕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312_토요일_04: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한길 Gallery HANGIL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136번지 예술마을 헤이리 Tel. +82.31.955.2094 www.galleryhangil.com
회화로 세상을 되돌아 보다 ● 이흥덕은 세상에 있는 숱한 사람들과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며 다시 그림으로 세상을 이야기한다. 마치 지구하고도 한국, 그리고 서울의 어느 가정집 식탁 위에 놓인 사과와 과도를 보면서 결국은 사람과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들의 사소한 일상인 사과나 과도를 보면서 다시 테이블, 방, 집, 동네, 서울, 한국, 지구로 역으로 확대한다는 뜻이다. 비극을 희극처럼 아이러니하게 얘기하는 그의 그림은 때로는 은유로, 때로는 상징으로, 때로는 기호물들이 되어 욕망과 권력 그리고 힘의 레토릭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사과나 사람을 싱싱함이나 부패로, 선과 악으로, 그리고 욕망이나 이성으로 환치한다. 성은 이러한 상태, 다시 말하면 인간의 육체라는 하드웨어를 섹슈얼하게 드러내면서(이러한 점은 이흥덕의 그림이 성을 통해서 우리사회의 현실에 대해 풍자와 비판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그 자신의 끊임없이 그 감각적인 조형적 쾌감에 탐닉하는 양면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육체로부터 확대되는 욕망과 권력을 이야기하는 매개체로 제시된다. 욕망은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조건을 끊임없이 확대·재생산 할 수 있는 비판적인 대사이며, 그것이 오늘을 사는 인간들을 정확하게 규명할 수 있는 질료가 되는 것이다. 성과 욕망은 사회화 과정에서 쉽게 폭력적인 힘으로 전이되고 그 힘은 결국 우리들의 일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는 비이성적인 실체로 존재한다. 이를테면 자본에 의해 규정된 성이라든지, 힘의 우위를 점한 남성의 자기 과시욕의 대체물로서의 성에 대한 관점이 우리 사회의 복합적인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 이러한 점을 가장 아이러니하게 반증하는 것이 「수음」이다. 한 남자의 자위하는 뒷모습을 포착한 이 그림은 단순하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에 익숙하게 남아있는 신창원의 티셔츠 무늬를 그려 넣음으로 그 의미를 확대하고 사회화시킨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남자가 티셔츠 하나로 신창원을 연상시킨 것이다. 따라서 그 익명의 사내는 우리도 되고 신창원도 된다. 이것은 일탈한 홍콩영화의 남성주의와 느와르적인 영웅주의에 대한 소시민적인 반응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수음이라는 쾌감에 관한 관객의 대리배설과 그 수음의 주체가 자신의 아니라는 안도감이 교차하는, 즉 폭력적인 자극에의 기대(영웅주의)와 이성적인 안도감이 교차하는 일종의 집단심리가 반증된다. 따라서 수음의 쾌감(일탈한 영웅에 대한 동경심)을 느끼는 것은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한 사회의 아웃사이더로서 그 위험한 과정의 주체가 아닌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다수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 혹은 범죄를 바라보는 자의 관음적 재미가 이율배반적으로 교차하며, 그림이 우리의 감각과 감성에 박힌다. 이흥덕의 궁극적인 어법인 인간에 대한 심리적인 접근은 이처럼 사회화되어서 그의 그림행위를 지속시킨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불쾌하고 우울한 여러 문제들을 다시 거론하여 우리에게 제시하지만, 그 방식은 이런 여러 장치들을 통하여 인간을, 그리고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것들을 다시금 생각게 한다. ● 하나의 회화가 제시할 수 있는 문제제기 방식은 협소하고, 그 전달의 통로는 광활하지 않다. 또한 문화의 흐름과 여러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변화하는 지금의 세상에서 회화는 어떻게 보면 그 소통의 감성적 방식에 의해 더욱 전근대적인 고답성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타 매체가 갖지 못한 섬세한 형식적 변용에 의한 맛과 냄새는 작가의 피부처럼 민감하게 주변과 사람에 대한 의식을 화폭에 접착시킨다. 이흥덕의 전시는 크지도 않고 정교하게 준비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커다란 미학적인 변모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형식에 대한 작은 준비와 회화라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장점에 대한 작가의 섬세한 감각적 배려와 반성과 되새김질은 끈질기게 온몸으로 견인해 가는 자기미술의 실체를 더욱 튼실하게 할 것이다. 이흥덕의 장점은 이 꾸준한 반성과 조금씩의 변모를 지속적으로 이끌어 가는, 그렇지만 상식적이지만은 않은 예민하고 세밀한 그의 작업과정에 있다. ■ 김진하
이흥덕 그림 속의 기호 ● 이흥덕 작품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은 그의 그림 그리는 방식에 대한 이해이다. 그는 매우 전통적인 작화방식을 고집한다. 어떤 재료를 사용하든 상관없이, 어떤 소재를 다루던 그의 제작방식은 전통적인 회화제작 방식에 머문다. 그럼에도 그가 선택한 회화 형식은 늘 대중 기호에 맞추어져 있다.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요소들은 서구 팝 계열 작가들이 거둔 상업적 성공과 미술적 권위에 의에 우리가 반성하지 못한 결과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중의 기호가 전통적 화법으로 둔갑하는 순간 고유의 미술가치로 환원되는 것은 미술제도 안에서 결정된다. 가령 화랑이나 미술관 그리고 수장가들의 취향이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중기호의 미적 가치는 소통의 원활함이나 자극적인 언술 행위처럼 도상의 쉬운 이해, 자극적인 색 대비 효과, 쉬운 기호들의 집합을 통해 적확한 메시지를 공유하는 것이지 환원시켜 가치를 드높이는 데 있지 않다. 그러나 회화는 그런 미묘한 기교를 통해 살아남기를 제도 안에서 획득한 바 있다. 이흥덕의 작품이 가지는 어눌함은 바로 이런 복잡한 가치 증폭의 사이클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시작해, 결과적으로 대중기호의 오해를 통해 보다 간결한 메시지를 공유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그의 작품에서 풀어낸 자유로움은 이제 드디어 작화방식이 곧 미술적 언어로서 완결성을 가지게 된다는 확증적 결과를 보여준다. 따라서 작가는 성공한 시장가치가 아닌 자신이 선택한 미술적 가치와 작가로서 지닌 메시지의 공유를 상당기간 고심하며 맞추어봐야 할 것이다. 그는 사실, 일찍이 팝계열의 작가들이 실패했던 것을 거울삼아 회화형식에 대한 기본적인 배반을 받아들여야 했었다. 지금도 그 문제에서는 작가의 변화에 추이를 따라 지켜볼 뿐이지만 말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기호에 가까운 도상들이 자주 등장한다. 개와 사람의 관계, 달리는 사람의 뒷모습, 작가의 등장, 살짝 보이는 팬티 등은 과연 도해될 수 있는가? 그가 다루는 이 도상들이 해석될 수 없는 것이고, 작가가 임기응변에 따라 조형성 때문에 사용했다면, 맥락 없이 그런 도상들이 화면에 머문다면 우리는 감상에 완벽한 실패를 맛볼 것이다.
이흥덕은 곤궁할 정도의 생활 속 도덕을 중요시 한다. 그에게 있어 어떤 사회적 이슈도 자신이 용납하는 실천 가능한 도덕 안에 머물지 못한다면 공허함의 대상이거나 아예 그림의 소재로 등장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삶의 유형을 지켜내는 사람들이 매일 실천하는 도덕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김으로써 그림의 도상들을 생활에서 발견하곤 한다. 그 해석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활감각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우선 달려드는 개와 사람은 생활에서 불현듯 닥치는 공포에 닿아있다. 마치 누구라도 텅 빈 거리에서 개 한 마리와 맞부딪칠 때의 석연찮은 공포감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소시민적인 성품이기도 하거니와 사람이 크건 작건 공포에 대응하는 가장 진솔한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아직 유려한 이론으로 실체를 밝힌 바 없지만(이런 사소한 인간유형의 현상들은 거대 담론에서 곧 잘 제외되었다. 아니면 거창한 이론을 통해 그 존재의 근거였던 생활이 휘발되었거나.) 자신을 지나쳐 멀어져 가는 사람(달리는 사람으로 극화된 도상)또한 '아련함' 정도의 시적 어구에서 이미지를 만들 뿐 생활 속에서 만나는 '마음'의 해석과는 동떨어졌던 대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흥덕은 소소한 생활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을 이미지화 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런 이미지들은 반복적인 도상으로 그림에서 하나의 맥락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치마 밑의 팬티는 에로티시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일 터이니 더 이상 분별없는 해석은 말아야겠다. ■ 이섭
2010년도에 들어서며 전에 해왔던 「지하철 시리즈」를 다시 그린다. 지하철이라는 주제와 공간이 한정되질 않느냐는 의문도 있겠지만 아무튼 나는 지하철이라는 화두를 다시 들어 보기로 한다. 일단 그곳은 사람이 많다. 온갖 형상과 색상과 냄새와 성격은 나에게 구미가 당기는 소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몸을 부대끼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우리시대의 자화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지하철에서 한바탕 굿마당을 벌이려고 한다. 서로 물고 물리고, 때리고, 맞고, 쫒고, 도망가는 그리고 허둥대는 우리의 일상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최근작 「지하철 지옥도」는 현세와 내세까지 아우르는 작품이다. 나는 그렇게 지하철에서 사후의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렸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른 타인들이 아닌 나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도시는 온갖 욕망과 버림이 동시에 있는 집합체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욕망과 꿈이 공존하는 도시, 그리고 땅속 지하철에서 벌어지는 풍경, 지하에서 벌어지는 우리 시대의 욕망과 꿈을 나는 이리저리 몰고 다니면서 그것들을 화폭에서 재구성하여 그리는 한 사람 일 뿐이다. 「지하철 지옥도」, 「타이거마스크」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 우리 시대의 상처와 공감을 느껴준다면 만족한다. ■ 이흥덕
Vol.20110313d | 이흥덕展 / LEEHEUNGDUK / 李興德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