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색의 정서

박유미展 / PARKYUMI / 朴柔美 / installation.video   2010_1102 ▶ 2010_1114 / 일요일 휴관

초대일시_2010_1102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무이_GALLERY MUI 서울 서초구 서초동 1658-14번지 무이빌딩 1층 Tel. +82.2.587.6123 cafe.naver.com/gallarymui.cafe

절대고립의 세계에서I 소통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주요한 이념 가운 데 하나이다. 그것은 언제나 긍정적인 뉘앙스로 얘기되고 북돋워야할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소통은 오늘날의 정치, 경제, 학문, 예술을 망라한 모든 분야에서 의심 없이 추구되는 가치이자 지향점이다. 그것은 아무리 많이 있어도 부족한 무엇으로 여겨지며 그것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사회일수록 좋은 사회, 유토피아에 가까운 사회로 인정받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특정한 이념의 지배 아래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 그러하듯이 소통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를 쉽게 입에 올릴 수가 없다. 누군가가 만약 소통은 나쁜 것이다, 폭력적인 것이다, 불필요한 것이다, 라는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고 다닌다면 그는 당장 주변사람들에게 석연찮은 인물로 여겨지게 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한 인물로 따돌림 당할 것이다.

박유미_불문률_현수막 설치_70×600cm_2010

우리는 이처럼 배척당하는 불온한 인물이 되지 않기 위해 순순히 고개를 조아리며 소통의 이념에 젖어든다. 우리가 이만큼 윤택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도 모두 소통의 이념 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순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자신도 모르게 불온한 성향을 가지게 되어 이 세계에 도저히 순응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 이 글에서 소개하게 될 박유미라는 인물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사실, 일상을 살아가는 박유미는 전혀 불온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박유미가 작가라는 명칭을 달고 하는 일들은 소통의 이념에 늘 흠집을 낸다. 그것은 박유미가 소통에 대해 정치적인 반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절대 고립에 대한 박유미의 지향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즉, 박유미 본인은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에 그저 충실할 따름이지만, 박유미의 작품은 소통의 이념이 지배하는 이 세계의 완결성에 타격을 주는 것이다. 결국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박유미는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의 세계에 위험하고, 불온한 인물이 된다.

박유미_불문률_현수막 설치_70×600cm_2010

II 소통 없는 삶이 과연 가능한가? 이러한 질문에 쉽게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소통의 이념에 포섭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소통 없는 삶은 가능하다. 다만 쉬쉬될 뿐이다. 그것은 한남동 길가에 나부끼는 현수막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내걸었던 사람은 소통이 지배하는 일상 속에서는 박유미라 불리지만, 그의 진짜 이름은 현수막 속에 기입된 알 수 없는 기호와 수식과 같은 것이다. 그는 박유미로 살아가는 시늉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불릴 수 있는 명칭이 마땅치 않은 존재로서 소통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아스팔트 덩이를 끊임없이 망치질한다. 박유미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잘 모른다고 대답한다. 박유미가 알 수 없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박유미를 통해서 어렴풋이 넘겨짚을 수만 있을 뿐 그를 결코 만날 수가 없다. 그는 철거 현장에서 가지고 온 아스팔트 덩어리를 석 달이고 넉 달이고 계속 혼자서 깨고 있다. 그가 고립된 노동을 통해 쏟아내는 크고 작은 아스팔트 덩이들을 박유미는 차곡차곡 포대에 담아 모은다. 시간이 갈수록 포대는 자꾸 늘어만 가고, 결국에는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박유미는 또 한 번 그가 영위하는 소통 없는 삶이, 소통의 이념이 지배하는 일상 속으로 범람하는 때가 왔다는 것을 안다. 이 때 박유미는 자신의 이름 위에 작가라는 명칭을 하나 더 덧붙인 다음 범람에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 나간다. 지난 번 장소가 한남동 길가였다면, 이번에는 텅 빈 실내의 나무 바닥이다. 범람의 일시는 10월보다는 11월이 적당할 것이다. 박유미는 일상의 입장에서 용의주도하게 그의 삶이 범람하는 환경을 조성한다. 박유미는 일상에 충실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그가 살고 있는 세계의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박유미 자신은 소통의 이념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가 살고 있는 절대 고립의 세계는 박유미가 어떻게 해서라도 도달하고 싶어 하는 소중한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박유미_탈색의 정서_조명장치, 아스팔트_가변설치_2010

III 앞서 말했듯이 박유미의 불온성은 세계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공격적인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 고립된 그의 세계에 도달하려 하는 간절한 동경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박유미는 소통의 이념이 행사하는 폭력에 너무나 예민한 사람이다. 박유미는 소통의 이념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겪게 되는 수난과 공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박유미_the other_캔버스에 철선_60×150cm_2008

박유미는 그러한 수난과 공포로 점철된 유년을 살았고, 그런 까닭에 아주 일찍부터 절대 고립의 세계에 살아가는 그를 품게 되었다. 그는 박유미와 겹쳐 있지만 박유미가 아니다. 그는 절대적인 타인이다. 박유미는 그를 알지만, 그는 박유미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박유미를 알지 못해야 한다. 소통의 이념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박유미가 수난을 겪을 때 그는 언제나 믿음직한 버팀목이 되어 왔다. 아마 바깥 세계로부터 원활한 소통을 강요받을 때 마다 박유미는 그가 살고 있는 절대 고립의 세계를 바라보며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변화가 일어 난 건 박유미의 내면에 철저히 봉인되어 있던 그의 세계가 바깥으로 범람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그것이 박유미의 필요에 의해서 생긴 일인지, 그의 필요에 의해 생긴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박유미는 그 때 부터 작가라는 명칭을 지니게 되었고, 동시에 이 세계에 대한 불온성도 갖게 되었다.

IV 박유미는 그가 깨어 놓은 아스팔트 덩이들을 텅 빈 공간의 나무 바닥에 무작위로 쏟아놓는다. 손이 가는 데로 묵묵하게 굴러다니면서도 침범하지 못할 핵(核)을 지닌 것처럼 완강한 아스팔트 덩이들은 여러모로 그의 모습을 닮았다. 사실, 박유미라는 이름이 부여되어 있는 모든 작품에는 그를 연상시키는 요소들이 항상 있어 왔다.「니콜라스」라 이름 붙여진 사람의 형상,「타인」연작의 검은 캔버스,「로미오와 줄리엣」의 공허한 여백,「가을」의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는 니콜라스의 사진, 등 아득히 유보된 공간에 배어들어 있는 알지 못할 인격체의 존재감이 언제나 박유미의 작품을 특징 지워왔다.

박유미_I could not stop for death_단채널 비디오_00:05:22_2010

나무 바닥에 아스팔트 덩이들을 모두 쏟아 놓은 다음 박유미는 백열전구 하나를 그들 위에 낮게 드리우고 꺼질 듯 말 듯 한 미약한 불빛으로 전구를 밝힌다. 그리고 사람 키 높이의 스탠드 조명을 아스팔트 더미의 정면에 놓고, 공간 전체를 하얗게 탈색해 버릴 정도로 강한 불빛을 단속적으로 터뜨린다. 불빛이 터지는 간격은 10초가 채 안 될 것 같다. 여기까지 설치를 해놓고선 박유미는 멀찍이 물러나서 자신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본다.

박유미_탈색의 정서_조명장치, 아스팔트_가변설치_2010

이 풍경은 과연 그가 의도한 것일까 아니면 박유미가 의도한 것일까. 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아마 박유미도 모를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 풍경이 무척이나 비유적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따름이다. 바닥을 가득 매운 아스팔트 덩이들이 창출해 내는 수평의 공간은 그가 살아가는 절대 고립의 세계를 환기시키는 것 같고, 그 위에 드리워진 백열전등은 그의 세계를 끈질기게 조망하고 동경하는 박유미를 연상시킨다. 또한 이 풍경 전체에 강한 불빛을 작렬시키는 스탠드 조명은 그와 박유미의 공생관계를 용납할 수 없는 소통의 이념을 암시하는 듯하다. 작가는 이러한 해석에 얼마만큼 동의할까? 하지만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이 풍경이 이제까지 박유미라는 이름을 달고 산발적으로 나타났었던 불온한 세계상의 총체적인 모습이라는 데엔 아마도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 강정호

Vol.20101104f | 박유미展 / PARKYUMI / 朴柔美 / installation.video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