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나연_김홍석_박상아_손수민_손피오_염지희_이미희 이행선_임상범_임지민_지현아_치키홍_한승구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본관 1,2,3층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김홍석 ● 나는 현대사회 속에서 혼란을 느낀다. 변화의 속도는 빨라지고 파악해야 할 기호와 정보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로 인해 넘치는 기호와 정보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워지면서 그것들의 겉모습만 보게 되고, 급기야 겉모습 마저 왜곡되거나 부서져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의미들이 탈락된 겉모습들의 파편 조각들은 의미가 생성되기 이전의 무의식적 상황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의미 이전 혹은 의미가 사라진 껍데기들의 파편 조각들을 이성적 방법보다는 직관과 감각으로 파악하려 한다. 한편 나는 이 혼란이 나를 둘러싼 세계의 혼란인지 그 것을 바라보는 내 의식의 혼란인지도 혼란스럽다. 어쨌든 이런 혼란의 주체이자 객체는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사람을 소재로 이야기를 해나가려 한다.. 김나연 ● 미디어들을 통해서 원본이 변형된 이미지들로 현실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구축하고, 다시 복제와 왜곡으로 이미지, 정보를 배출하는 주관적인 인식 세계의 한 단면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복제 이미지, 정보 과잉 시대 안에서 느끼는 이미지들의 혼동성과 정신분열적인 혼란을 표현하고 복제 이미지, 정보와 현실간의 괴리감, 그리고 현실에 대해 느끼는 비현실성을 중첩되고 무질서하며 지나치게 다양한 드로잉들의 겹침과 배열, 그리고 얼룩과 드로잉의 강하면서도 선명한 색상으로 마치 하나의 영상, 나아가서는 정보,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서 스스로가 경험하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혼란성에 대한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박상아 ● 황홀경에 들게 하는 감각을 느끼는 신체 부위에서 나오는 기(氣)를 간단한 기호로 도식화 하는 것이 나의 의도이다. 눈으로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전달 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몸의 언어이다. 형이상학적 이야기가 아닌 몸에서 반응하는 자극과 반응에 관한 표현인 것이다. 나는 인간을 포함한 유기물의 형상은 에너지의 결합이 응축되어 있는 형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손끝을 움직여 느끼는 것을 미미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생명의 움직임에 의미를 크게 부여한다면 인간 몸체가 지니는 커다란 에너지에 대해서 인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의 결정체라 볼 수 있는 인체를 포함한 유기물은 자신의 몸 자체를 통해 감각을 느끼게 된다. 몸의 형상과 존재 자체는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감각 중의 하나인 미적 감각을 통하여 존재의 본질과 형상에 관한 표현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와 관객이 되는 인간 본질에 관한 생각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이해나 계산에 의한 사유 활동 보다는 감각에 근거한 작업을 하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손수민 ● 나는 복제되고 복제되어 다 닳아버린 표정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면서 꽃의 이미지를 생경하게 만들어버린다. 아인슈타인이나 마릴린먼로처럼 진부한 도상과 꽃의 화려함이 대비될 때, 감상자는 어리둥절해진다. 나의 그림에서 무엇을 봐야 할 것인가?꽃이 예쁘다고만 감탄할 일은 아니다. 인간의 존재 역시 한 송이 꽃처럼 언젠가는 사라지게 마련이고, 우리는 그저 일회적인, 순간적인 화려함을 즐길 뿐이다. 내가 의도하는 것은 바로 그 일회적 존재와 일회적인 아름다움이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지속적인 가치를 지니고 영원한 의미로 남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십자가로 상징되는 종교의 의미, 존 레논으로 상징되는 사회의식, 마릴린먼로로 대변되는 대중문화, 아인슈타인으로 대변되는 학문적 이상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오직 그 때 그 때 하나의 이벤트였고 기호로만 기억될 뿐이다.
손피오 ● 내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연출된 순간이 아닌 인간이 자아내는 자연스러운 순간들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라는 단어의 일반적인 선입견인 사회에 대한 고발, 무거움 등을 내 사진에서는 찾기 힘들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관찰'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종교, 사회적 지위, 경제 논리, 이념에서 벗어나 오로지 인류 그 자체의 다양한 모습들을 사진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사진 작업의 방식에 관해서는 크게 이국에서의 여정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감성과 낯선 이의 예리한 시선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것이다. 처음 만난 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어 그들의 경계심을 풀고, 그들 내면에 담긴 인류 공통의 감성을 표출해내는 것이 내 사진 작업의 핵심인 것이다. 이국적인 요소들이 관객의 눈을 먼저 끌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감성들은 모두 우리의 삶과 주변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즉, 나의 사진 작업은 세상을 통해 나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는 거울인 셈이다. 염지희 ● 작업을 통한 나의 자아 보기의 시도는 항상 실패한다. 그 이유의 첫 번째는 보기(see) 때문이고, 두 번째는 타자를 통해 나를 보기(gaze) 때문이다. 보이는 것에는 위장되거나 감춰져 있는 비밀과 거짓말이 존재하며, 타자를 정확하게 보는 것은 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 안에 파악되지 않는 공백은 존재한다.그러한 실패의 과정 속에서 나는 분열과 안정을 겪는다. 피할 수 없는 분열 안에서 혼란을 겪으며 통합을 이룰 안정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보았다'고 생각한 것마저도 실패한 것이며 그것은 결코 '내'가 아니기에 분열은 계속된다. 자아를 보기 위해 계속되는 분열은 자기 파괴적이다. 그것은 삶의 욕구를 위한 파토스적인 욕망의 속성과 닮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오히려 분열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 오이디푸스의 자발적인 실명처럼 나는 보는 눈을 잃고 스스로를 보는 눈을 찾고자 한다. 자아를 보려는 불가능한 욕망을 꿈꾸며 공백에 거주하는 눈먼 눈. 볼 수 없는 자아를 보기 위한 끊임없는 판타지를 꿈꾼다. 비록 그 행위가 텅 빈 제스쳐 일지라도.
이미희 ● 우리는 자국의 문화에 기반을 두어 동양적이고 훌륭한 예술작품을 탄생 시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문화적 감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조상들의 가치 있는 작품들이라 해서 지금까지 같은 작품들을 반복해서 보고 있는가? 고전은 또 다른 버전으로 재창조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것을 추구 하지 않으면 한자리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나는 평면 작업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의 소통, 그리고 더 나아가 미래와의 소통을 나타내고 있다. 마치 고미술과 같은 배경의 종이와 도자기, 보자기 등과 같은 고전적인 형태의 틀 안에 작가자신만의 현대적인 드로잉이 만나 또 다른 퓨전(fusion)형식을 띈 작품을 탄생시킨다. 한국적인 소재인 고전적인 형태의 틀에다 화려함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덧입혔다. 하나의 발상의 전환인 것이다. '한국적'이라는 단어 뒤에는 항상 단아함, 소박함, 정갈함 등 이와 같은 수식어들이 함께 따라온다. 과연'한국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가 과연 맞는 것일까? 역사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의 정리된 의미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행선 ● 어느 날 옷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옷은 나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 옷 안에 거주하는 나, 또는 거주 했었던 '나'가 발견되었고, 나의 신체성을 드러내는 대상으로서의 사유가 진행되었다. 옷에서부터 시작된 신체, 즉, 몸에 대한 관심은 그 근본주체인 '나'로 복귀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시된 것은 하나의 초상화 또는 나의 익명적 실존에 대한 탐구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신체는 내 존재를 실어 나르는 유기체이며 나의 신체 각 부위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듯이 타인의 신체와 나의 신체는 하나의 전체이고 현재의 안과 밖이며 나의 익명적인 실존은 두 신체에 거주한다. 그 익명적인 실존의 거주가 이루어지는 곳을 옷의 상징성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옷이라는 신체 위에 착용되는 사물은 신체 위에 덧입혀 짐으로써, 또 같은 문화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입는 비슷한 옷은 이렇듯 익명적인 실존을 체험하게 한다. '옷을 입음'은 인간의 조건을 입고 살아가는 나와 너 사이에 공감대를 발생시키고 그 옷의 이동 가능성은 나의 익명적 실존을 운반한다. 다시 말해 그 익명적 실존의 근거는 결국 신체성이며 그 살에 가장 가까운 옷들은 그 자체로 애매하게 내 몸을 인식하게 하며 그것은 주체로서의 인간과 그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임상범 ● 기억...내 안에 존재하는 천사의 도시의 첫 느낌을 회상한다. 관광객으로 헐리우드 블러바드에 서있던 나, 흐릿한 날씨로 자욱했던 헐리우드 언덕에 놓여있던 헐리우드 싸인. 그것만이 내가 길을 잃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가짜 슈퍼맨과 가짜 제다이는 웃으며 내게 다가왔고 돈을 구걸했다. 그들의 웃음은 나에게 버려져 허공을 날고 있는 텅빈 플라스틱 봉지를 생각나게 했다. 그리고 동시에 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보고자 했던 헐리우드는 무엇일까? 과연 그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그날 새벽 6번의 총소리를 나의 새벽 단잠을 깨웠다. 환영... 우리의 공간에는 빛과 함께 어두움이 항상 공존한다. 하지만 어두움에 거하는 존재들 즉 Shadow와 Reflection과 같은 환영들은 언제나 소외되어진다. 플라톤의 동굴우화에서 처럼 우리는 우리의 그림자 즉 우리의 환영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보는 존재이다. 환영들이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 천사의 도시에 존재하는 환영들을 찾고자 했다. 로스앤젤레스는 천사의 도시이며 동시에 환영의 도시이다. 임지민 ● 어떤 이 또는 무엇과 함께했던 시간은 일상이었다. 현재 내 주위에 일상이었던 그 무엇과 누군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추억을 떠올릴 때 사진은 좋은 수단이다. 사진 한 컷은 흩어졌던 조각기억들을 한군데로 모아 한 장에 담아준다. 나는 단절된 옛 일상을 추억하기 위해 사진을 꺼낸다. 우리는 이 사진을 일종의 '두려움'을 가지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진 속 일상과 단절된 현재, 그 사진은 더 이상 가볍게 넘기던 사진이 아니다. 단절된 그 무엇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네모난 종이의 모든 것, 작고 사소한 부분에 까지 신경 쓰게 된다. 하지만 그때의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 게다가 그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도 부재다. 남은 것은 사진뿐이다. 남겨진 사진은 변하지 않는다. 과거의 증거물이 되었다. 이것은 잘못된 증거물이 되어서 기억에도 영향을 준다. 그것에 의해 기억은 변하고 짜 맞춰진다.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물 (False Evidence Appearing Real)–F.E.A.R. 그것은 사진이다.
지현아 ● 인간을 불완전하며 악한 존재이다. 자기 방어와 보호를 위하여 타인이나 외부의 상황을 비난, 비판하여 자신을 정당화 시키려는 행위를 반복한다. "A gentle and reasonable being can be transformed into a maniac or a savage beast. One is always inclined to lay the blame on external circumstances, but nothing could explode in us if it had not been there. (Carl Jung) 균형과 조화, 평등을 위한 삼각구조 안에서는 여러 가지의 복합 결과물들이 나올 수 있다. 도덕적 이상향을 비판하는 자세로 터부적 성향을 정당화 시킨다거나, 인간의 악함을 정당화 시킴으로써 터부가 금기가 아닌 당연한 인간의 경향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 사회에 물들어진 인간, 우리는 한가지 답만 믿어서도, 알아서도 안 된다. 그 어디에도 하나의 답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더 더욱 이 사회를 조합, 조화, 균형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습득하여야 한다. (유토피아 건설의 실천) 각각의 작품 위에 그려지고, 수 놓아진 삼각기호, 전시장 전체를 삼각형의 형태로 만들어 놓은 듯 하다. 곳곳에 보이는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물과 조각들, 보는 이들은 분명 이 전시를 보며 이 삼각기호에 대하여 궁금해 할 것이다. 균형과 조화, 평등을 위한 삼각구조"라 불리 우는 이 삼각기호는 우선적으로는 작가 자신의 방어와 보호를 위한 목적으로 개발된 하나의 삶의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 들을 위한 이 시대 사회적응 습득의 방법이기도 하다. 치키홍 ● 어렸을 적부터 사람들과의 소통에 필요한 어떤 무언가가 내 안에 결핍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단절된 소통 사이에서 내 안의 이야기는 안에서만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그 진동의 위태로움 끝에서 두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세상을 조롱하듯 분노하던 자아는 '치키 호돌이(Cheeky Hodori)'가 되어 세상에 강력한 펀치 한방을 날렸고, 현실에서 죽어가던 아이는 '치유치유(Cheeyou Cheeyou)'가 되었다. 나를 감싸고 있던 터질 듯 한 분노와 죽음으로 인도하던 망막의 지루함, 온몸을 훑고 다니던 공포에 저며진, 칼날 같은 차디찬 상처를 토해내어 샅샅이 쪼개고 부수어 그 감정들의 본질적 원소를 통해 처음 말문을 열게 되었다. 대중들과의 소통이라는 부분에서 디지털은 어떤 매체보다 나의 결핍된 부분을 채우며 근접하게 다가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 시대에 사람들의 삶 또한 디지털화 되었다. 그들은 갤러리에 걸린 그림보다 아이폰과 같은 스마트폰에서 보이는 이미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과연 이런 현상이 일시적인 것일까?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시대는 어떤 형식의 매체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한승구 ● 사회 속에서 얼굴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 유기적인 구조 내에서 사람마다 다른 얼굴은 개인의 특징을 드러내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얼굴은 각 개인의 어떤 구조에 속해 있는지,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시각적 정보를 제공한다. 이렇게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노출은 각각의 개인에게 하나의 불안 요소를 자극 시킨다. "타인에 대한 욕망"이 그 불안요소이다. 이는 얼굴의 노출로 인해 본인의 모습을 타인들이 항시 지켜볼 수 있다는 불안감이며, 이 의미는 개인의 현실에서의 역할도 함께 노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회 속 유기적인 역할의 노출로 인해 사회에서 주어진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 각 개인은 늘 자신의 임무에 충실해야 하고 다른 사회 구성원에게 내면의 모습을 함부로 드러내놓을 수 없다. 즉 사회 속에서 각자 고유의 얼굴을 지닌 객체는 스스로 통제되어지고, 폭력적으로 사회란 시스템에 적응하도록 만들어 졌다. 각각의 개인은 사라지고 모든 객체가 유기적으로 하나의 구조체계를 위해 움직이면서, 감시 통제되어지고 사회화된다. 즉 얼굴은 사회 구조에서 이탈해 나갈 것 같은 각 개인을 정착하여 못 움직이게 만드는 하나의 감옥이다.■
Vol.20110308a | Contest 2011-KWANHOON projects_Young Artists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