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0 문래예술공장 페스티벌 MEET 기획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서울문화재단 서울시창작공간 문래예술공장 포켓갤러리 SEOUL ART SPACE MULLAE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1가 30번지 3층 Tel. +82.2.2676.4300 mullae.seoulartspace.or.kr
미확인부유체 UFO (Undefined Floating Object) ● 집의 패러독스 "픽션은 거미집과 같아서 아주 미세하게라도 구석구석 현실의 삶에 부착되어 있습니다. 종종 그 부착된 상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지요. 일례를 들자면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홀로 완벽하게 공중에 매달려 있는 듯 보이지요. 그러나 거미집을 비스듬히 잡아당겨 자장자리에 갈고리를 걸고 중간을 찢어보면, 이 거미집들은 형체 없는 생물이 공중에서 자아낸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인간존재의 작업이며, 건강과 돈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집처럼 조잡한 물질에 부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민음사, 65쪽)
1. 집 ● 왕희정의 작업은 집을 지으면서 시작된다. 집은 그녀 작업의 주요한 개념이자 형상이다. 입방체 위에 지붕이 얹어진 구조로 만들어진 집 구조물은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가에게 집이란 최소단위의 공간으로 최소한의 사적 공간의 테두리이기도 하다. 거의 존재론적 의미의 집 형상은 수많은 관계에 대한 은유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바슐라르는 이렇게 말했다. "집은 인간에게 안정의 근거나 또는 그 환상을 주는 이미지들의 집적체이다. 우리들은 끊임없이 집의 실재를 상상하고 되상상한다: 그 모든 이미지를 구별한다는 것은, 집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정녕 집의 심리학을 개진하는 것이다."(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95쪽, 동문선, 2003(1956)) 작가는 현대사회의 고층건물이 대지 위에 정착하지 않고 떠있다고 설명한다. 그가 바라본 오늘의 도시와 집은 바슐라르가 꼬집은 파리(Paris)의 집에 대한 의견과 일치한다. 그는 뿌리가 없는 집은 몽상을 먹고 사는 시인, 특히 집의 몽상가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108쪽, 동문선, 2003(1956))이라 했다. 공간 위에 부유하는 집의 집합체는 뿌리 없는 집들이 서로 엉킨 채 서로를 잠식하고 침범한 오늘의 도시구조에 대한 반응이다. 하지만 이질적으로 엉킨 이 집들은 단지 비판적 인식의 재현물로 머물지만은 않고 시적 가치를 머금고 있다. 승효상의 『빈자의 미학』에도 등장하는 옛 마포나루 마을의 지붕은 생태적인 존재로서의 집의 형상과 그 관계를 잘 보여준다. 나루터를 빼곡히 채운 기와집들은 불규칙적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집들 간의 관계는 비의도적이나 생태적으로 서로의 공간이 엮인 것처럼 보인다. 승효상은 "토지 속에 담겨진 흔적을 발견해 내는 것, 그리고 이들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 또한 그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침묵하는 토지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토지에 생명을 갖게 하며, 이에 비로소 그 장소성은 회복 된다"(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108쪽, 동문선, 2003(1956))라고 땅과 집의 유기적 관계를 정의했다. 마포나루터 사진 속 마을 이미지는 불규칙적으로 엮어진 왕희정의 집과 그 집합체의 형상을 닮았다.
2. 공간 ● 왕희정의 작업과정은 비교적 단순하게 이루어진다. 집의 형상은 2mm 스테인리스 환봉을 다양한 크기로 절단하여 만들어 진다. 잘려진 환봉을 용접하는데 문래동의 소규모 철제공장에서 직접 배운 용접기술을 이용해 반복적으로 집을 '짓는다'. 작가는 반복적인 노동집약적 작업의 흔적을 지우고 마치 공장에서 만들어진 비인칭적이고 반표현적인 집-형상을 완성한다. 집들은 공중에 매달려 빛과 조우하여 전시공간에 그림자에 의한 드로잉이 공간 안에 드리운다. 집은 이중적으로 존재한다. 현대도시에 관한 비판적 묘사는 반대로 시적 상상력과 운동성, 그리고 리듬감으로 재해석되어 전시 공간을 종으로 질주하고 바닥에서 천정을 향하는 횡으로 오르며 넓이와 높이를 조율한다. 하나의 집은 또 다른 집이 생성되는 터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무엇보다 이와 같은 집의 연속성에 있는데, 시각적으로는 다소 쉬워 보이는 집의 집합체가 조립이 아닌 연결된 유기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작업의 질료나 구성방식은 미니멀리스트 조각과 유사해 보이지만, 실제로 "하이브리드 하우스"(2010)는 가변적인 신축성을 지닌 조각으로 얽힌 집들은 전시 공간이란 실재 속에서 길게나 좁게, 높게나 낮게 자리 잡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집의 움직임과 운동성은 공간의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를 조율하면서 작가는 공간과 대화를 시도한다.
3. 시선 ● 왕희정은 프랑스로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4년 동안 작업은 손을 놓은 채 지냈다. 특별한 이유나 의미는 없다. 그리고 2년 전부터 다시 시작한 작업의 출발은 외부를 향한 오랜 관찰로부터 비롯되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신도시로 이사를 가고 고층 아파트에 둘러싸인 환경적 변화는 그녀를 심리적으로 상당히 억압한 듯하다. 작업노트에서 "현대사회의 고층건물들은 (...) 대지 위에 정착하지 않고 떠 있는 모습"과 유사하단 단상은 자본의 가치만 남고 실제 집의 가치는 사라진 현실의 묘사다. 작가는 내부가 쉽게 노출되는 고층아파트와 같은 건물을 바라보면서 현대건축의 투명성이 주는 시각적 심리적 불편함을 느꼈다고 한다. 이는 반대로 그녀를 응시하거나 감시하는 관음적 시선에 자신도 노출되어 있음을 의미하기에 투명하고 비물질화 된 고층빌딩의 구조는 타인의 시선이 교차하고 얽히는 공간임을 발견한다. 하이브리드 하우스가 입방체로 만들어진 선으로 이루어진 조형물이란 점은 바로 이러한 "시선의 간섭"에 대한 조형적 번역이다. 집들이 서로를 조금씩 잠식해 엮어지고 엉킨 형상은 자아를 간섭하는 타자와의 교집합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논리적인 배치보다 자연발생적이고 감각적으로 이어져있는 집들은 불규칙적으로 설치되는데, 이런 불규칙성은 관계의 불안정성, 타인의 개입이나 간섭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 간섭 없는 무통(無痛)의 공간이 존재하겠는가. 오히려 작가의 자의식으로 바라보는 간섭과 개입이란 모든 존재의 본성에 가까운 게 아닐까? 만약 불규칙한 집의 집합이 존재의 본성이라면 그녀의 간섭, 침입으로서의 관계성이란 증식의 원리를 구조화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학 원리를 미학적 구조로 풀어내기 보다는 감각적 태도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왕희정의 조형논리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4. 시선의 교차 ● 입방체는 서구회화가 유지해오던 오랜 시각적 전통의 현대적 해석이자 보편적(universal)인 시각적 인식의 틀이다. 원근법은 서구고전주의의 일원적 세계관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입체주의란 다원적 인식의 시각적 혁신이었다. 세잔의 입체주의는 개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 화가의 일상과 반복으로 완성되었던 경험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셍 빅투와르 산을 바라보았던 세잔의 일상에 의해 하나의 대상이 무한의 존재들에 의해 구성된 세계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살(chair. [세르]. 불어: '살', '육체')의 철학으로 제안했다. 현상학은 결국 서구철학의 합리성에서 벗어나 초자연적 힘과 지각의 경험에 의해 인식되는 외부와 '자신'과의 만남을 얘기하는 것 아닌가. 살은 얇은 피부가 아닌 부피를 가진 표면이며 이는 외부와 내부의 접점이 된다. 세잔이 분석한 입방체는 단지 사물을 기하학적으로 분해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소실점을 가진 원근법의 한계를 부정한 것이며 입방체 속에 갇힌 사물이 아닌 각 사물이 저마다 개별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즉 하나의 소실점이 아닌 무한의 시선이 하나의 회화 공간 속에 존재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어쩌면 왕희정의 "하이브리드 하우스"는 입체주의적 시선을 실제 공간으로 확장시킨 듯하다. 그녀가 말한 "시선의 간섭"은 사실 공간이 탄생되는 시각적 원리이며, 집들이 서로 엮이고 내외부의 시선이 교차하는 개인적 경험은 조형적으로 현상학적 시선으로 연장되었다고 보인다. 결국 그녀가 보내는 물음은 '보다'와 '보이다' 사이에 위치한다. 메를로-퐁티의 사유로 풀어본다면, 이는 양방향의 시선으로 풀이할 수 있다. 집-입방체는 보는 주체이자 보이는 대상으로 세계를 만나는 접점이 되고 반 위계적인 시선의 자율성의 형상이 된다. ■ 정현
Vol.20101017k | 왕희정展 / WANGHEEJEONG / 王稀程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