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1_0222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월요일 휴관
갤러리 케이아크 GALLERY K. ARK 서울 강서구 화곡본동 24-281번지 B1 Tel. +82.2.2605.2650 cafe.daum.net/FrauHorti twitter.com/gallery_k_ark
아내가 전시기획 업무로 바쁘던 즈음의 언젠가 이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왔던 적이 있다. 작품에 대한 감상이란 것은 인간일상의 여러 경우와 다를 바 없이 일일이 대응되는 정답이 없는 게 당연하나, 작품을 처음 대면했을 때 받는 그 찰나의 인상으로 인해 선택의 여지가 단지 3개 정도인 객관식 설문처럼 호불호가 극명해지기도 한다. 조문기 작가의 작품들은 이미 익숙하다. 작품을 웹 이미지로 처음 접했던 무렵부터 다양한 경로를 통해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작가를 아직 만나보지는 못했다. 아내와 상의 끝에 배윤환 작가와 2인전을 기획하면서, 만나보지 못했으므로 자연스럽게 물어보았다. 주름이 그리 많지도 않을 나의 뇌 속 어딘가에 그의 작품은 자리 잡고 있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사뭇 궁금했었다. 말 수가 많지 않고 조용한 성품의 사람이지만 미술 외의 다른 영역의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고 한다. 배윤환 작가와는 상당한 시간 동안 길지 않은 대화를 했던 기억이 있다. "훌륭한 저자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고 했던 발터 벤야민이 떠오르는 대화였다. 한 인간의 품성을 선분 위에 올려놓고 위치를 굳이 짚어내라 했을 때,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나는 자폐(自閉)보다는 자개(自開)쪽에 가까우므로, 나의 경우와 달리 외부로 드러나는 것이 적은 타입의 사람과 마주하게 되면 그 의중을 조심스레 추정해보게 된다.
조문기 작가의 작품을 통해서 공교롭게도 비슷한 맥락의 감상을 얻는다. 그의 회화 작품 속에는 짙은 콧수염이나 선이 굵은 얼굴형과 같이 외면적으로 남성성을 강화시키는 상징적 요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인물들이 자리 잡고 있는 배경 또한 남성 전유의 공간들로 여겨지는 장소를 선택하여 주제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효과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좀 더 살펴보면 강인해 보이는 얼굴, 머리에 비하여 팔다리는 가늘어 보이고 몸은 다소 왜소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셔츠는 끝 단추까지 타이트하게 조여져 있고 바지의 선은 날카롭다. 전반적으로, 시대적 흐름에 따른 새로운 성 역할의 패러다임에 의한 남성성의 축소와 왜곡을 표현하고 있다는 기존의 감상에 동감하면서도 개인적 관점으론 좀 더 나아가 이른바 성 정체성의 모호에까지 다다른다. 물론 날 선 바지와 타이트한 셔츠, 그리고 자로 잰듯한 바지 길이만 가지고 속단하는 것은 섣부르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마초같은 이미지의 얼굴윤곽이나 콧수염보다 슬림한 몸과 옷매무새가 더 인상적이며 따라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드라마틱한 반전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축소되고 약화되어 어느덧 수줍기 조차한 한 남성의 실제 모습을, 타인의 외모를 인식하는데 가장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얼굴에 극단적으로 강한 남성성을 부각시킴으로써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회화예술은 두뇌적이지는 않으며, 가끔 손이 저절로 움직여 지성이 깨닫기 전에 어떤 리듬을 화폭에 옮겨놓는 수가 있다"라는 케네드 클라크의 서술에서 조문기 작가는 아마도 자유롭다. 그의 화면구성은 치밀하고, 작품 속에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사물들은 각각의 의미를 담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2006년 작인 「분홍상자의 귀환」에 등장하는 분홍상자 역시 그러하다. 정박해 있는 배 앞으로 여러 번 전술한 남성성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항해선원이 콧수염과 가슴 털로 무장하고 걸어 나오고 있는 와중에, 뒤에선 두 사람이 선명한 분홍빛 상자를 하역하고 있다. 선원과 핑크빛 상자라니, 이율배반적 조합으로 더할 나위가 없다.
작년에 배윤환 작가의 작업실을 작가와 함께 오랜 시간을 들여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다수의 작품들을 보면서 이 작가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영역의 경계선이 어디인가 궁금해졌다. 배윤환 작가는 다각적이고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었는데, 동시에 그는 표현의 방법과 형식을 불문하고 고정된 영역 안에서 안주하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고 있었다. 그것이 외부적인 제약과 구속에서 비롯된 것이든 혹은 작가 자신의 내면에서 배어 나온 것이든 작가는 기존의 관습적, 경향 지향적 작업을 부정하며 부단한 실험을 통해 자신의 작업에 대한 근원적인 질의를 계속하고 있다. 그가 구축해 나가고 있는, 혹은 파괴하고 해체해 나가고 있는 영역들은 마치 팽창우주와 같아서 사실 경계선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매체에 관해서도 전혀 예외적 느슨함 같은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미술매체에 관한 난이도란 것이 인위적으로 특정될 수는 없는 것이겠으나 그가 선뜻 택했던 에나멜은 작가의 고통스러운 인내를 담보로 해야 하는 물성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배윤환 작가는 탈피하고, 버리고, 또 다른 것을 향해 방향을 고쳐 잡으면서 유목적 탈주를 일삼으며 작업공간에 새로운 자신을 세우고 있다. 부분적으로 향상된 자신일 수도, 일시적으로 퇴보한 자신일 수도 있으나 판단의 절대적 기준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재단하고 정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전체적인 방향성만을 주목한다면 단지 작가로서의 자신을 완성해나가는 시퀀스의 하나일 뿐이다. 배윤환 작가는 지속적인 철학적 사유의 자기정화를 통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잠재력의 부양을 기약하고 있다. ■ 이규원
Vol.20110220a | The Big Thaw - 배윤환_조문기展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