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봉展 / KANGDUCKBONG / 姜德奉 / sculpture   2010_1103 ▶ 2010_1109

강덕봉_HIDE-uncertain_혼합재료_210×170×85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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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봉 홈페이지_www.duckbong.com

초대일시_2010_110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B1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다공질 인간의 도래 ● 강덕봉의 작품은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결코 가볍다고 볼 수 없지만, 조각의 오랜 기준이었던 인체는 그 실체적 본성을 잃고 다공질의 무엇인가로 변모한다. 헤쳐 모이면서 오밀조밀하게 접합된 통과 관들은 조각상의 지지를 위한 구조적 역할도 담당하고는 있지만, 동시에 인체 또는 조각의 물질적 실체를 휘발시키는 휭 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가 2007년부터 주로 사용해 왔던 PVC는 무엇인가를 통과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어떤 비밀도 머무를 곳이 없을 만큼 뻥 뚫려 있는 듯하다. 물음표나 가면 같은 도상이 등장하며, 'hide'라는 전시 부제는 이러한 투명 존재들에 붙여진 역설적인 이름이다. 그것은 너무나 투명해지고 드러나 있기에 오히려 불투명해지고 감추어진 인간의 새로운 단계를 표현한다. 무릇 너무나 투명하게 다가오는 것에는 삶의 비밀이 내재해 있기 마련이다. 강덕봉이 사용하는 PVC는 볼펜이나 형광펜 사이즈의 크기부터 동전만한 것에 이르기 까지 대략 3-10가지 정도의 굵기를 가진다. 필요한 사이즈는 따로 주문하기도 하지만, 대개 대량 생산된 재료들을 사용한다. 전통적 조각을 이루어왔던 나무나 돌, 금속 덩어리와 달리, 그의 작품에서 인간을 이루는 구성성분들은 더 많은 정제와 가공을 거친 것이며, 예술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인위적 속성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은 앞에서 볼 때와 옆에서 볼 때의 시각적 단절감으로 인해, 조각이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입체감과 차이가 있다. 물론 그의 작품에도 조각의 시간적인 요소는 여전히 작동하여, 사선으로 잘려진 타원이 각도에 따라 원으로 보이거나 인체에 각인된 표정이 변한다든가 하는 면이 있기는 하다. 인간에 내재된 수수께끼 같은 본성은 시각적 트릭에 많이 의존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2007년 모란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보다 더 많은 굵기의 관들이 활용되어 섬세함을 더하였으며, 자동차 도료로 칠해진 화려한 외관은 원재료를 계속 감추고 있다. 강도 보강을 위해 내부에 금속 지지대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플라스틱 관으로 만들어진 인체 상들은 묵직한 중량감을 가진 듯한 효과를 줄 뿐이다. 다양한 굵기의 통과 관들의 배열은, 파이프를 소통에 대한 메타포로 활용해 왔던 초기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더욱 복잡해진 구조와 색상은 인간 간에 기대되는 바의 투명한 소통을 여전한 이상으로 남겨 놓는다. 공간공포증을 연상시키는 가득 메워진 관들은 채워질수록 비워지는 역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입체 작품 6점 외에, 벽에 걸린 부조 7점은 가면이라는 소재를 통해 소통에 드리워진 불투명한 차원들을 부연한다.

강덕봉_HIDE-identity_혼합재료_200×93×50cm_2010
강덕봉_HIDE-mind_혼합재료_212×85×80cm_2010

각시탈이나 하회탈 등 이미 알려진 기존의 도상 외에, 우는 듯 웃는 듯한 복합적인 인상의 창작가면 등이 걸려 있다. 강덕봉의 작품에서 소통은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깔고 있는데, 인간은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투명한 소통은 복마전 같은 것으로 변질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가면을 벗기면 본질이 나타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지 않는다. 인간상 자체가 고정된 본질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면 뒤에는 또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고 이러한 과정은 계속된다. 그러나 이상적 인간상에 내재된 본질과 실체에 문제가 있다면, 이러한 가상의 유희가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윤리학과 미학이 갈라지는 분기점을 지시한다. 다양한 크기의 파이프로 이루어진 인체상은 어디론가를 향하여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며, 세밀한 묘사 보다는 흐릿하게 잔상만 남은 속도감이 특징적이다. 발 부위는 매우 크고 머리로 갈수록 스케일은 줄어들어 퍼즐 조각 하나로 머리통을 대신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이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축소되어 있으며, 그 역시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듯한 부분성이 두드러진다. 근대에 과신되어온 이성은 그 총체적 이상과는 달리 파편적이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일부가 침소봉대 된 것으로, 강덕봉의 작품에서 급격하게 상대화된다. 몇 개의 판으로 구성된 두 명의 실루엣이 악수를 하는 작품은 보색 대비를 가지고 있으며, 그나마 양끝으로 갈수록 흐리게 처리되어 있어 피상적인 인간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양 팔을 허리에 얹은 자신만만한 태도와 달리, 가슴팍에 새겨진 거대한 물음표는 한 길 사람 속을 모르는 사정을 표현한다. 두 팔을 벌린 남자의 가슴 부분에 만들어진 얼굴은 앞뒤에 따라 표정이 정반대로 변한다. 그것은 울고 있지만 속으로는 웃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우는 이율배반적인 심리를 표현한다. 물음표 실루엣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여성에 대한 궁금증을 나타낸다. 강덕봉의 작품에서 인간은 여전히 미지의 존재--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이며, 인간의 실루엣을 가진 파이프 덩어리들은 인간을 또 다른 차원에서 조명해 준다. 파이프로 만들어진 인간은 기관과 기관, 세포와 세포 사이를 잇는 수많은 연결 관으로 이루어졌을 몸 자체에 대한 비유이다. 여기에서는 실체 자체가 관계망이며, 구조가 된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본질이나 목적을 가정하는 실체론적 사고는 사라진다. 파이프들은 인체에 대한 고정된 한계를 넘어서 계속 덧붙여질 수 있다. 그것은 물질이 스스로 구성 내지 구축해 나가는 형태이며, 명확한 측정과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의 인체상은 기계적 구조를 가짐으로서 인간이 도달하게 된 새로운 단계를 상징한다.

강덕봉_HIDE-reason_혼합재료_190×140×45cm_2010

안토니오 네그리는 『혁명의 시간』에서 역사적으로 부침해온 인간의 본성 변화를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켄타우로스, 즉 자연과 섞여 있는 인간의 운명에서 시작하여, 생산 속에서 변형되며 자신의 존재를 인위적으로 발전시키는 인간에 도달한다. 본성이 계속해서 변화하여 두 번째, 세 번째, n번째에 이르게 된다. '켄타우로스 되기', '인간-인간되기'를 잇는 것이 '기계-인간되기'이다. 근대 이후에 펼쳐진 기계적(machinic) 단계는 인간의 본성에 부착되는 인공물들을 철저하게 물질적으로 생산함으로서 이루어지는 세계의 생산이다. 네그리에 의하면 고대에 사람이 켄타우로스였던 곳에서 노예는 짐을 나르는 짐승이었다. 근대에 '인간-인간'의 공동체는 생산에 바쳐진 공동체이다. '인간-인간'의 공동체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공통적 착취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노동과 오성, 한계의 극복을 통해 근대적 단계를 벗어났다. 이와 함께 초월과 명령이라는 형이상학적 과오도 종말에 도달했다. 탈 근대적 단계에서 인간은 보철들(prosthesis)로 변신(metamorphosis)한다. 여기에서 생산이란 것은 소통이며, 특이성의 생성(generation)이다. 강덕봉의 작품에서 소통의 매개가 되는 여러 단계의 파이프들은 인간이 활용하는 외적 도구가 아니라, 인간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 언어는 소통 도구의 정점에 있는 것으로, 주체성은 우리가 언어라고 정의하는 외부 앞에 놓여진 내부가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도구, 언어, 주체는 하나의 공통적 존재양태를 가진다. 네그리는 탈근대적 맥락에서는 몸의 힘이란 지식의 힘이라고 말한다. 이성은 공통적이 됨으로서 도구를 통합함으로서 점점 더 육신적으로 된다. 마찬가지로 몸은 점점 더 지성적으로 된다. 일반지성의 발생과 함께 우리는 '인간-기계'의 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기계(도구 혹은 언어)가 몸들의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한에서 기계를 욕망하게 된다. 몸이 언어를 통하여 생산기계를 재전유하는 '인간-기계'의 시대에서는 기계적 욕망이 새로운 삶, 새로운 몸,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것은 노동자인 동시에 기계임의 표현이고 고통 속에 사는 동시에 즐거움 속에서 살아감의 표현이며, '인간-기계', 즉 기계적 몸의 생산인 동시에 재생산임의 표현이다. 강덕봉의 작품에서 기계적인 측면은 반복과 폐쇄가 아니라, 그 분자적 형태의 조합과 배치를 통해 바깥으로 열려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신하는 과정적 존재이다. 네그리와 기계 개념을 공유하는 펠릭스 가타리는 『카오스모제』에서, 기계적 배치는 자신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통하여 존재론적 문턱, 비선형적인 불가역성의 문턱, 개체 발생적이고 계통발생적인 문턱, 이질 발생적이고 자기 생산적인 창조적 문턱을 넘어감으로서 자신의 일관성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도 (기계적) 배치는 우연이나 보편적인 공리계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 즉 배치가 종속되는 유일한 법칙은 일반적인 탈(脫)영토화 운동이라고 덧붙인다.

강덕봉_HIDE-intention_혼합재료_183×280×25cm_2010

다양한 크기로 이루어진 파이프들은 형식주의나 물화를 낳는 단일한 언어학적 기표의 통제아래 놓이지 않는다. 이 복잡한 통과 관들은 지금도 새로운 관계들 속에서 계속 생성되는 듯하다. 강덕봉이 만들어낸 새로운 인간상의 구조는 하나로 틀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부품들이 조립되어 작동하는 기계적 양상을 띤다. 그의 작품이 의미하는 것은 기계적 주체성이다. 펠릭스 가타리는 『카오스모제』에서 기계적 주체성, 기계적 주체화의 배치는 상이한 부분적 언표 행위들을 혼합하고, 말하자면 주체 대상관계 이전에 그리고 그 관계 옆에 설치된다고 말한다. 기계적 주체성은 집합적 성격을 지니며 다중 구성 요소적이다. 그는 이러한 주체성 생산이 지닌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아름다운 것은 주체성의 특이한 생성'(네그리)이다. 그것은 억압을 낳는 주체성에 대한 어떤 보편주의적 표상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강덕봉의 작품에 나타나는 파이프의 분자적 이합집산은 어떤 흐름을 통해 다른 것으로 되는 움직임을 생성한다. 욕망하는 기계들의 분자적 움직임은 인간 고유의 무의식과는 다른 기계적 무의식을 낳는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선험적 이상주의와 달리, 환원 불가능하고 측정 불가능한 특이성을 가진다. 구성 및 구축적 논리는 그것이 주는 피상적인 인상과 달리, 불확정성과 자율성을 증가시킨다. 그것은 오늘날 인간의 자유가 놓여 질 새로운 바탕이다. ■ 이선영

강덕봉_HIDE-dual personality1_혼합재료_120×130cm_2010
강덕봉_HIDE-dual personality2_혼합재료_150×120cm_2010

나의 작업은 관계(關係)와 소통(疏通)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본질을 나타내는 말 중 가장 중요한 말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던 원치 않던 사회적인 관계를 맺어가며, 그 속에서 소통하며 살아간다. 작품에서 보여지는 빈 공간, 채워져 있으나 비워진 형상… 이런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공허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현대인들은 피상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인위적인 구조가 복잡해질 수 록 스스로를 불투명하게 감추어 버린다. 나는 누군가인가 보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야 하나를 생각할 때 우리의 자아는 스스로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낀다. 존재론적 괴리에 빠져들어 비진정성으로 인해 작은 우울에 신음하기다 한다.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 존재감은 그 상실로 점점 더 공허함만을 가중시킬 뿐이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채우지 않으면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는 현실 속에서 그저 껍데기로서, 스스로를 숨기며 박제된 이미지로서 힘겹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강덕봉

Vol.20101029j | 강덕봉展 / KANGDUCKBONG / 姜德奉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