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풍경-행복했던 시간을 찾아서

2창수展 / LEECHANGSU / 李昌樹 / painting.installation   2010_1007 ▶ 2010_1020

2창수_2010년의 봄 아무렇지 않게 떨어지는 꽃잎Ⅱ_유리판에 아크릴물감_16.5×34×34cm_2010

초대일시_작가 항시 대기

후원_충정북도 문화예술과 협찬_모리스 갤러리

관람시간 / 10:00am~07:00pm

모리스 갤러리_MORRIS GALLERY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 397-1번지 Tel. +82.42.867.7009 www.morrisgallery.co.kr

시공의 간극에서 빚은 이미지와 기억의 집합체-작가 이창수 근작에 대한 소론 ● 1. 천국(天國)은 어떤 모습일까. 성경에 등장하는 말씀처럼 앞으로 있을 영광스러운 신세계의 수도이며 처소(處所)일까, 아니면 작가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가 말한 대로 조금이라도 지옥과 공존하지 않는 그곳이 바로 천국일까. 글쎄다. 본 적도, 가 본 적 없으니 누군들 알 수 있겠나 싶다. 그러나 대략적인 힌트는 있다. 일예로 영화『천국의 책방(Heaven's Bookstore)』에선 100년을 채우지 못한 사람이 죽은 뒤 머무는 공간이 우리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천국이라고 하고, 16세기 플랑드르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Hieronymus Bosch)는 자신의 작품 「쾌락의 동산」을 통해 '진짜 낙원(천국)'의 모습을 그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설정이요, 문맹자들을 계몽하던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믿음직스럽지 않다. 천국의 실체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셈이다. ● 그럼에도 우린 논리적인 판단이나 수학적 이론으론 규정할 수 없는 그 세계를 동경한다. 도식화하거나 확언하기가 불가능한 크기만큼 상상력을 풀어 놓는다. M.C.에셔(Maurits Cornelis Esher)의 작품들만큼이나 생경하면서도 묘한 감정을 유발하는 대상으로까지 삼는다. 그 접근방식이 서로 다르고 내용도 다르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선 작가 이창수도 매한가지다. 무슨 색인지도, 형질은 어떠한지 또한 알지 못한다고 작업노트에 스스로 고백하고 있으면서도 그곳은 즐거울 것이라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어딘가, 아니 가까운 곳에 존재할 것이라며 즐거운 '믿음'을 찾아 떠나곤 한다. 지난 근 1년의 시간이 그랬다.

2창수_천국의 풍경- 부소산성_유리판에 아크릴물감_34×64×14.5cm_2010

2. 큐브 아래 드러나는 근작들에 투영된 이창수의 천국은 기억의 회류와 다름 아니다. 불촉각적인 형상을 통해 현재와 과거를 잇고 당시와 오늘날의 풍경을 비교함으로써 천국의 모습을 찾아간다. 이때 매개 역할을 하는 것, 다시 말해 그 '풍경 찾기'의 여정을 자극하는 것은 몇몇의 오래되고, 현재의 시각에선 누구에게나 약간은 촌스럽다고 여겨지는 사진들과 그 사진 속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가 몸소 다녀온 현장들을 시각화 한다. 「포항 도구 해병대 훈련장」, 「시화부락」, 「부소산성」 등이 그가 스스로 천국을 따라 시공을 넘나든 흔적들이다. ● 작가는 누군가의 인상이나 경험이 배어든 사진들을 단초로 기억을 좆고 사람마다 각자 다르게 받아들이는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 '여행일지'를 작성해가며 의식을 더듬고 그 당시와 동시대 간 달라진 것들을 채록하는 방식으로 그 미지와 조우한다, 이때 천국의 계단이 되는 것은 당연히도 시간이다. 작가는 그것이 지닌 속성을 유리 패널 위에 그리면서 특정한 장소에서 끄집어낸 행복했던 지각과 관념들을 천국이라는 명사로 재구성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천국의 풍경」시리즈이다. ● 근래 등장한 「천국의 풍경」 중 하나는 사진 '포항 도구 해병 수색대 IBS 훈련장'에 등장하는 인물에서 출발한다. 옛 사진 속 주인공은 남모 해병으로, 그가 앉아 있던 자리는 정확히 1988년 여름, 어촌마을이 내려다보이는 포항의 도구 해수욕장과 포항 제철 사이에 있는 해병 IBS훈련장이었다. 최근 다시 찾은 훈련장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어촌마을은 앞서가는 문명의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어촌으로 탈바꿈했고 공평하기만 한 세월의 분동은 남모 해병의 모습도 변화시켰다. 사진 속의 포항 제철만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다름과 같음의 공존, 작가는 시간의 지배가 바꿔놓은 결과들을 새로운 사진과 작품으로 남겼다.

2창수_아무렇게 해도 규칙은 있다_유리판에 아크릴물감_64×34×16.5cm_2010

3. "젊었을 때가 좋은 것이지, 뭐든 다 할 수 있었을 테니깐. 그리고 이건 내가 가장 젊었을 때이고 가장 건강 했을 때야." 남모 해병의 발언은 작가 이창수가 해당 사진을 선택한 이유이기에 충분했다. 그가 말하는 천국은 바로 남모 해병이 무엇이든 자신이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는 노회해진 해병에겐 22년 전의 기억이 바로 천국이었으며, 그것은 다른 말로 회상이요, 향수이며 그리움의 다른 우리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것을 특유의 큐브 속에 가뒀다. ● 또 하나의 흑백 사진 속엔 단정한 의복차림의 어머니와 아들과 딸로 보이는 세남 매가 등장한다. 한눈에도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듯한 배경엔 짚으로 만든 동무 현숙이네 가옥이 보이고 싸리비나 대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것 같은 문이 놓여 있다. 모두가 가난하고 힘들게 살던 우리네 예전, 어느 마을의 풍경과 다르지 않은 살가운 정경이다. ● 이 사진 속 장소는 1970년으로 추정되는 증평읍 '시화부락'으로, 지도를 따라가 보니 현재의 충북 증평군 증평읍 미암 2리를 가리킨다. 당시만 해도 상인들의 말(馬) 때문에 역마촌을 이뤘던 고장이요, 오랜 세월 간직해온 다양한 전설들이 아이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정다운 곳이었단다. 하지만 문명은 선후변별을 명확하게 만들어 놨다. 현숙이네 집은 슬레이트로 바뀌었고 마을 주변의 농토와 산들도 새로운 개발의 논리에 힘없이 사라져 완전함을 찾긴 힘들었다. 하지만 세 남매가 자란 기억 속에서의 그곳은 여전히 아름다운 천국이었다. 과일이 흔치 않던 시절 뽕나무 열매를 따다 아이들에게 주려 해도 열매를 따는 족족 먹어버리곤 해, 아무리 따도 그릇에 차지 않는다하여 꾸지람을 듣던 그들의 기억이 곧 그 세 남매에겐 다시없는 천국이었던 것이다. ● 같은 맥락에서 「부소산성」의 회상을 담은 사진도 같은 순연을 거친 것이다. 이것 역시 그 주인공들에겐 천국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사진 속 인물들이 사진에 찍혔던 시간엔 충분히 천국 모습을 느꼈을 것이라 믿는다."는 작가의 추측처럼 말이다.

2창수_무질 량의 수박_유리판에 아크릴물감_64×34×18.5cm_2010

4. 작가는 훌쩍 성장해 환갑을 넘나드는 오늘에 이른 세 남매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자리를 유리벽에 담는다. 「시화부락」이라는 실마리를 토대로 남다른 기억을 간직한 곳이자 가장 행복했던 곳을 일일이 새겨 넣는다. 9남매를 키우며 많은 고생을 해야 했던 사진 속 자제들의 어머니가 살던 곳을, 동무와 뛰놀던 곳을 겹겹이 유리판에 새겨 넣는다. 다분히 정신적인 것을 물질화함으로써 변화한 것과 영원한 것을 동시에 공유케 한다. 물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기억의 시각매제들은 단순한 물질이 아닌 타자의 삶을 담은 저장소로 기능한다. 이것이 이창수 근작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이다. ● 결국 이창수의 이번 전시는 시간을 타고 흐르는 기억이라는 전류와 급변하는 시대에서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서술하는 기록자의 역할로 함축할 수 있다. 귀납적으로 다가선 다큐멘터리와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그런 연유에 기인한다. 실제로도 이창수의 근작들은 시차를 뛰어 넘은 동일 인물을 화자로 내세워 그 간극을 측정하고 주위 환경의 변화를 통해 기억을 재생시켜 현재를 되짚는 고리로 작용한다. 따라서 '천국의 풍경 여행'이라 이름 붙였지만 그것은 곧 동일과 차이의 사이에 존재하는 순간의 지연을 목적으로 함을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다. ● 헌데 작가는 천국이라는 의미를 사진 속 인물과 함께 풀어가며 작가와 대상인물과의 정신적인 소통을 수반하는 전개 속에서도 변화의 수레를 구동시키는 시간에 관한 당위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어쩌면 순연일 수밖에 없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 그래서 그럴까. 그의 작품들은 일견 비판적으로 비춰지곤 한다. 이 시점에서 다소 흥미롭게 다가오는 건 미술사적 맥락, 사회적 맥락, 역사적 맥락, 환경적 맥락까지 그의 시각이 머무는 곳이 이미지의 다양성에 버금갈 정도로 매우 파편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술사에 엄청난 테러를 가한 후 말년에 체스와 낚시를 즐기다 갔던 마르셀 뒤샹을 염두에 둔 듯한 2009년 작 「뒤샹의 체스-고등어와 기구」를 비롯한 「뒤샹의 체스」시리즈만 봐도 그렇고 「인위적 자연 시각」과 같은 근작을 봐도 그렇다. 단순한 사물의 이질적 배치가 아닌, 패러독스를 통한 비판과 제의에 무게가 치환의 성격을 지닌 사물에 각각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번에 선보이는 「천국의 풍경」 연작도 같은 범위에 놓아 무리가 없다. ● 한편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옛날 사진과 오늘 촬영한 사진을 대조시키는 행위와 실존 인물을 통한 기억의 환류를 작품으로 한다는 점에서 과거보다 진보해 있다. 「무가치를 가치 있는 것으로 하는」, 「아름다운 꽃」 등의 작품들 보다 진화해 있다. 다만 궁극적으론 현실을 거점으로 한 존재의식과 그것을 따르는 산물에 대한 나열이라는 점에서 2009년 이전과 변함없는 소실점을 향하지만 확실히 결과물보단 프로세스에 더욱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차이는 체감할 수 있다.

2창수_인위적 자연 시각_유리판에 아크릴물감_34×20.5×34cm_2010

5. 그의 신작을 관통하는 포괄적 관념은 "사진 속 그들이 말하는 다양한 천국의 풍경을 본 전시를 통해 직접 보도록 한다."는 것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사회에서 말하는 발전이란 무엇인지, 그 줄기인 시간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눠보자는 의도 역시 배척하지 않는다. 이를 형식적인 도식으로 보면 시간성 자체에 골몰하던 예전 작업의 연장이며 고유성의 지속과 적응의 배제 사이에서 고민했던 시절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무가치적인 것과 가치적인 것 틈에서 엿보이는 아주 사소한 것들을 발견해 조형화 하는 방식 면에서도 답습은 이어진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 이제 물자체보다는 과정에 보다 심혈을 기울이고 있음은 근작이 지닌 뚜렷한 변별력이다. ● 그럼 그의 시각체들, 매끈한 판과 판을 오가며 부유하는 생선, 과일, 꽃, 곤충, 무기물 등의 이미지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며 그에게 무슨 뜻인지 조금 들여다보자. 첫 번째, 우린 이창수의 작업으로부터 약간의 혼란에 노출됨을 쉽게 인지한다. 왜냐하면 조각인지, 설치작품인지, 회화인지, 오브제로 머무는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여기다 개념의 연속인지 아니면 새로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난해함을 겪는다. 결과부터 말하면 그의 작품들은 조각이요 설치이며 많은 공을 필요로 하는 회화이자 관객참여를 통해 작품이 능동적으로 바뀌는 행위예술이기도 하다. ● 그러나 이창수의 작업은 관객참여가 특정한 행위로 전개되길 바란다기보다는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브리지 역할을 하는 선에서 멈춘다는 점에서 귀결까지 요하는 일반적인 퍼포먼스와는 다소 간의 차이를 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자신 또는 다른 누군가의 경험을 공유케 한다는 사실이며, '어떤 시각에서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에 놓인 의미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생선, 과일, 꽃, 무기물 등의 이미지들도 의미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상징적 기호이며 유리판의 특성상 현존성을 지니면서도 반드시 명징한 목도를 증명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시간의 궤를 돌아 일궈진 '천국의 풍경 여행'과 동일한 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 우린 혼란을 극복한 이후 두 번째로 판형의 유리 패널을 자른 뒤 그 위에 일정한 이미지를 손으로 그리고, 이를 다시 일정한 틀에 맞추는 공을 떠올린다. 좌우, 위-아래 시선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형상을 만들기 위해 그러한 과정을 숱하게 반복하니 예사롭지 않은 일임을 어렵지 않게 숙지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맥도널드 로고가 피어있는 식물 작품처럼 누군가의 시선이 작품을 완성하는 구성요소로써 중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수순에 접어든다. 이어 최종적으론 사적이면서도 사회적, 역사적 테마를 주요 화두로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그의 작품 구석구석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역시 이창수 작품에서 획득 가능한 흥미로움이다.

2창수_나무 대피소_유리판에 아크릴물감_24×20×14.5cm_2010
2창수_천국의 민들레_유리판에 아크릴물감_20×24×14.5cm_2010

6. 우리네 삶에 부유하는 다양한 것들에 대한 회고를 오늘에 반추해 새로운 의제를 도출시킴으로써 작가적 가치관을 고정시키고 있는 이창수의 작업은 투박한 제작 과정이나 큐브를 감싸는 나무 프레임의 단단함만큼이나 무뚝뚝하게 다가오는 측면이 있다. 붓 자국 선명하게 툭툭 내던지듯 그려진 회화적 요소들도 기계적인 세련미와는 거리를 둔다. 그러나 그 내부엔 인간의 기억과 삶의 여정, 환경을 비롯한 역사까지 다양하게 함유한 메시지를 완성하려는 따뜻한 감성이 녹아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창수의 작업을 고찰할 때 얻을 수 있는 긍정성이다. ● 한편 그의 작품을 두고 누군가 개념에서 시작해 개념으로 끝을 맺는다고 하던데, 그것은 맞지 않다. 창의에 보편적 지식을 대리한 개념을 들어앉히는 것은 바람직한 적용이 아니다. 개념에서 새로움이 나온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가당한 논리가 아닌 탓이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그의 작품들이 개념의 문제가 관여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 보단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여러 방식으로 직조할 따름이며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들(현상을 포함해)에 대한 주의 깊은 언어를 내놓고 있는 게 맞다 여긴다. 허나 이것이 그의 장점이지만 여러 것을 원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미술에선 되레 과제라는 것도 간과하긴 힘들다. ■ 홍경한

Vol.20101010b | 2창수展 / LEECHANGSU / 李昌樹 / painting.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