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국의 1950년대와 1세대 모더니스트들

Yoo Youngkuk's 1950s and the first Modernist Generation展   2010_1111 ▶ 2010_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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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1111_목요일_05:00pm

심포지엄_2010_1111_목요일_03:00~05:00pm_가나아트센터 아카데미홀 이인범 (상명대학교 "유영국과 한국전쟁") 박계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한국모더니스트들의 1950년대")

참여작가_유영국_김환기_백영수_이중섭_장욱진

기획_가나아트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센터 GAN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동 97번지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유영국의 1950년대와 1세대 모더니스트들 1 ● '유영국의 1950년대와 1세대 모더니스트들'이라는 타이틀 아래 유영국(1916-2002)의 최근 발굴작품 5점과 함께 화가 김환기(1913-1973), 이규상(1918-1964), 장욱진(1917-1990), 이중섭 (1916-1956), 백영수(1922- ) 등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모더니스트 작가들의 1950년대와 그 이후 절정기 작품들이 출품된다. 이 작가들은 모두 조형이념에 기초한 우리나라 최초의 그룹이라고 일컬어지며, 특히 6・5 한국전쟁 전후 한국 미술의 지향점에 푯대가 되었던 "신사실파" 활동에 참여했던 화가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전시는 예술의 세계 안에서 이들 작가들이 어떤 점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특히 민족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그 어떤 전쟁보다 많은 희생을 치렀던 6・5 한국전쟁이 그들에게 드리운 흔적과 트라우마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것들은 이 화가들의 예술세계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거꾸로 그들은 이를 어떻게 넘어서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지를 살필 기회로 보인다. 그렇다면, '유영국과 1세대 모더니스트들'은 화단사적으로는 어디에 위치할까? 특히, 1950년대에 이들은 어떤 자리에 서 있었을까? '진보와 야만'의 시대, '극단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시대, 변화와 혁신이 그 어떤 가치보다도 미덕이 되었던 지난 세기를 살았던 이 작가들은 분명하게 그들 나름의 고유한 세대적 성격을 보여준다. 이들이 태어난 시기는 조선이 이미 식민지로 전락하여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간 때이다. 1910년대 초중반 출생이 대부분인 이들 가운데 맏이 격인 김환기는 1913년생이다. 유영국, 이중섭은 1916년, 장욱진은 1917년,이규상은 1918년에 태어났다. 백영수만이 조금 뒤처진 1922년생이다. 그들은 예민한 감수성이 발휘되는 성장기와 청년기를 일제 식민이데올로기가 정교한 서사로 작동되던 1920, 30년대 한 가운데에서 보냈다.

유영국_무제_캔버스에 유채_65.2×50.2cm_1953_미발표 유작

이 화가들의 삶과 예술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려면, 그들이 화단에 데뷔하던 시대의 분위기와 지배 담론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이들의 태도에 눈길을 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이후 그들의 예술 세계를 성격 짓는 주요 동인이 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 근대 화단의 전개를 세대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보자. 여기서 '1세대 모더니스트들'이라 호명되는 이 작가들은, 서구 회화로부터 사실성의 충격 속에 유학을 떠나 재현 충동에서 예술의욕을 발휘하던 고휘동, 김관호, 나혜석, 이종우 등 선발 그룹 작가들, 그리고 이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서구양식을 토착화하거나 현실에 입각하여 자기화 하고자 했던 오지호, 김복진, 이인성 등 그 다음 세대 작가군에 뒤이어 이전 세대가 추구하던 모더니티가 안고 있는 한계를 새롭게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들은 식민지시대 미술에서 보면 제3세대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1세대 모더니스트 화가들'로 부를 수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들이 '신흥미술', '모던아트', '신미술'을 지향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으나, 이전 세대들과 달리 식민지시대 일제 지배 담론과 이데올로기의 강고한 그물망을 뚫고 동시대의 국제주의적 모더니티를 통해 새로운 미래와 세계를 열고 있으며, 해방 이후 대한민국 현대미술의 로드맵을 그리고 있는 작가들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들이 미술계에 데뷔하던 시기는 1930년대 중엽이다. 이 시기는 "조선미술전람회"를 둘러싸고 소위 조선 향토색 바람이 불어 일본제국 내에서 지방색으로서 조선적인 것의 가능성과 한계를 모색하던 때이다. 서구로 시야를 넓혀보면, 파리에선 '추상-창조' 그룹이 조직되는가 하면 다시 사실주의 논쟁이 점화되고,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는 "큐비즘과 추상미술전"이 대대적으로 열렸으며, 독일에서는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전"이, 소련에서는 사회주의리얼리즘이 제창되던 때이다. 1929년 대공황으로 지구촌이 격동하는 속에서, 조선의 식민 모국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서구 지향에서 벗어나 신일본주의 혹은 아시아주의로 화단이 물들어가던 시기이다. 이른바 '1세대 모더니스트들'은 이러한 물결을 거슬러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나 이 땅의 "조선미술전람회"를 단호히 관심사에서 배제한 채 추상미술이나 초현실주의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던 아방가르드적인 "자유미술가협회전" 등을 거점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확전해가는 가운데 아시아의 맹주를 꿈꾸며 대동아공영권 건설이라는 기치 아래에서의 일제라는 사회 구성체 안에서 신일본주의나 향토색의 이름으로 나타난 식민주의 담론을 부정하고 폐기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1세대 모더니스트 화가들'의 삶의 태도는 해방 후 정부수립 이후에도 일관되게 지속되고 있다. 이 땅의 대개의 작가들이 민족미술건설을 표방하긴 했으되 좌우익으로 나뉘어 예술을 도구 삼아 정치 투쟁에 몰입해 들어갔을 때도, 이들은 현실 정치권력에 코를 비비는 일을 하지 않고, 예술에 몰입하며 예술의 자율성 혹은 자유의 이념에 대한 열망을 견지하고 있다. 한편, 1948년 창립전을 개최한 "신사실파전"은 그들의 이러한 활동의 단단한 거점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난 날 여기(餘技) 아니면 직인적 기술로 받아들여지던 그림 그리기가 시대정신을 일구어내는 전문 예술가 직군이자 근대적인 직업으로서 본격적으로 건립되고 있음을 바로 이들 '1세대 모더니스트들'에서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유영국_무제_캔버스에 유채_100×80cm_1956

2 ● 이들 '1세대 모더니스트 화가들'이 마주한 세계는 진보와 더불어 제국주의, 파시즘, 전쟁에 의한 야만이 교차되던 격동의 20세기 현실이었다. 이들은 그 한가운데서 정치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저항하며 행복한 세상을 꿈꾸되 예술을 그 방법으로 삼았던 이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도 6・5 한국전쟁은 매우 강렬하고 혹독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전쟁이 발발한 1950년 전후, 그들의 나이는 30대 중후반에 접어들던 때로서, 선명한 처신과 왕성한 활동으로 각각 독자적인 예술세계로의 진입이 예고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각의 꿈과 계획은 전쟁으로 인해 여지없이 난파당하여 산산히 부숴지고 있다. 전쟁 중 월남한 화가 이중섭이 피할 수 없었던 가난과 고통, 처자식과의 생이별, 그리고 때이른 죽음은 폭력적인 전쟁과 마주한 한 예술가의 처절함의 상징적 서사로서 자리매겨진지 오래이다. 김환기는 그가 예술에서 취했던 진보적 태도로 인한 노선 갈등 속에 1949년 9월 서울대 교수직에서 사퇴하고 전쟁을 맞고 있다. 그런가 하면 유영국의 경우는 1949년 가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참가하는 대신 여러 명의 30대 작가들과 더불어 경복궁미술관에서 1950년 7월 1일 개최예정으로 "50년 미술협회전"을 계획하지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 전시 참가를 둘러싼 당시 서울미대 학장 장발과의 불화로 직장인 서울대 교수 자리에서 사퇴하게 되고, 결국 전시에는 돌입되지도 못한 채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9・8 서울 수복까지 인민군 치하에서의 생활과 동원, 그리고 1・4 후퇴와 피난지 생활, 서울 환도로 이어지는 행렬 속에서 이들의 삶에 새겨지고 있는 깊은 상처들을 보면 어느 누구든 하나의 예외도 허락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은 이들에게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공간과 시간, 그리고 삶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집단적인 체험을 드리우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들에게 주어진 부산 피난시절은 공동체 구성원들을 가난과 궁핍, 사랑하는 가족들의 이산, 불안정한 주거, 절망, 파탄 등 난파된 생활이라는 하나의 끈으로 묶을 수 있는 문화적 기억을 안겨주고 있다. 화가들이 어떻게 뒤엉키며 그들에게 얼마나 컴컴한 그림자들이 드리워졌는지는 환도하자마자 김환기가 쓰고 있는 「의욕의 서울」 (1953)이라는 한 에세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김환기_푸른 풍경_캔버스에 유채_32.5×23.5cm_1951

『부산이 우리 전민족적인 인연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리하여 나도 엑스트라의 하나로 3년을 줄곧 부산 신세를 졌습니다. 아, 그러나 자나 깨나 서울생각이었고 갈수록 그리운 건 서울이었습니다. 부산에 굴러가서도, 그리고 굶네 죽네 해도 느는 것은 술이었습니다. 술 다음에 으레 주정이었고 술을 하지 않아도 대낮에 다방에 진을 치고 명사 무명사 할 것 없이 심지어는 조석으로 만나는 친구들 욕을 하는 것으로 낮과 밤을 보낸 것도 사실입니다. 실로 부산은 술과 욕을 배운 곳입니다. 부산서 같이 고생하던 친구들, 서울에 와서 거리에서나 다방 등지에서 만나도 그저 악수 정도요, 반가운 줄을 모르겠으니 필시 부산살이 3년에 인간의 감정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복귀한 서울은 또 부산의 재판이 될 것만 같습니다. 다방마다 사람이고 길을 건너는데 자칫하면 자동차에 치어 죽을 것 같습니다. 서울은 벌써 사람의 홍수요, 자동차의 거리랍니다. 아! 그립던 서울에, 가로수의 서울에 돌아와서 열흘이 못 되어서 먼 산을 보게 됩니다. 나가서 생활비를 벌어 오는 것이 아니건만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서울이 된 것 같습니다.』

김환기_달과 매화_캔버스에 유채_80×100cm_1959

정부의 구호활동, 배급, 숱한 고난을 가로지르는 우정, 현실을 도취로 이끄는 술 같은 것들은 이들의 생존을 위한 기초 식량이었음은 여러 회고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렇듯이 한국전쟁은 그 구성원들이라면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었던 하나의 민족사적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이들 '1세대 모더니스트들'에게는 누가 뭐래도 난파당한 피난생활을 딛고 일어서게 하고 그들에게 진정한 실존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예술이었음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이들은 다양한 예술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김환기, 백영수는 피난지 부산의 다방들(뉴서울, 밀다원, 녹원)에서 개인전을 각각 1회, 2회씩 열고 있다. 그들을 포함하여 이중섭, 이규상, 장욱진 등은 종군작가단 활동을 하며 전시를 여는가 하면, "3・절 경축미술전"등에도 출품하고 있다. 신문 잡지에 그리는 삽화들, 기고한 에세이들의 원고료가 그들의 생활을 연명시키는 주요 원천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그렇지만 이들이 전쟁의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미래를 향한 야심찬 '예술' 기획은 1949년 가을 전시 이후 단절되었던 "신사실파전"을 다시 복구하는 데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국립박물관 전시실에서 열린 그 3회전엔 기왕의 동인이었던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장욱진 등 4인 이외에 월남하여 고초를 겪고 있던 화가 이중섭과 여러 차례 개인전과 다양한 문예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이즈음 30세가 갓 넘기시작한 백영수가 함께 참여함으로써 미술계에서 그 위상을 과시하고 있다. 휴전회담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던 시기에 개최된 이 제3회 "신사실파전"(1953. 5.26-6.4)에 참가하고 있는 여섯 명의 작가들 가운데에서 새롭게 가담하고 있는 사람은 이중섭, 백영수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부산 피난지를 중심으로 한 그 동안의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멀리 강원도 울진에서 양조장으로 생업을 삼고 있던 화가 유영국의 참여가 오히려 이색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유영국은 고향인 강원도 울진에서 전쟁기를 화단으로부터 고립되어 보내고 실로 오랜만에 이들과 접속하여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는 셈이었다.

백영수_게_캔버스에 유채_55×46cm_1953

3 ● 그런 점에서 최근 새롭게 발굴된 '한국 추상화의 거장'으로 불려 온 화가 유영국이 한국전쟁기에 제작한 작품 5점은 우리의 눈길을 끌만하다. 알다시피 유영국은 장인적인 특유의 몰입을 통해 근대적인 직업으로서 예술가의 세계를 일구었다고 평가되는 흔치 않은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태평양전쟁, 해방공간 등 어수선했던 시절이지만, 6・5전까지 "독립미술협회전", "자유미술가협회전", "NBG양화전", "신사실파전" 등을 통해 왕성하게 발표된 작품들과 전쟁 발발로 무산된 "50년미술협회전" 출품작들까지 합하면 기록상으로만 보더라도 무려 120여 점이 훌쩍 넘어 그 누구보다도 많은 전시출품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거의 망실된 상태였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이번 발굴 작품들을 살펴보자. 이들 가운데 두 작품은 '53 KUGG'이라는 화가의 서명이 선명하다. 이에 근거해 보건대, 이 작품들은 그의 나이 37세 되던 해인 1953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 두 작품을 포함해 나머지 작품들도 같은 해 봄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유영국은 1・후퇴시 고향인 강원도 울진으로 피난하여 양조장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었으며, 이즈음 작품과는 두절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제3회 "신사실파전"은 그에게 1950년 경복궁미술관에서 열기로 계획했으나 전쟁으로 무산되고 말았던 "50년미술협회전" 이후 3년 만에 처음 맞는 전시였다. 전시 리플렛에 따르면, 이 전시에 그는 "산맥", "나무", "해변에서 A", "해변에서 B" 등 모두 4점의 작품을 출품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한편, 몇몇 증언에 따르면, 이 전시를 위해 여러 점의 작품들을 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이들 가운데 남아 있는 작품은 지금까지 한 점도 확인된 것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발굴 작품들은 이 전시 출품작품이나 이 때 제작된 작품들 가운데 일부일 것으로 판단된다.

백영수_밤하늘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05

이번에 발굴된 5점의 작품들은 모두 유채물감으로 그려진 것으로, 그 가운데 4점은 캔버스에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 서명이 있는 65.2×50.2cm(도판 1), 65×53cm(도판 2) 크기의 두 작품은 나무를 추상화한 것으로 제2회 "신사실파전"(1949. 11. 28 - 12. 3, 동화화랑) 출품작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작품 1점("직선 있는 구도" A-D 중 한 점으로 추정됨)과 유사성을 보여주며, 그런 점에서 제3회 "신사실파전" 출품작인 "나무"와도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45.5×33.5cm(도판 3) 크기의 작품 1점은 나무를 소재로 하였지만, 바다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53.2×46cm (도판 4) 크기의 작품 1점은 바다에 떠 있는 배 두 척을 추상화한 작품이어서 출품작 중 "해변에서"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들 캔버스 그림들은 바닥 천이 흔히 캔버스용으로 사용하는 삼베나 면이 아니라 올이 굵은 것으로 보아 곡물 포대용 천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가 양조장에서 사용하던 곡물 운반 보관용 포대를 활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앞의 네 작품이 해방 이후 두드러지기 시작한 자연의 형상성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데에 비해, 33.3×27cm(도판 5) 크기의 나머지 한 작품은 추상적인 구성작업의 성격을 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의 도쿄시절의 기하학적 추상작업을 환기시켜 준다. 이 작품은 캔버스가 아니라 5mm 정도 두께의 하드보드 종이에 그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발굴작품들의 상태는 모두 전쟁 중 그가 얼마나 그림 재료 획득에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중섭_가족_종이에 유채_36.5×26.5cm_1953~4

4 ● 이번에 새로 발굴된 5점의 작품들은, 우선은 베일에 가려져 있던 유영국의 한국전쟁시의 작품 세계를 확인하는 매우 유의미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게다가 이 작품들이 특히 주목되는 것은 작품의 성패를 떠나 전쟁 이전의 작품세계와 '모던아트협회' 창립으로 이어지는 1950년대 후반의 작품세계 사이의 빈자리를 메울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현재로는 이 작품들 이전의 것으로 가장 가깝게는 1949년 "신사실파전" 출품작 1점이, 이후의 것으로는 1955년 작품 3점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번 전시인 "유영국의 1950년대와 1세대 모더니스트들"은 제목이 말해 주는 바대로 '1세대 모더니스트들'의 전쟁 체험들이 어떻게 상호영향작용관계에 있는지, 그리고 이 시기의 작품들이 자신들의 작품세계의 절정기에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더불어 이번에 발굴된 유영국의 작품들을 바로 그것들의 기원이 되는 역사적 맥락으로 되돌려 확인하고 우리 근현대미술사 안에서의 그 위상을 조명할 기회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6・5 한국전쟁은 같은 역사를 경험한 '1세대 모더니스트 화가들'을 그 세대 나름의 공통된 하나의 이슈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그 각박한 현실에서 예술을 통해 그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그렇듯이 하나만으로 표상되는 것은 아니었다.

장욱진_아이_캔버스에 유채_45.4×27.3cm_1957

전쟁은 이들 작가마다 각각의 상이한 스펙트럼으로 투영되고 있다. 고향 울진에서 생업으로 전쟁기를 보낸 유영국이 그 고립을 두고두고 자신의 화업에서 잃어버린 시간으로 회고하고 있듯이, 전라남도 기좌도가 고향인 김환기, 일본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귀국한 홀홀단신의 백영수, 일본인 처를 둔 월남화가 이중섭, 충남 연기를 고향으로 둔 장욱진 등의 전쟁체험은 각각 다양한 편차와 온도 차이를 드러낸다. 그렇듯이 그들의 전쟁 체험은 각각 다르게 주어지고 있고, 그 체험의 차이는 이후 또 다시 자신의 갈 길과 현실을 초극하는 나름대로의 비전을 찾아 나서는 요인이 되고 있다. 화가 김환기는 1956년 파리 유학길에 올라 새로운 예술을 찾아 나섰다. 유영국은 그 공백을 디딤돌로 삼아 한국미술사에서 모더니즘 미술의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하여 구태의연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중심의 미술계에 대안을 제시하며 그룹전시대를 열고 도래하는 앵포르멜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이규상은 종교적 상징을 드러내는 추상의 세계로, 장욱진은 전쟁의 상흔을 치유라도 하려는 듯이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백영수는 삽화, 인테리어디자인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중섭은 일찍 세상을 떴다. 이렇듯이 이들 '1세대 모더니스트들'에게 한국전쟁은 하나의 트라우마로 각인되고 있지만 이후 자신들의 새로운 예술의 절정을 향한 짙은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두 큰 난리를 거친 이후 특히 소중화 사상에 함몰되는 등 자기 정체성을 폐쇄적으로 유지하는 데에 급급했던 우리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동일하게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도 변화와 혁신을 자신들의 행동양식으로 일으켜 세우며, 구태의연한 일제시대의 재현미학을 뛰어넘어 한국 현대미술의 아젠다를 세우는 선구자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 이인범

장욱진_눈_캔버스에 유채_53×72.5cm_1964

1 ● Yoo Youngkuk(1916-2002)'s five newly discovered artworks are exhibited under the title "Yoo Youngkuk's 1950s and the First Modernist Generation" along with signature pieces by leading figures of the first generation of Korean modernists Kim Whanki(1913-1973), Lee Kyusang (1918-1964), Chang Ucchin(1917-1990), Lee Joongseop(1916-1956) and Paek Youngsu(1922-).These artists are the members of the "Neo Realist" group that emerged and became the mainstream art movement of Korea after Korean War. This exhibition provides an opportunity to explore how these artists influenced each other within the context of war and how they have transcended the trauma to open up a new vision in the world of art. (...) 2 ● The time the 'first modernists' had to confront was the chaotic 20th century of progression, imperialism, fascism and war. (… ). However, the Korean War remained as a harsh scar in their lives; the war completely ruined their promising thirties' career. Lee Jooongseop who moved to the South during the war had to cope with poverty, pain, separation from his wife and children and his unexpected death. Kim Whanki had to resign a professor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in September 1949 and experienced the war. Yoo Youngkuk got involved in a trouble with the "Korean Art Exhibition" due to his decision to participate in the "Year 1950 Art Association Exhibition" instead of taking part in the "Korean Art Exhibition". He also resigned a professor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for this yet war broke out before the exhibition was held. No one could be an exception of this tragic history. (…) The Korean War was an unavoidable tragic historical incident yet the 'first modernists' overcame their distress through art. Despite the poor condition, these artists executed various art activities; Kim Whanki and Paek Youngsu organized solo exhibitions in cafes (New Seoul, Mildawon and Nokwon) during their refuge period in Busan. Kim and Paik together with Lee Joongseop, Lee Kyusang and Chang Ucchin held group exhibitions and even participated in the "3.1 Celebration Exhibition". (…) As part of their art scheme to overcome devastation and to outlook the future, they also started to rehabilitate the "New Realism". Kim Whanki, Yoo Youngkuk, Lee Kyusang and Chang Ucchin along with Lee Joongseop who had moved to the South and Paek Youngsu who had just stepped into his thirties organized its third show at the Temporary National Museum of Korea, Busan. (…) Yet the participation of Yoo Youngkuk is more interesting since Yoo, instead of taking refuge in Busan, made his living in a brewing industry in Gangwon-do, Uljin during war time. 3 ● Thus, the five newly discovered works of Yoo Youngkuk created during wartime are notable pieces. Yoo Youngkuk is known for his artisan concentration and is one of the leading figures who introduced the idea of a professional artist as a profession. Despite the chaos of the Pacific War and Independence, Yoo participated actively in various shows including the Independent Art Association Exhibition "Dokuritsu-Ten", the Liberal Artists' Association Exhibition "Jiyu-Ten", the "NBG Exhibition" and the "New Realism". The amount of artworks Yoo has prepared for these shows rounds up to approximately a hundred and twenty pieces but most of them are still missing. Let us look into the newly discovered works. Two of the pieces are clearly signed as '53KUGG', which evidently shows that they were produced in 1953, the year the artist turned thirty-seven. The three other works can be assumed to have been created in the same year. Yoo took refuge in his hometown Uljin, Gangwon-do and was earning a living by operating a brewing plant and during this time stopped any artistic activity. The third "New Realism" was his first exhibition in three years after the "1950 Art Association Exhibition" in Art Museum Gyeongbokgung was cancelled in 1950 due to the war. According to the exhibition leaflet, Yoo had put four pieces on show including "Mountain", "A Tree", "On the Beach A" and "On the Beach B". None of these works have been found so far yet the recently discovered pieces are assumed to be part of the works that were produced during that time. The five pieces were all painted in oils and four of them are painted on a canvas. The two signed pieces in sizes 65.2×50.2cm(fig.1) and 65×53cm(fig.2) are abstract expressions of trees and shows much similarity with his work (assuming as one of the "Composition with Lines" A-D) for the second "New Realism" and " A Tree" which was exhibited in the third "New Realist Exhibition". The 45.5×33.5cm sized piece(fig.3) depicts a tree with its background a sea and the 53.2×46cm sized piece(fig.4) is an abstract painting of two ships floating in the sea, which corresponds to his work "On the Seaside". Their canvases have thick grains that are assumed being made of sacks Yoo had been using in the brewing plant. The four pieces show Yoo's interest in forms in nature, prominent in his works after the Independence. The 27.5×33.5cm sized piece(fig.5) however, shows a rather abstract constructive composition that reminds of his geometrical abstract works of the time Yoo lived in Tokyo. This piece is painted on a 5mm-thick hardboard paper. Such conditions of the discovered works vividly reflect how difficult it was for artists to acquire material during the wartime. 4 ● The newly discovered five artworks of Yoo Youngkuk will become important evidences in unveiling Yoo's artistic activity during the Korean War period. Moreover, these works take precious value as a bridge between Yoo's artwork before the war and of the late 1950s. At the present, the closest work produced before these five pieces is the 1949 work exhibited in the "New Realism Exhibition" and after, three pieces created in 1955. "Yoo Youngkuk' 1950 and the First Modernist Generation", as the title speaks of itself, is a great opportunity to inspect how the 'first modernists' were affected and influenced by the experience of war and how they reflect these experiences in the climax of their works of art. Also, it is a chance to read the newly discovered pieces of Yoo Youngkuk in such historical context and to confirm their status in the history of Korean modern art. The Korean War brings together the 'first modernists', the generation sharing a common experience, with a common issue. It would arouse the question of what they would have longed for through their art in such cruel reality. War however, cannot be presented as a sole image or a symbol. Each artist reflects the war in different spectra through their works. As Yoo Youngkuk, who took refuge in his hometown Uljin and later recollects the secluded three years by calling it the 'lost time', Kim Whanki, whose hometown is Gijwado, Jeollanam-do, Paek Youngsu, who spent his youth in Japan, Lee Joongseop, who was married to a Japanese woman, and Chang Ucchin, who was born in Yeongi, Chungcheongnam-do, each present different aspects of the war through their work.The experience of war is interpreted in different ways by each of the artist and the different interpretation and presentation eventually become a basis for the artist to transcend reality and find their own vision. Kim Whanki went to Paris in 1956. Yoo Youngkuk establishes the "Association of Modern Art" to get ready for the Informel era. Lee Kyusang develops an abstract world that reveals religious symbols and Chang Ucchin, as if to cure the wounds of war, explores innocence. Paek Youngsu moved towards illustration and interior design. Lee Joongseop on the other hand early confronted death. For the 'first modernists', the Korean War was a trauma yet at the same time was an event that formed the basis of their artistic identity. Despite Korea's long history of its stubborn attitude to maintain its conservative identity due to incidents such as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e Second Manchu Invasion of Korea in 1636-1637 and, the 'first modernists' take their wartime experiences as an inspiration for their innovative artistic execution and by surpassing the old Japanese aesthetics of reproduction, they set up agendas and open up a new era of Korean modern art. ■

Vol.20101118g | 유영국의 1950년대와 1세대 모더니스트들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