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10_101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영아트갤러리_YOUNGART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2층 Tel. +82.2.733.3410 www.youngartgallery.co.kr
파랑새를 찾는 조각가 ● 미술은 갈 데까지 다 간 것 같다. 이제는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이라는 미적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또는 그에 걸맞은 조형형식을 찾기 위해 고뇌할 필요가 없어졌다. 단지 언어와 아이디어로 이루어진 맹숭맹숭한 텍스트 하나만으로도 어엿한 미술로서 대접받을 수 있게 되었기에 말이다. 또한 흔해 빠진 싸구려 일상 용품이나 유치한 만화 캐릭터가 버젓이 대형 미술관의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집에서 알뜰히 살림이나 할 법한 요조숙녀들이 '타자'니 '몸의 정치학'이니 떠들면서 자신의 성기를 중인환시 하에 뻔뻔히 드러내놓는가 하면, 자기가 성형수술 받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하거나, 징그럽고도 냄새나는 살덩이와 배설물들을 우리들의 코밑에 들이대는 세상이 되었다. 이태리 반도에서는 수증기, 자력, 광물질, 심지어 갤러리 공간 안에서 똥오줌을 갈겨대는 살아있는 말들조차도 미술의 매체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차대전이라는 범죄에 대한 죄의식으로 죽은 듯 숨죽이고 있어 마땅할 몇몇 독일인과 그 주변 인물들은 해괴한 해프닝이나 범신론적 무당 흉내로 혼란을 배가시켰다. 이십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이러한 무질서, 퇴행, 탈경계의 반미학적 행태들은 서로 간의 이종교배를 통한 진화 끝에 통제 불능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을 탄생시켰다. 컨템퍼러리 아트 전반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지나치게 편협하고도 보수적인 시각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모든 예술 장르 중에서도 가장 어눌하고 굼뜬 것이 조각이라지만, 조각이라고 해서 전대미문의 변혁을 향한 질주의 대열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로테스크한 괴물로 변신하고 있는 오늘의 미술에 적응하지 못하고 전통적 미학에 연연하는 것은 시대를 읽지 못하는 아둔함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 모두가 우측통행을 한다 해도 아직 좌측통행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족속도 꽤나 남아있다. 그리고 제 아무리 새것을 좋아하는 시대가 되었다 해도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아서 좋은 것도 있는 법이다. 그대로 남아있는 고향 풍경. 옛 친구의 예전 그대로의 미소...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보수적 가치를 칭송하고, 골동품을 수집하고,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하기도 한다.
이원용의 조각을 보면서 스쳐간 생각들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조각적 가치들을 천착하고,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원용의 작풍(作風)은 그가 성실한 사실주의 작가라는 걸 말해준다. 해부학적 지식과 묘사력에 바탕을 둔 기초조형 능력을 갖춘 연후에야 자신의 개성과 예술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서있는 작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적 태도, 즉 조각에 대한 논의는 우선 전통이라는 견고한 반석 위에 올려놓고 나서 시작하겠다는 태도는 그가 학습한 목원대학의 학풍이기도 하며, 그 학교에 조각전공을 개설한 윤영자 교수의 신념이기도하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꼼꼼하게 빚은 소조상(塑造像)들을 선보이는데 주요 모티브는 동물의 두상이다. 출품된 작품들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첫 번째 그룹에는 울부짖는 비비 원숭이, 포효하는 하마, 조용히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늑대의 머리 등이 포함된다. 이들은 타오르는 분노에 치를 떨거나, 싸늘한 시선으로 그 무언 가를 노려보고 있다. 이들은 각각 교활함, 생명력, 타협하지 못하는 야성을 은유하면서 작가 자신의 심리상태를 대변하고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증오라든가, 힘에 대한 동경, 또는 의연한 독립과 자유에 대한 메타포들이다. 내성적이고도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인 작가에게 있어 자신의 울분을 작품으로 토로하고 승화시키는 방법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두 번째 그룹에는 두루미나 오리, 타조, 닭 등 조류의 머리와 사람의 두상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종(種)임에도 불구하고 목을 길게 늘여서 서로 엉키고 조우한다. 「공존」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새나 인물은 차이와 다름을 극복하고 평화롭고도 행복한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첫 번째 그룹이 매스와 감정표현을 강조하기 위해 안면부만 남겨둔 것임에 반해 여기에서는 유려한 선적 구성이 특징을 이룬다. 세 번째 그룹은 「파랑새」 시리즈로서, 높은 곳을 희원하거나 자유롭게 비상하는 파랑새가 등장한다. 모리스 메테르링크의 희곡 「파랑새」가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곁에 있다는 것을 알라'는 메시지인 것처럼 이원용의 파랑새도 이 순간, 이곳의 삶을 긍정하겠다는 작가의 마니페스토이다. 여기서 이원용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티브들은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한 결 같이 사람의 표정을 닮고 있어서 마치 인물 두상을 보고 있는 듯하다. 첫 번째 그룹이 보여주는 것이 외로운 투쟁과 고통의 외침이라면, 두 번째 그룹은 그것을 극복한 용서와 화해의 윤무이며, 세 번째 그룹은 그를 통한 깨달음의 노래이다. 작가는 이들 동물을 통해 인간사의 애증을 이야기하는 알레고리의 수사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는 MBC구상조각대전의 대상 수상이라는 경력이 증명하듯이 조각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초를 탄탄히 쌓아놓은 작가이다. 그러나 화려한 수상경력과 사실주의적 성취에 그대로 안주한다면 자칫 치열해야할 자기실험을 오히려 느슨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한 가닥의 우려 또한 지울 수 없다. 예술은 평범함보다는 광기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현대미술이라는 괴물, 리바이어던이 지배하는 이 세계는 표현영역의 확장과 더불어 더욱 많은 자유가 허용되었다는 자기도취와 무책임 속에서 끝없이 헤매고 있다. 충격과 센세이션 없이는 미술이 안 돼는 것처럼 생각하는 요즈음의 분위기 속에서, 그리 쉽게 시류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작가의 고집이 오히려 미덥다. 이토록 소박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낭만주의적 조각가를 만난다는 것은 이른 아침의 산책길에서 파랑새를 발견하는 것과도 같은 자그마한 행운이다. ■ 오상일
Vol.20101013i | 이원용展 / LEEWONYONG / 李源容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