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흗날 밤-회화 일별 The Orbit of Painting

2010_1011 ▶ 2010_1022

초대일시_2010_1011_월요일_06:00pm

참여작가 강성은_권오준_김춘미_김현정_김희연_박미례_오용석 윤향로_이민정_이우성_이주리_임진세_장고운_최윤희_황지윤

관람시간 / 11:00am~06:00pm

한국예술종합학교 신관갤러리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서울 성북구 예술길 120-3번지 Tel. +82.2.746.9000 www.karts.ac.kr

열사흗날 밤-회화 일별 The Orbit of Painting한밤에 남몰래 / 벌레는 달빛 아래 / 밤을 갉는다 1)(마츠오 바쇼오, 유옥희 옮김, 『마츠오 바쇼오의 하이쿠』, 민음사, 2005, p. 11.) 4분의 3의 힘 ● 『열사흗날 밤-회화 일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 적籍을 둔 작가 중 회화에 몰두하는 이들의 근작으로 꾸려진다. 전시를 위해 만난 작가들은 여름내 화면과 투쟁중 이었다. 대체로 그 투쟁은 비기거나 지기 십상인데 화면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겨루더라도 물러나야 하는 이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또 사람이 하는 일인데 승리나 극복, 초월 등의 근사한 개념들도 좀 우습게 여겨진다. 근사할수록 흰소리이기 쉬운데 요즘은 사후적事後的이란 말로 복권이나 꾸밈도 성하니 조금은 위안이 될까. 이렇게 쓰면서도 떠오르는 것은 어느 죽은 시인의 시이다. 그는'희망을 심하게 앓고 난 연후라 힘이 없지'2)(진이정, 「나의 희망엔 아직 차도가 없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 2006, pp. 50-52.)라 하였다. 희망을 심하게 앓아보는 것. 그건 열사흗날 밤 즈음에 가능하고 또 특권이기도 하다. 『열사흗날 밤』은 마츠오 바쇼오松尾芭蕉의 하이쿠에서 얻은 제목으로, 보름이 되기 전 차오르는 달과 밤의 정경을 일컫는다. 사위는 환하지만 달이 영글기 위해 하루 이틀 더 기다려야만 하는 상태. 만월의 필연을 향해 소리죽여 가다듬어 나아가는 어느 사이. 막막한 화폭과 반목, 갈등, 소강, 화해를 반복하는 지난한 과정에 있는 작가들의 행보가 오버랩 된다. 이것은 인생 한번일지도 모를 열사흗날 밤이거나 혹은 몇 번의 열사흗날 밤을 보내며 돌아올 밤을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자신과 작품을 대상화하고 있을 이들에게 니체가 말한 4분의 3의 힘을 옮겨본다. '건강한 인상을 주려는 작품은 적어도 그 창조자가 가진 힘의 4분의 3만 보여주어도 된다. 만약 반대로 그가 자신의 한계까지 힘을 기울였다면, 그 작품은 관찰자를 흥분시키고, 작품의 긴장감으로 관찰자를 불안하게 만든다. 모든 훌륭한 것들은 여유를 조금 가지고 있으며 초원의 소처럼 누워 있다.'3)(프리드리히 니체, 김미기 옮김, 『니체전집 8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 책세상, 2002, pp. 74-75.) 초원의 소까지는 아득해도 4분의 3의 힘이란 것이 4분의 4에 근접해 본 생래적 경험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멀리 있다고 얘기하지 말도록 하자. 채움과 비움의 균형점 ● 어느날 검은 색과 노란 색의 안전 패턴이 더 이상의 호기심을 막아서는 김희연의 「바람 한 점 없는」을 보았다. 바닥을 따라 난 크랙과 정문은 아닌듯한 좁고 어두운 통로의 형상을 보며 이제는 거의 사라져간 기억 속 모든 오래된 아파트들을 떠올렸다. 오히려 걷다가 마주치면 실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사각의 프레임을 덧대어 바라보게 되는 그런 광경. 실재하는 이미지를 그린 것이란 사실도 놀랍지만 진위는 차치하고 모든 것이 공허해서 고혹적이다. 얇은 겹으로 덧칠해가는 김현정의 회화는 쓸쓸하면서 아름다운데 그가 '상상적 질감'이라 표현하는 그리기의 방식에는 극단화된 아름다움에 스미는 잔혹이 배어있는 듯하다. 섬세한 붓질로 캔버스 전면에 채워진 공간은 트여있으면서도 심리적 고립감을 준다. 전작들에서 한 채의 주택에서부터 촘촘히 반복되는 공공기관의 정면까지, 건축물의 정면을 정직하게 그리던 강성은은 이제 도시를 소요한다. 하릴없이 걸을 때 발견되는 쇼파 몇 개, 나무 그림자는 이동 중 발견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단서로 남았다. 구도는 시점을 드러내며 대상에 투사한 애정은 화면에서 집중과 이완으로 표현되었다. 화폭을 과감히 등분해버린 임진세의 「함께」는 한낮 한강에서 목격할 만한 장면이다. 벤치의 한 사람. 그 옆의 강아지. 농구 코트 정도로 보이는 빈 광장. 그의 회화에는 원하는 것 한 가지를 얻기 위해 다른 것들은 내려놓는 과감함과 담담함이 있다. 그 하나를 위해 회화에 요구되는 통념을 버리기도 한다.

김희연_바람 한 점 없는 The Air Stood Stil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0 김현정_하얀 단어들 White Words_캔버스에 유채_116.8×80cm_2010
강성은_휴게소 1 Rest Area 1_한지에 먹_72.5×90.5cm_2009 임진세_빛나다, 봄꽃 Glinting Flowers in Spring_캔버스에 유채_80×100cm_2010

당신들의 어둠 상자 ● 네덜란드 헤이그의 파노라마 메스다흐Panorama Mesdag에는 헨드리크 W. 메스다흐Hendrik W. Mesdag가 스키브닝헨 해안을 그린 세로 15m, 가로 120m의 파노라마 풍경화가 있다. 이처럼 360도로 광대하게 그려진 풍경화까지는 아닐지라도 파노라마적 야심이 엿보이는 이주리의 「공사장」은 보는 사람을 통쾌하게 한다. 세차장이나 에스컬레이터 등 속도감 있고 경우에 따라 문명 비판 코드로 확대 해석하기 좋을 소재들을 그는 '그것이 그리고 싶어 그린다.' 비평의 키워드까지 미리 예상하고 작업하는 일부 영리한 작가들과는 달리 그는 표현하고 싶은 것을 그리는데 대신 자신만의 광각 렌즈를 지니고 있다. 입체주의적 파편이나 미래주의 공감각과 영향 관계가 있는 최윤희의 도시 풍경에는 질서와 무질서가 야릇하게 공존한다. 집요하게 배치된 도시 파편들이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요인에는 줌인 줌아웃으로 기워낸 시선이 작동하는 힘이 크다. 이민정의 작품은 주관적 풍경화에 가깝다. 개별의 인식론에 따라 외부 대상을 화면으로 옮기는 다른 작가들 사이에서 그의 작품이 주는 무중력 상태와 같은 인상은 기존의 매뉴얼을 무시하고 자기만의 매뉴얼을 궁리해가는 호기심 많은 이를 연상시킨다. 장고운은 한 장의 사진에서 도려내진 몇 토막 조각처럼 하나로 다시 이어붙이면 어려움 없이 식별 가능할 세상을 각각 100 x 40cm의 캔버스에 옮겨 놓았다. 함께 걸어 대상을 확인해도 그만, 각각 흩어 놓아 편편한 추상으로 인식 되어도 그만이라는 태도는 인식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수긍하면서도 공통감에 대한 기대도 공존하는, 양가적이자 보편적이기도한 마음과 닮아 있다.

최윤희_2010년, 서울 Seoul 2010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8cm_2010 장고은_하나에 의한 둘 two caused by one_100×40cm_2010
이주리_공사장 Construction Sit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324cm_2010 이민정_Polock_캔버스에 유채_145×326cm_2009

알리바이를 찾아서 ● 이우성의 「텅빈 전광판」은 짝을 이루고 있음에도 배경, 구도, 분위기가 다른 두 폭의 제단화와 같은 구성을 띄고 있다. 기호 자체도 지워버리는 강한 불빛으로 인해 인식이 중단 당해야하는 폭력적인 상황 하나와 인식 가능한 대상임에도 불편한 상황 하나가 쌍을 이루고 있다. 한 점만 본다고 해서 불편함이 감소되지 않고 두 점을 함께 본다고 해서 배가되지 않는 불편함 그 자체에 노출되어 작품을 응시해야만 하는 순간에 직면케 한다. 명확하게 보여야 명쾌하다 여기는 사람은 여문 윤곽의 곳곳이 뭉개진 형상들로 이루어진 윤향로의 몬스터 시리즈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백색의 캔버스는 그가 남기려는 흔적을 가장 잘 드러나게 해줄 계산된 장치이면서 믿음의 마지막 보루처럼 간절해 보인다. 가해와 피해 사이가 명확하지 않은 어린애들의 놀이처럼 몰라서 악할 수도 있는 찰나의 단서가 암호처럼 남아서 문득 문득 뇌리에 스친다. 여기서부터는 수수께끼이다. 이제부터 나열하는 것이 실재하는지는 모른다. 공작새에서 철조망으로, 붉고 여린 꽃잎으로, 노루의 얼굴인가, 아니 옥수수의 수염. 점차 빠르게 번져가는 이미지의 파편. 이 모두는 박미례의 작품에서 보고 오해한 것들이다. 의식과 지각, 감정을 쉴 새 없이 따라잡는 그의 작품은 보이는 것들을 독해해야 할지 과정을 읽어야할지 망설이게 만든다. 18점의 녹색 패널과 흰색 패널이 열을 이루는 오용석의 「권태 VS 권태」는 그의 전작에서는 '보였던 것'들이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는 무엇을 보아야할까. 집이면 집, 꽃이면 꽃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그는 이제 보이는 것을 보게 만든다. 추리, 연상, 감상 등 각자는 작품 앞에서 지시하는 바를 찾고자 할 때 미궁에 빠진다. 무엇을 그렸는가가 아닌 왜 그리고 있는지 또 왜 그릴 것인지 이행된 질문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윤향로_Monster-Round Dance_캔버스에 유채_140×160cm_2010 박미례_검은물 밑에서 Under The Black Water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10
오용석_권태 VS 권태 Languor VS Ennui_24×33cm×18_2010 이우성_텅빈 전광판 Empty Signboard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8

구도求道의 회화 ● 그리하여 그 질문에 반응하는 몇 가지 방식을 보자. 회화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가능한 자유롭기를 바라는 제스처는 김춘미의 실험에 드러난다. 그는 틀을 치워버리고 한 면과 마주하는 공식을 우회하면서 실크에 비쳐 겹쳐 보이는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우연의 효과를 취하고 있다. 반대로 권오준의 방식은 종교적이다. 그는-전시에 함께하는 작가 모두가 그러하겠지만-회화를 하나의 매체로 객관화시키지 않고 작가로 살아가는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수행하듯 작업한다. 다음의 두 작가는 이발소그림과 꽃그림이란 통념의 범주에 도전한다. 황지윤은 이발소그림이 지닌 대중성을 피하지 않고 탐구한다. 새롭거나, 진화하였거나 그래서 작가 고유의 사인이 남는 작품으로 평가받을 전략을 버리고 대중의 취향을 역이용하고 있다. 장고운의 꽃그림은 꽃을 그린 꽃그림과 흔하게 보이는 그림을 지칭하는 꽃그림의 통념 사이를 비튼다. 그가 조각 또는 인스톨레이션으로 간주하는 일련의 꽃그림들은 마치 액자 소설의 구조처럼 꽃그림을 그린 꽃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발소 그림이라 칭할만한 밥 로스Bob Ross의 그림을 탐구하면서 시작했다는 이 연작에서 그는 한 사람의 필사경으로 꽃그림을 반복하며 메타회화를 향한 문답을 기록하고 있다.

김춘미_Knee, Forest, 11_실크에 오일 파스텔_가변크기_2009 권오준_깨어진 상 Broken Trophy_캔버스에 유채_180×90cm_2010
황지윤_롯의 증언Ⅰ The Testimony from Lot I_캔버스에 유채_53×72.7cm_2010 장고운_상상의 꽃, 1. Fantasy Flowers_캔버스에 유채_50×35cm_2009

일별一瞥과 일별一別 ● 남몰래 도시를 배회하고 관찰한 어떤 날들의 탐정이 보여주는 수집품, 자신만의 렌즈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사진가의 원판 필름, 치료사와 내담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자들의 감정전이가 기록된 차트, 혹은 수행의 일지. 어떻게 부르더라도 무엇보다 회화작품, 회화. 이것들이 모여서 전시가 된다. 회화 일별은 보는 일별一瞥과 잠시 떨어지는 일별一別이 교차하는 회화의 방식에서 착안했다. 1cm, 10cm, 1m, 10m 그 거리에 따라 다른 것을 볼지도 모를 회화를 위해 갤러리에 작품을 건다. 일별은 회화의 방식 뿐만 아니라 전시에서도 유효하겠다. 한번 보고, 한번 잊자. 다시 볼 때 또 반갑기 위해. ■ 김현주

Vol.20101011i | 열사흗날 밤-회화 일별 The Orbit of Painting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