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sible

조해영展 / CHOHAEYOUNG / 趙海瑛 / painting   2011_0308 ▶ 2011_0403 / 월요일 휴관

조해영展_아트라운지 디방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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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308_화요일_06:00pm

아트라운지 디방 2011 출사표 선정展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라운지 디방 ART+LOUNGE DIBANG 서울 종로구 평창동 435번지 Tel. +82.2.379.3085~6 www.dibang.org

Divisible-가능태로서의 회화 ● 조해영의 회화는 스쳐지나가는 장면들을 묘사한다. 그것도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나 빠르게 움직이는 스포츠 선수의 시점에서 순간적으로 포착된 멀리 떨어진 곳의 무의미한 공간을 주로 선택하여 묘사한다. 공간은 대체로 텅 비어 있거나 알 수 없는 건물 등의 윤곽에 의해 흐릿하게 채워져 있을 뿐이다. 잠시 고개를 돌리면서 주시했거나 곁눈으로 보았던 것처럼 시점의 이동은 조금 수평으로 번져 있다. 세부들은 단순화되어 있고, 모호한 기억을 더듬으며 떠올린 것처럼 형태 역시 최소한의 요소들만을 남긴 채 추상화되어 있다. 예컨대 2009년 작 「House」는 유럽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가면서 바라 본 순간적으로 나무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어느 집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잿빛 하늘과 푸른 나무들의 그림자들 사이에 깊은 심도를 지닌 망원렌즈로 포착한 것처럼 납작하게 그려진 미상(未詳)의 집은 극도로 짧은 순간에 바라본 대상이 그러하듯 어떤 기억의 단서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주변에 비해 약간 밝은 면(面)으로만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흥미로운 것은, 멀리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보았을 이 집을 작가가 흐릿하거나 뭉개진 형태가 아닌 매우 뚜렷하고 날카로운 윤곽으로 그려놓았다는 점이다. 아주 작게 멀리 보였을 집은 가까이 당겨져 화면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게다가 캔버스의 크기가 112×162cm여서 더욱 강한 확대의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 속의 집은 아무 것도 말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덧없어 보이는 이 그림의 풍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왜 작가는 그림 안에서 이 불특정한 집의 존재를 뚜렷하게 강조하고 있는가?

조해영_Green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10

회화는 두 가지 잠재성(the possibility)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그것이 차지하는 공간 안에 또 다른 잠재적 공간으로의 통로(passage)를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매번 새로운 공간의 단면을 생성하는 것이다. 회화가 다른 시각적 파생물(a visual)들과 다른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이러한 잠재성을 전제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시각적 파생물은 잠재성이 아닌 결과 혹은 효과로서 제시된다. 그것은 만족감, 정보, 교환, 표시 등의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된다. 그것은 최선의 경우에도 예시(e×emplification)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반면 회화는 시각적 생산자(a producible)이자 가시태(a visible)로서 작동한다. 회화는 독립된 단위이자 각각 최초의 계기(instance)로서 세계 안에 나타난다. 그것이 생산하는 것은 회화를 바라보는 감상자 각각의 시간 속에서 생성시키는 회화 고유의 추상적 경험이다. 회화는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최소한의 요소들을 가지고 최대한의 잠재태(possible)들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불가분(不可分) 단위(in-dividual)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수없이 많은 시간적 단위들로 분기(分岐, ramificate)한다는 점에서 가분(可分) 단위(dividual)이기도 하다. 예컨대, 「House」는 세 가지 요소 즉, 잿빛 하늘과 흐릿하게 수평으로 번져있는 전경의 나무들, 그리고 약간의 두께를 지닌 밝은 회색의 기하학적 윤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작가가 빠르게 스쳐지나면서 본 풍경의 기본적인 구성이다. 이 최소한의 구성은 더 이상 나뉘지 않는다. 반대로 다양한 기억들이 이 구성으로부터 분절되거나 투영될 수 있다. 이 그림은 빠르게 지나치면서 바라본 많은 풍경에 대한 기억들의 원형(primary landscape)처럼 보인다. 이 그림은 사실적인 재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시각적 경험들을 수렴하는 추상적 장치이다.

조해영_House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것은 바로 이 추상적 장치가 지닌 극적 요소들이다. 그것은 바로 화면의 색채와 캔버스의 크기다. 이 그림은 단순한 개념적 장치이기에는 색채의 심리적 범위나 화면의 크기에 의한 몰입의 효과가 신중하게 고려되어 있다. 즉 감상자의 위치와 시점, 그리고 몰입의 과정에서 조정되어야 할 감정의 수준 같은 것이 특정되어 있다. 2009년 작 「Pool」은 수영장의 바닥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는 물의 움직임이나 그로 인한 번짐 혹은 투영 같은 것이 없다. 물이 없는 상태이거나 절대적인 고요함 속에서 본 것 같은 모습이다. 작가는 이 그림의 전시를 위해 전시장의 바닥에 동일한 수영장의 패턴을 설치해 놓았다. 관객들이 이 그림을 보면서 스스로 수영장의 내부 혹은 물 속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도록 기대하는 것이다. 극적 몰입의 중요성은 관객 즉, 수용자의 경험이 이 작품의 궁극적인 지향임을 알려준다. 회화는 가장 단순한 극적 구조, 혹은 추상적 틀을 제시함으로써 감상자들 속에서 매번 새롭게 나뉜다. 이 회화적 과정을 '분리 가능한 가시태' 혹은 '디비저블'(the divisible, dividable과 visible의 조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디비저블'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회화가 생산하는 고유의 추상적 경험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감상자의 내부에서 생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이거나 일관된 것으로 확인되지 않는 경험이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작가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그것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현실 속의 대상들은 시간과 공간의 변화, 그리고 빛의 운동과 바라보는 이의 시점, 심리상태 등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회화는 변화하는 대신 변화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시공간의 대척점에 있다. 회화는 변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한다.

조해영_Nuclear Power Plant 2_캔버스에 유채_97×130.3cm_2010 조해영_Nuclear Power Plant 3_캔버스에 유채_97×130.3cm_2010

2009년에서 2010년 사이에 그려진 「Green」 연작은 골프장처럼 보이는 잘 다듬어진 잔디를 그린 것이다. 같은 시기에 그려진 「Garden」 연작과 마찬가지로 이 연작에는 녹색의 잔디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에서는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이 간혹 묘사되어 있고, 후자에서는 시선이 훨씬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어 잔디의 주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닥만 보이도록 그리는 것은 「Stadium」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구도에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화면에서 정보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 그림들에는 공통적으로 바닥의 무늬가 중요한 모티브로 다루어져 있다.「Green」의 부드러운 굴곡을 따라 잔디를 깎은 결이 만들어낸 줄무늬와 「Garden」의 테니스 코트 라인처럼 보이는 선들은 풍경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들이다. 테니스 코트나 스타디움과 같은 객석 등에 의해 둘러싸인 공간은 주변을 묘사하지 않기 위해서는 바닥으로 시선을 한정시켜야 한다. 골프장에서는 주변에 특별한 사물이 없을 경우 하늘과 맞닿은 선만을 묘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화가의 시선이 포착하는 풍경의 핵심은 그것이 무의미해 보인다는 점이다. '디비저블'은 대상의 불특정성(non-specific), 명명할 수 없음(un-namable), 부재(absence), 파악 불가능함(un-identifiable) 등의 특성을 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 자체로서 분명한 개별성(individuality), 특이성(singularity)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역설적인 대상을 바르트(R. Barthes)는 '어찌할 수 없는 것'(l'intraitable)이라고 부른 바 있다. 대상은 그것의 존재를 열린 구문(synta×)에 의해서만 드러낸다. 그것은 끊임없이 문장을 바꿀 뿐 아니라 스스로를 텅 빈 장소로 드러낸다. 그것의 문장은 시간과 타자에 의해 이어진다.

조해영_Pool_캔버스에 유채_97×130.3 cm_2009

2008년의 「Plants」 연작은 이러한 차연(差延, differand)에 의한 구문의 성립을 보여준 바 있다. 즉, 동일한 대상은 시간의 흐름에 의해, 혹은 반복에 의해 차이를 만들어낸다. 동일성(the sameness)은 스스로를 분절하면서 차이를 만들어낸다. 동일자(the same)란 수많은 타자들(the others)이 공유하는 하나의 추상적 국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핵심적인 국면이다. 이 양가성(兩價性)을 이해한다면 동일한 풍경이 왜 두 개의 서로 다른 장면들로 이루어지는지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들은 마치 우연히 일부분에서 일치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장면을 이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어떤 설명이나 맥락도 없이 이어져 있는 두 개의 이미지를 연결하는 것은 밝은 회색의 낮은 담장이나 녹색 잔디바닥에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의 각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장면들은 하나의 그림으로 연결되어 서로 다른 시간대의 동일한 풍경을 두 번 그린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과거의 서로 다른 시대에 이 장소들은 같은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이 두 공간을 이어주고 있는 것은 바로 제목이다. '식물들'이라는 의미의 제목이 가리키듯 이 풍경 속에는 잔디와 나무들이 있다. 이것들은 모든 풍경들 속에 존재하면서 녹색의 얼룩이나 면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이것들은 언제 어디에서 또 다른 양상으로 공간의 얼룩이나 면을 만들어낼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사실상 풍경을 나누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식물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면서 분절하는 존재로서의 식물들과 감상자의 시선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면서 분절하는 회화 사이에는 일종의 유대가 존재한다. 조해영의 그림들 속에서 녹색은 불분명한 터치로 그려진다. 수평의 붓질에 의해 번져있는 녹색의 얼룩은 골프장의 '그린'이나 도시의 나무들에서도 날카로운 선이나 건물의 윤곽과 대비를 이룬다. '식물들'은 추상성의 영역에 속한다. 반대로 2010년에 제작된 「Nuclear Power Plant」 연작에서는 이러한 흐릿한 추상성이 사라진다. 이 그림은 영광 원자력발전소 홍보관의 조감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이 그림들에서 녹색은 화면의 일부를 차지할 뿐 푸르고 회색인 구조들과 잔디를 가로지르는 통로들의 차가운 외각선이 화면을 지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그림들은 이전의 전시에서 실제 전시장의 바닥에 깔린 녹색 카페트와 함께 보여진 적이 있다. 관객은 녹색의 잔디 위에서 '이상적인 발전소'라고 소개되어 있는 이 구조물들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연출의 의도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분명하다. 그러나 녹색의 잔디가 지니는 의미를 이해하기 전에는 '이곳'과 '먼 저곳'의 차이 속으로 몰입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조해영_Stadium 8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0
조해영_Plants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08

조해영의 작품 하나하나를 감상하는 것은 흡사 미니멀하고 세련된 시각적 구성물을 무심하게 즐기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것은 편안하고 잘 알려진 추상적 감상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유심히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의 작품들은 좀 더 예외적인 추상성의 경험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그의 그림들에서 어디까지가 가시성의 범위인지, 감상자인 나의 내면에서 무엇이 생산될 것인지, 그리고 그림과 나의 위치가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지 등과 같은 예기치 못한 질문들이 이 단순한 구성의 화면들로부터 제기된다. 회화는 그것이 생산하는 방식으로 인해 사유의 일부가 된다. 조해영의 회화들 안에서 우리는 그것을 경험한다. ■ 유진상

Vol.20110308b | 조해영展 / CHOHAEYOUNG / 趙海瑛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