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7:00pm
영아트갤러리_YOUNGART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2층 Tel. +82.2.733.3410 www.youngartgallery.co.kr
전통과 현대의 접점, 수묵의 물성과 자연의 이미지 ● 묵은 대단히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풍부한 조형 경험을 축적하며 이루어진 예술형식이다. 이러한 수묵의 발전과정과 축적된 조형경험은 동양회화 전통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수묵의 역사성, 전통성은 현대라는 시공에서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즉 전통시대에 축적된 방대한 수묵의 조형경험은 대단히 풍부한 것으로 이미 완성된 체계를 이루었기에 더 이상의 발전을 도모할 여지가 희박하다는 것이 그 중 하나의 이유이다. 이에 반하여 또 다른 면은 수묵이 축적하고 있는 내용이 풍부하고 방대한 것이기에 재발견, 혹은 재해석의 여지가 그만큼 많다는 견해이다. 전자의 경우는 수묵을 전통시대의 박제된 산물로 여기는 것이고, 후자는 수묵은 동양인의 고유한 조형체계로 여전히 현대미술로서의 효과적인 표현수단이라 인식하는 것이다. 작가 배정호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그 좌표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분명 수묵을 지지체로 삼고 있다. 흑백의 단순한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조형행위는 온전히 수묵만을 매재로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허와 실을 구분하여 여백을 활용하고 사물을 개괄적으로 표현하는 등 수묵 특유의 조형체계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면을 고전적인 수묵화의 그것으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작가의 화면에는 수묵조형의 근간이 되는 필묵의 유려함보다는 조형의 견고함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운필의 묘미나 용묵의 풍부한 표현력에 의지하는 전통적인 수묵의 조형체계와는 사뭇 다른 구조적인 질서가 두드러지는 것이다. 즉 작가의 작업은 전통으로서 수묵을 수용하고 이를 개별화된 조형방법으로 수용함으로써 현대성이라는 가치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일종의 절충과 융합의 방법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에는 전통적인 수묵의 요소가 드러나는가 하면, 개별화된 개성이 혼재되어 나타나게 된다. 특히 구축적이고 구조적인 화면은 서구적인 조형성과 수묵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가미된 것이다. 결국 작가의 작업은 전통과 현대라는 민감한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모색의 한 양태라 해설할 수 있을 것이다. ● 일견 분방하고 방만한 듯 하지만 작가의 작업은 일관된 작업 순서에 따라 작가의 조형의지를 고스란히 반영해 내고 있다. 드러나는 형상을 통해 유추해 보면 그것은 자연에서 채집되어진 작고 소소한 이미지들을 재구성하여 이루어지는 감성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화면에는 운필에 의한 형상의 구축이나 발묵을 통한 풍부한 묵운(墨韻)의 전개보다는 자연물의 이미지와 그것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이루어내는 구축적인 질서가 완연히 두드러진다. 이는 수묵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이 가미된 결과인 동시에 작가의 작업이 지니고 있는 특질이라 할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특유의 깊이와 밀도를 지니게 된다. 작가의 작업은 묵흔(墨痕)을 이용한 독특한 방식에서 시작된다. 예민하고 민감한 화선지에 수묵을 더하여 이를 다른 종이에 겹치게 함으로써 남게 되는 수묵의 흔적이 바로 작업의 시발인 셈이다. 이러한 묵흔은 비록 작가의 의지에 의해 시행되지만, 그 결과가 반드시 작가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작위와 무작위가 교차하며 이루어내는 우연의 산물이다. 이러한 우연의 요소들을 필연의 내용들로 환치시키는 것이 바로 작가의 작업이 지니고 있는 핵심이다. 사실 수묵은 그 자체가 일정한 관념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른바 수묵의 정신성으로 표현되는 관념성은 바로 수묵과 종이라는 물성의 조우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물리적 현상에 대한 해석으로 설명되고 있다. 번지고 스며들며 이루어내는 행위의 흔적들은 인간에 의한 조형의지를 반영함과 동시에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물성을 드러낸다. 즉 작위로서의 인간과 무작위로서의 자연이 어우러지는 것이다. 이는 조형이라는 이성적인 것과 물성이라는 자연적인 것의 결합이기도 하다. 작가가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인 수묵의 묵흔을 작업의 시발로 삼은 것은 수묵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물성과 정신성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수묵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작가의 작업이 고루한 전통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독자적인 해석을 더할 수 있게 된 바탕이라 할 것이다.
묵흔을 바탕으로 자연물의 이미지들을 구축해 나가는 방식은 점진적인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 그것은 먹을 쌓고 더하는 과정을 통해 농담이 구분하고 수묵의 깊이를 더하여 것이다. 수묵은 중첩하면 탁해지는 성질이 있다. 작가는 이러한 중첩의 특성과 수묵 고유의 물성을 적절히 조절하고 통제하여 목적하는 바의 이미지를 구축해 낸다. 이러한 결과 비록 객관적이고 가시적인 형상들이 화면에 드러나게 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객관의 조건에 충실한 것은 아니다. 수묵은 애초에 객관의 조건을 염두에 두지 않는 표현 방식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온갖 현란한 색상들과 그 변화를 다분히 금욕적인 흑백의 구조로 수렴해 내는 것이다. 작가의 화면에 나타나는 이미지들 역시 객관의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를 수묵이라는 극히 사변적인 조형의 틀로 표출해냄으로써 자연, 혹은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무한한 메시지들을 표출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 수묵 자체의 표현 방식이 그러하겠지만 작가의 화면은 대단히 간략하고 정돈된 질서를 지니고 있다. 비록 무작위적인 묵흔을 작업의 바탕으로 삼고 있다고 하지만 이마저도 작가 특유의 질서를 통해 수렴되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화면은 복잡다단하고 현란한 동적인 변화보다 침착하고 안정된 정적인 질서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정적인 질서는 수묵 특유의 사변적인 내용과 어우러져 복합적인 인상을 표출하고 있다. 그것은 수묵이라는 극히 전통적인 재료의 표정과, 이의 주관적 해석을 통해 발현되는 개별화된 해석의 내용들이다. 만약 작가가 단지 전통과 현대라는 접점에서 그 융합과 조화의 단서를 모색하는 것이라면, 이는 물리적인 부분에서는 일정부분 긍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통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해석과 이의 적극적인 현대적 표출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전통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와 현대라는 개념에 대한 상대적인 소극적 수용에서 비롯된 결과라 여겨진다. 수묵이 지니고 있는 자연적인 물성을 보다 확대하여 수용하고, 현대라는 내용에 대해 보다 주관적이고 적극적인 해석을 더할 수 있다면 작가의 작업은 또 다른 경지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여겨진다. 어쩌면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이정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분발과 성과를 기대해 본다. ■ 김상철
Vol.20101027e | 배정호展 / BAEJUNGHO / 裵井濠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