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異熟 VIII

김주연展 / KIMJUYON / 金周姸 / installation   2010_0403 ▶ 2017_0422

김주연_이숙異熟VIII-오이배양_PVC, 오이, 스텐 링, 유인줄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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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0_0403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8:00pm

롯데갤러리 광주점 LOTTE GALLERY GWANGJU STORE 광주광역시 동구 대인동 7-12 광주은행본점1층 Tel. +82.(0)62.221.1807~8 blog.naver.com/glotteart

김주연의 「異熟」: 생태미술에서의 치유 혹은 죽음충동'재현된 자연'에서 '관계적 자연'으로 60~70년대 대지예술과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에서부터 닐스 우도(Nils Udo), 챨스 시몬즈(Charles Simonds), 볼프강 라이프(Wolfgang Laib) 같은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장소나 식물을 예술에 활용하는 것은 오늘날 보편화 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구체적 방법은 단순히 자연 속에 예술작품을 설치하는 것에서부터 자연의 변화과정 자체를 예술로 생각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또 예술가가 생각하는 '자연의 의미' 역시 단지 '야외'를 의미하는 것에서부터 환경과 생명에 대한 생태주의 사상을 의미하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작가에 의해 재해석되는 원재료나 차용되는 오브제 정도의 기능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예술이란 것이 엄연히 문화라고 하는 '상징적 약호(code)의 영역'임을 감안할 때, 위의 사례들은 '자연과 문화의 부분적인 만남' 정도로 기술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페미니즘 문화이론에서 보편화된 이론적 쟁점에 비추어 본다면, 예술에 있어서의 자연은 단지 '예술의 영토 내부로 흡수된 자연'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자연은 '재현된 자연', 또는'미학적인 자연'(미적인 감상의 대상으로 한정된)에 불과하게 되며 문화의 의미화 체계 속으로 곧바로 흡수되게 된다. 그로부터 예술 속에 도입된 자연은, 모순된 표현이지만 "예술을 통해 다시 자연이 되기를 기다리는" 이상한 미완성과 부재의 영역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여전히 자연이 '형상과 질료', '실물(참조물)과 재현'이라는 서구 형이상학의 위계질서와 인간의 언어적 문화 속에 종속됨을 의미한다. 문화의 체계, 언어를 통한 재현은 그것에 의해 설명되지 않은 부분, 즉 초과된 잉여분은 삭제해 버리고 무의미의 영역으로 배제해 버리는 속성을 갖는데, 이것은 소위 구조주의 이론에서 말하는 '정상화'(normalization)의 기능이다. 그 삭제된 잉여분이 바로 자연 또는 '실재'(The Real)의 영역으로서, 우리의 언어나 사유로는 영원히 이해될 수 없는 미지와 불가능성의 영역이다. ● 바로 이 점에서 김주연의 「이숙(異熟)」 작업이 갖는 접근법의 특징이 드러난다('이숙'은 다른 형태로 성숙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불교용어임). 이 작업은 좁은 의미에서의 '생태주의'라는 명료한 주제의식을 갖는 작업이지만, 그 이전에 좀 더 근본적 관점에서 보면 자연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나 미학적 변형을 가능한 한 멀리 하고, 그 이전에 '자연 그 자체의 생성과정' 그리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보편적인 공생적(共生的)관계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한 시도라고 생각된다. 오이를 배양한 이번 전시를 비롯하여, 「이숙」 연작에서 그녀는 매화나무, 고구마, 씨앗 등이 배양되고 발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배양된 후 음식물로 섭취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입양되기도 하고, 또 단지 전시장이라는 공간을 빌렸을 뿐 예술적으로 가공되지 않은 식물의 자연적인 모습과 그리고 그 식물과 인간 간의 공존의 관계가 그대로 제시된다. 이 경우 인간주체와 자연과의 거리는 매우 좁혀지거나, 나아가 양자 사이에 실제적인 공생, 연루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주체와의 거리가 소멸되고 상호 간에 포섭된 대상은 재현될 수 없다. 여기서 자연은 최대한 非-문화화,非-코드화되고 非-재현적인 상태에 가깝게 주어진다. ● 경작과 수확, 섭취, 타인에게로의 증여와 퍼뜨림의 실질적 과정, 이러한 면은 김주연의 「이숙」 작업을 사실상 생태주의적 과정예술(프로세스 아트)로서 뿐만 아니라, 나아가 작가의 실제적 행동과 생각, 작가와 타자 간의 사회적 관계와 사건들까지도 작업과정에 함께 포함되는 개념예술로, 그리고 평론가 니콜라 부리오(Nicholas Bourriaud)가 주조한 용어를 빌자면 일종의 '관계적 예술'(relational art)의 한 양상으로도 규정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따라서 이 작업에서는 단지 자연이나 생태를 미적으로 승화시키는 대신, 그 자체를 키우고 먹고 타인에게 배포하는 사회적 관계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김주연_이숙異熟VIII-오이배양_PVC, 오이, 스텐 링, 유인줄_2010
김주연_이숙異熟VIII-오이배양_PVC, 오이, 스텐 링, 유인줄_2010
김주연_이숙異熟VIII-오이배양_PVC, 오이, 스텐 링, 유인줄_2010

생태주의라는 진부한 '의미' ● 김주연의 작업은 보통 생명과 환경의 되살림 같은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의 가치관을 환기하려는 작업으로 많이 이야기 된다. 물론 그러한 해석은 두말할 나위 없이 타당해 보인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생태사상 전반이 그렇듯이 정치사회적 변혁의 사상의 문제로 비약해 작품을 해석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의 사물을 특정한 의미나 서사적 이야기의 맥락에 연관시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심지어 진부한 일이기까지 하다. 어차피 사물의 '의미' ― 기호학에서 '씨니피에'(記意)라고 부르는 것 ― 란, 정신분석학자 자끄 라깡(Jacques Lacan)의 이론을 빌어 정의하자면 "우리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구축하고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 내는 '상상계'의 산물" 정도가 아니겠는가. 그건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물질로서 존재하는 작품(혹은 자연)을 대면하여, 의미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학적 발상에만 전념한다면, 그것은 그 대상에 자아를 강요하려는 주체의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작품이건 자연이건 그것이 생태주의와 관련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과정과 실천의 와중에서만 실행될 뿐이지, 결코 '해석과 의미'로서 우리의 지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형식으로서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反생태주의적 사유일수도 있다. ● 자연은 생태주의 사상의 선전도구나 포스터 대용물이 아니다. 생태주의적 작가는 '물질과 몸의 경험'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오이나 씨앗을 재배하는 이러한 시간적, 신체적 행위의 과정에서 우리가 제기해야 질문은, 그러한 행동을 행하는 주체의 '가장 직접적인 심리적 동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사물을 해석하기 이전에, 오이 혹은 자연으로의 나를 복귀시키고, 자연과의 신체적 물질적 접촉으로 나를 끌고 가는 내 몸의,혹은 무의식의 동기, 충동, 욕망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와 자연과의 '관계' 자체를 회복하기 위한 첫 번째 물음이 되어야 한다. 자연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의미 자체를 변화시키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김주연_이숙異熟VIII-오이배양_PVC, 오이, 스텐 링, 유인줄_2010
김주연_이숙異熟VIII-오이배양_PVC, 오이, 스텐 링, 유인줄_2010
김주연_이숙異熟VIII-오이배양_PVC, 오이, 스텐 링, 유인줄_2010

전적으로 이질적인 혹은 성스러운 차원 ● 「이숙」작업은 '다른 것이 됨', 즉 생성을 그대로 목격하고 따라가고, 때로는 흡수하기도 하는 시간적 과정이다.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자연이란 것은 그 자체가 순수한 '이탈'(deviation)의 세계라고 말했다. 자연에는 정상적 규범이란 것이 없고 인간적 언어와 상징, 진리를 전적으로 벗어나는 세계이며, 그런 의미에서 바타이유는 진정한 의미의 자연은 전적으로 이해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전적으로 이질적이고 불가능하고 非상징적인 세계라고 보았다. 그는 이를 '헤테롤로지'(heterology, 異種學)의 개념과 연관시켰는데, 이것은 기존의 종교와 신학적 사유의 한계를 넘는 진정한 의미의 '성스러움'(the sacred)의 차원을 의미한다. 그것은 전적인 타자성(이질성)의 차원으로서, 결코 우리가 소유하거나 완전히 그 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 차원이 아니며, 오직 우리 자신의 이성이나 문화적 질서의 소멸, 의식을 파멸시키는 공포, 무의미나 죽음으로의 접근을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는 차원이라고 하였다. ● 식물 키우기 그리고 이것과 관계 맺기, 이러한 이숙의 과정은 인간의 사유와 의식의 '작은 소멸 혹은 죽음'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물론 식물은 생명을 가진 존재이지만 그것은 다른 생명, 다른 유기체, 다른 존재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는 없는 결여(缺如)'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단지 문화에 대립되는 별도의 영역이라기보다는 문화를 삭제 혹은 결여의 상태로 전복하는, 나아가 우리 의식 속에서의 상징의 생산 자체를 와해시키는 '무의식적 불안'의 원인이며 대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또한 라깡이 문화와 언어를 '아버지의 법'의 산물이라고 정의한 점을 상기한다면, 오이와의 직접적인 접촉은 바로 그러한 아버지적 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전복적 충동이며 여성적 쾌락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 오이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미록 미미한 강도이지만 이질적이고 불가능한 세계의 경계에 미세한 공포감으로 가지고 다가가는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재배와 이숙의 과정 속에는 식물을 향한 조건 없는 낭비 혹은 증여, 소위 바타이유가 '데팡스'(dépense)라고 표현한 행위가 발생한다. 데팡스는 자기가 보유한 에너지를 목적없이 타자에게 증여하거나 소모, 낭비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것은 가두어진 힘, 혹은 '나'라고 하는 가두어진 존재를 방출, 해방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아, 진리, 믿음, 문화, 질서, 성적 차이, 이 모든 남근적 질서들은 결국 넘치는 생의 에너지에 의해 무너지고 방출되게 되어있다. 가장 극단적인 데팡스의 행위는 바로 죽음, 즉 자아를 소모, 해방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데팡스에는 죽음충동이 내재한다. 「이숙」과 같이 여성적인 작업이 주는 평온함과 온화함 저변에는, 인간 자신의 동질성을 조금씩 비워내고 해체하는 데팡스의 쾌락이 있다. '불안의 대상'에 접근해서 의식상태에서 죽음의 쾌락과 평온함을 얻는 극단적 형식이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바타이유가 에로틱한 '내적 체험'(expérience intérieure)으로,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라깡이 '향락'(jouissance)으로 부른 그런 경험이다.  

김주연_이숙異熟VIII-고구마배양_PVC, 고구마_2005

치유와 죽음충동 ● 결국 오이를 재배하는 과정은 자연으로부터 어떤 의미나 사상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만일 그렇게 시도한다면 「이숙」은 단지 자그마한 예술이나 사상에 봉사하기 위한 이국풍(exoticism)의 볼꺼리, 자연의 재현, 화방의 미술재료, '이숙'이 아닌 '같게 됨'일 뿐이다. 오직 '다름',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어야 한다! '의미와 가치의 죽음', 더 나아가 '우리 의식의 작은 죽음'을 통해 우리 자신 속의 타자인 '무의식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야 말로 이숙과 같은 식물재배 작업의 진정한 쾌락('가치'가 아닌)일 것이다. ● 이러한 면들은 「이숙」작업 이외에도 버려진 오브제나 장소를 재발견하고 재구성하는 김주연의 다른 작업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물결」(1998)은 작가가 독일 플루쇼우 성 부근에서 발견한 녹슨 채 버려진 잡다한 금속 오브제들을 모아서 나룻배 형태로 재배치한 작업이다. 「버려진 은행나무」(2003)는 영은미술관 주변에 버려져 있던 은행나무를 전시장 안에 옮겨 놓고, 은행나무를 발견한 현장사진, 은행나무에 관련된 다양한 전설, 텍스트 등을 함께 설치한 작업이다. 「유물 Ⅳ」(2009)은 중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의 재개발 지역에 버려져 있던 그릇들을 수거해 찬장에 모아 진열한 작업이다. ● 버려진 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삭아가는 물건들이 지닌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상징적 의미 그 자체의 소멸, 달리 말하면 의미가 있었다는 흔적 — 많이 인용되는 퍼스(Peirce)의 기호학 개념을 빌면 바로 index라는 것, 즉 '흔적'으로서의 기호 — 이라는 점이다. 과거에 그것들은 인간의 문명 속에서 엄연한 가치와 용도를 가졌던 사물들이지만, 버림 받은 지금에는 '온전한 사물'의 영역으로부터 배설물이나 썩어가는 시체처럼 괴기스러움의 영역으로 진입한 사물들이다(극장가 벽 위에 남아있는 뜯겨져 나간 지저분한 광고포스터 잔해를 긁어 내어 전시한 자끄 빌르글레 Jacques Villeglé, 레몽 앵스Raymond Hains 등의 작업을 상기해보라). 배설물이나 괴기스러운 것의 의미는, 다름아닌 '정신적 의미의 무의미로의 전락', '비천한 상태로의 전복', '소멸과 죽음'이다. 이것은 포스트모던 미술이론 일각에서 소위 '엔트로피적 이미지'라고도 하고 — 엔트로피(entropy)는 덧없음, 필연적 변질을 의미하므로 — 다른 한편에서는 '불안한 괴기스러움'(Unheimlich, uncanny)이라고도 부르는 면이다. 죽은 지인의 시체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기괴함, 바타이유가 예로 들었듯이 옷장 구석에서 우연히 튀어나온 아주 오래 전에 신던 말라비틀어진 신발, 이런 사례들은 배설물, 기괴함, 그리고 이숙에 관련된 경험들이다. ● 버려진 것을 복원하는 것, 이것은 사회적으로는 작은 것, 약한 것, 고통에 대한 사랑과 치유로 '상징화'되지만, 바로 그러한 상징적 행위를 추구하는 무의식적 동기에는 죽음충동으로 정리되는 반복적이고 거부하기 힘든 쾌락의 동기가 작동하는 것이다. 물론 회복과 치유 자체가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일단 그 상처와 죽음의 현장, 즉 부패나 배설물로 '강박적으로 되돌아가는 일종의 자동적 반복'의 정신병리 속에 우리가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인간은 누구나 이미 항상 그런 상태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태주의적 행동이란 바로 죽음 가까이 가는 과정, 낯선 타자의 영역에 가까이 가는 과정을 의미할 수 밖에 없다. 생태, 죽음, 타자의 개념, 그리고 이러한 모순적 구조를 경유하는 반복적 쾌락으로서의 향락(jouissance)의 개념은 이렇게 하나의 축 위에 배열되는 것이다. ● 생태의 본질은 죽음을 지향하는 것이다. 삶 그 자체는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삶의 치유의 원천도 아니다. 죽음과 타자야 말로 생의 회복과 치유의 원천임을 바타이유는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의 긍정"이라는 표현으로 강조하지 않았던가. 단지 "더 많은 작황", "더 안전한 식품", "더 세련된 웰빙", "더 길어진 수명", 이런 것만 강조하는 명제들은 생태주의나 페미니즘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없어야 할) 사치스런 환상이요 인간중심주의의 극치일 뿐이다. '타자'라고 하는 위험하고 억압된 트라우마에, 타자가 환기하는 죽음의 공포감에 가까이 갈 때에만, 나 스스로 생태주의적 되살림과 회복을 실천(상징이 아닌)하게 된다. 평화스러운 「이숙」은 바로 그러한 극한과의 조용한 만남이다.  ■ 김원방

Vol.20101004j | 김주연展 / KIMJUYON / 金周姸 / 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