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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1015_금요일_05:00pm
후원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월~금요일_09:30am~07:00pm / 토요일_10:00am~06:00pm / 공휴일,일요일 휴관
표갤러리 사우스_PYO GALLERY SOUTH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처포엠빌딩 B112호 Tel. +82.2.511.5295 www.pyoart.com
시각의 전복성 ● 내가 보기에 정상현의 작업은 무척 어려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어려운 문제란 바로 '본다(see)'와 '안다(know)'의 관계이다. 양자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답하기 쉽지 않은 물음이다. 예컨대 나는 동전의 양면을 동시에 볼 수 없다. 앞을 보면 뒤를 볼 수 없고, 뒤를 보면 앞을 볼 수 없다. 그러니까 동전의 부분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반면에 동전의 앞과 뒤를 동시에 '안다'는 것은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는 감각적인 능력과, 그리고 '안다'는 개념적인 능력과 관련되고, 이에 따라 양자는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본다'와 '안다'의 차이에 관해 존 버그(John Berger)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의 관계가 쉽게 해명되는 문제는 아니다. 매일 저녁 우리는 해가 지는 것을 본다. 우리는 이것이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지구의 자전에 관한 지식과 우리의 시각 경험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가 해가 지는 것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눈물을 흘릴 수도 있겠지만,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해가 진다는 것을 안다고 눈물을 흘리기란 어렵지 않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확실히 '본다'와 '안다'는 서로 다르다. 그렇지만 양자가 다르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본다'와 '안다'는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호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실상 '본다'는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말이다. '무엇을 본다'라고 말할 때, 과연 무엇을 보는가? 우리는 보이는 것만을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도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보이지 않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본다'는 말이 지닌 이중성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본다'가 '안다'와 밀접히 연관된 말임을 그리스어 '이데인(idein)'과 '이데아(idea)'의 관계에서 읽어낼 수 있다. '이데인'은 '본다'를 뜻하는 말인데, 흥미롭게도 그 명사형인 '이데아'는 사물의 본질에 관해 '안다'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본다'와 '안다'의 관련성을 설명해 주는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내가 '보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관계한다. 따라서 시각의 변화는 생각의 변화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풍경을 항상 똑같은 상태로 바라보는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존 버그는 말하고 있듯이, 우리가 어떤 것을 본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곧 지식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서양의 중세 사람들에게 불을 본다는 의미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의 이미지와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본다'와 '안다'의 관계를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본 것은 이를 통해 정상현의 작품을 풍부하게 읽어낼 수 있는 지점들이 발견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동전의 양면』에 선보인 작품들은 '본다'와 '안다'가 긴밀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긋나는 모순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상현의 작품에 나타난 이미지가 '본다'와 '안다'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조금 더 들여다보기로 하자. 「데칼코마니」 연작, 「야만과 문명」, 「발화지점」 「냉온」, 「60분」 등은 이전 작업과 마찬가지로 웹서핑을 하면서 찾아낸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 웹서핑을 하면서 작가는 어떤 이미지를 본 것일까? 작가는 단지 이미지만을 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다는 것'에는 어떤 식으로든 '안다는 것'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작가가 이를 의식적으로 작업에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우선 「데칼코마니」 연작을 보자. 이 연작은 달력 이미지를 배경으로 부분적으로 미세하게 움직이는 다양한 조형적 이미지를 설치하고 그 위에 종이 은박지를 흩뿌려가면서 촬영한 이미지를 가설무대를 만들어 촬영한 후 프린트한 이미지 속에 다시 배치한 작품들이다. 삼중으로 겹쳐진 이미지 공간은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에 대해 다시 물음을 던지게 한다. 여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전혀 다른 맥락에서 추출된 이미지들이 연출해내는 무심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런 풍경들은 어떤 면에서 구조적인 형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데칼코마니」라는 연작 제목에서도 연상할 수 있듯이 두 개의 풍경은 서로 다르지만 그 구조는 결국 같다. 이런 측면에서 「데칼코마니」는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풍경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같은 공간을 다르게 변용한 풍경인 셈이다. 정상현의 작품에 나타난 이미지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체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종의 예술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장치는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 속에서 불명료한 것으로 남아있다. 이런 점에서 정상현은 어떤 주제를 정하고 작업을 한다기보다는 작업의 과정 속에서 주제를 만나는 작업을 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야만과 문명」, 「발화지점」, 「냉온」 등은 정상현의 이전 작업 「해변의 전투」와 기법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법의 유사성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화면 속에서 등장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본다'와 '안다'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야만과 문명」은 평범해 보이는 집 거실에 돌과 빌딩의 이미지가 번갈아가면서 나타난다. 약간은 나른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거실이라는 공간에 갑자기 큰 바윗돌이 침입하고, 그 바윗돌이 180도로 회전하는 순간 빌딩으로 그리고 다시 바윗돌이 된다. 익숙했던 일상적 공간에 낯선 오브제가 등장하면서 시각의 전복성이 환기된다. 정상현은 이중적인 이미지를 통해 평범한 삶에서 불현듯 일어날 수 있는 낯섦, 충격, 당혹 등과 같은 사건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발화지점」은 불타는 집의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제시하는 있는 작품이다. 숲의 어느 곳에서 집이 불이 난 것을 다양한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지만, 이런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핵심은 아닐 것이다. 핵심은 역시 동전의 양면성과 같은 이중적 이미지의 구조이다. 작품 「냉온」은 거대한 바윗돌과 큰 얼음 덩어리가 교차되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냉온」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돌과 얼음을 단순히 번갈아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이중적 이미지의 구조를 환기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 전시『동전의 양면』에서 선보인 작품 「야만과 문명」, 「발화지점」, 「냉온」 등은 이미지가 실재든 가상이든 '본다'와 '안다'가 어떻게 관계하는 지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미지의 이러한 관계성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현실적이다. 예컨대 360도 회전이라든지 기계장치 자체의 소리를 여과 없이 작품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보더라도 작가가 '본다'와 '안다'의 관계에서 공간의 현실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조각을 전공했던 작가의 조형성이 반영된 결과일 터이다.
작품 「60분」은 「데칼코마니」 연작의 또 다른 변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특징적인 한 측면은 웹상에서 떠도는 다양한 숫자 이미지를 화면에 크게 배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계절의 공간성과 시간성을 동시에 강조하려는 것일까? 숫자가 크게 강조되어 있으니 일단은 시간성에 무게를 둔 것 같다. 이 숫자들은 세계를 '알고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숫자들이다. 그러니까 숫자를 아는 것이 아니라 숫자를 보게 된다. 숫자를 본다는 것은 숫자에 대한 시각의 전복을 의미한다. 왼쪽 화면에서 오른쪽 화면으로 가면서 변화의 진행정도가 달라지는 숫자는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는 기호가 아니다. 오히려 이 숫자들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이미지이다. 이렇듯 정상현의 작품은 생각의 드로잉이 만들어낸 이미지 공간의 현실 혹은 가상의 문제를 시각의 전복성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 임성훈
Vol.20101015k | 정상현展 / JUNGSANGHYUN / 鄭相鉉 / video.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