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The Wall

이만나展 / LEEMANNA / 李만나 / painting   2011_0209 ▶ 2011_0215

이만나_벽 앞_캔버스에 유채_170×227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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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20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고도 GALLERY GODO 서울 종로구 수송동 12번지 Tel. +82.2.720.2223 www.gallerygodo.com

Scene 1 ● 백사장을 한바탕 헤집고 다니던 두 소년은 어느덧 나란히 서서 먼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다. 맑은 날엔 대마도가 보인다는 얼핏 들은 얘기를 상기하며 나는 저 멀리 가물거리는 수평선을 유심히 살핀다. ● 혹시나 보인다면 어떤 모습일까? 영화에서 흔히 보던 섬 모양일까? 어쩌면 흐릿하게 수평선에 납작 붙어있어서 잘 안 보이는 건지도 몰라. 어느 날 장막이 걷히듯 저 너머가 선명해지면서 도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지면 어떨까... . 이런 상념에 빠져있는데, 옆에 그 아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 "우와! 저기 봐라! 니도 저거 보이나? 저기 용이 꿈틀 꿈틀하면서 날아가는 거 보이재?" ● 친구가 이번엔 수평선과 하늘의 경계를 이글거리며 피어 오르는 아지랑이에서 용을 발견했나 보다. ● 같이 감탄하며 새삼 친구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지만, 늦은 봄날의 아지랑이로 마음이 아득해질 뿐이다. 친구의 그런 아이 같은 상상력이 내심 부러웠다. 타지출신인 나에게는 백사장에서 연속 덤블링 하는 것도, 자연과 하나가 된 듯 이끼 낀 갯바위 사이를 날렵하게 건너 다니는 것도, 아직은 찬 바닷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어 헤엄치는 것도 부럽고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이만나_숲_캔버스에 유채_89×130cm_2010
이만나_정원_캔버스에 유채_각 60×50cm_2009

Scene 2 ● 철망 울타리 사이로 삐져나와 탐스럽게 익은 딸기들을 따먹다가, 그것도 모자라 철망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닿는 데로 따서는 한 움큼씩 손에 쥐고 걸음을 재촉한다. 약간의 죄책감 같은 것도 있었지만, 갓 따낸 딸기의 향긋한 유혹을 이기지는 못한다. ● 그 길가 밭고랑 저 너머에는 주변과는 어울리지 않게 네모 반듯한 5층 정도 되는 회색건물이 있다. 창문도 별로 없는 그 건물 옥상에는 무수히 많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은색 기구들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무슨 확성기 같기도 하고, 수면 위로 올라온 잠망경 같기도 한 그것들은 하나뿐인 눈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정찰임무를 수행 중이다. 그 비밀 연구소 안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비밀스러운 일들에 관해 친구와 얘기하며 걷는데, 옥상 위의 기구 중 하나가 우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움찔했지만 아닌 채 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그 눈이 우리를 계속 따라오는가 싶더니, 주변의 다른 기구들도 일제히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게 아닌가! ● "엎드려!" 친구의 외마디 소리와 동시에 우린 밭두렁에 몸을 철퍼덕 내던졌고,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그 기구들이 당황한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면서 우리를 찾고 있는 듯 했다. 그들이 포기한 듯 다시 유유히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할 때까지 우린 진흙범벅이 된 채 가슴 졸이며 엎드려있어야만 했다.

이만나_깊이 있는 풍경_캔버스에 유채_80×354cm_2007
이만나_벽_캔버스에 유채_112×145cm_2010

Scene 3 ● 고참은 이미 초소 한 켠에 앉아 졸고 있다. ● 이곳의 시간은 참 더디게도 간다. 특히 한 겨울의 야간경계근무는 한 시간이 1년 같다. 특별히 지킬 것도 없어 보이는 이곳에서 제일 시간이 잘 가게 하는 방법은 밖에서의 추억을 회상하거나, 휴가 나가면 일어날 즐거운 일들을 상상하는 것이다. 제대까지는 아직 까마득하고, 이제는 제대한 이후 다시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지 두렵기까지 하다. ● 밀려오는 졸음과 추위를 떨쳐내려 초소주변을 종종걸음으로 서성이다 불 꺼진 막사 쪽을 내려다본다. 차고 앞 공터쯤이었을 그곳에 마침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부릅떠보지만 뭔지 통 알 수 없는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 시커먼 물체는 계속 같은 자리에서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야간경계수칙을 떠올리며 주변으로 시야를 넓혀 훑어보지만, 그럴수록 그 움직임은 더 또렷해져 갔다. 그건 테트리스에서 매 단계마다 나와서 춤을 추는 병정의 실루엣을 꼭 닮았다. 뭔가에 홀린 듯 시선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니, 그 놈은 총을 어깨에 매고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폴짝폴짝 부드러움 몸놀림으로 제비 넘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첨엔 어이가 없어 피식 웃 음이 났지만, 점점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이젠 테트리스의 음악소리까지 들리는 듯 했다. ● 다음날 낮에 그 공터 앞에 가보니, 그 자리엔 지난 여름 벼락을 맞아 베어버린 아름드리나무의 밑동 만이 덩그러니 서있었다.

이만나_벽_캔버스에 유채_112×145cm_2011

Scene 4 ● 벽과 마주한다. ● 나름 그들과 어울리려 애써도 보고 파티도 쫓아다녀봤지만, 슬슬 지쳐간다. 독일어가 능숙해질수록 점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지고, 부딪히는 일도 잦아진다. 넓게 보면 문화적 갭이고, 좁게 보면 성격차이다. 또한 무한정 학생신분으로 느긋하게 누릴 수 만은 없는 나이, 세대차이도 한 몫 했을 게다. ● 이제는 돌아앉아 벽과 마주한다. ● 자라기가 무섭게 잘려나가는 나무울타리. 인간이 원하는 틀에 맞춰져 본성이 억제된 채 살아있는 벽이 되어버린 이 인공자연 앞에서, 나는 인간의 욕망보다 더 섬뜩한 자연의 생명력을 본다. 평평하게 잘려져 나간, ‘깊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자연의 외피는 한편 간질간질하여 벗겨내 버리고 싶은 세계의 껍질 같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론 부질없이 무한한 층위를 가진 세계의 절단면 같기도 하다. 나는 그 이면에 감춰진 감지할 수 없는 세계의 깊이를 떠올리지만, 막상 내 앞에 펼쳐진 그 표면의 조밀하고 불가해한 기호들만을 뚫어져라 들여다볼 뿐이다. 어릴 적 내가 닮고 싶었던 친구는 카프카의 시선으로 현실을 넘나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카뮈처럼 세상 안에서 덧없이 반항한다. ● 여전히 세계는 낯설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있다. 확성기처럼 생긴 커다란 은색 외눈박이는 이제 더 이상 현실의 표면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내가 감지할 수 없는 것,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은 모두 나에게는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비일상의 세계이다. 그것은 일상의 영역을 감싸며 때론 불쑥 일상 속으로 침입하기도 한다. 이 원인 모를 침입은 마치 밤이 스며들어 나무밑동의 주술이 풀리듯, 그저 평범한 현실에 발생한 일종의 '알 수 없는 오류'이다. ● 나는 벽을 바라보며 모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 100년도 더 된 견고하고 밋밋한 건물 외벽에 쌓이고 쌓였을 페인트칠과 묵은 때, 그 위를 휘감으며 뻗어가는 담쟁이의 선묘, 그리고 벽 앞의 나무들. 여기에는 이곳의 기후와 그들의 완고함과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 배어있다. ● 더 긴 호흡으로 벽과 마주하며, 나는 좀더 그들과 호흡을 맞춰가려 노력한다. 쌓고 또 쌓아 올리면서 나는 그 벽을 허물려 한다. 이 견고한 벽이 언젠가는 숨을 쉬며 그 이면의 세계를 열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이 넘어설 수 없는 벽 앞에서 나는 비로서 그들과 화해하려 한다. ■ 이만나

Vol.20110209e | 이만나展 / LEEMANNA / 李만나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