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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930_목요일_06:00pm
지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_충청북도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PICI_GALERIE PICI 서울 강남구 청담동 122-22번지 Tel. +82.2.547.9569 www.galeriepici.com
적막(寂寞)-묵은 빛의 풍경 ● 화면에 넝쿨이 흐늘거리니 그것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람소리려니 여기고, 어우러진 꽃잎들이 어연번듯하니 그것은 대지를 비추는 빛이 있어 그러려니 여긴다. 하지만 유심히 보자면 어디에도 바람 한줌 없고 가느다란 빛 줄기 하나 비집고 들어올 공간이 없다(이따금씩 멀리 달이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무망하다). 여백이라 할 빈 틈도 없이 어둠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바람은 단지 기색일 뿐이고 허공은 어떤 여운도 없는 진한 먹빛이다. 이런즉 화면의 넝쿨이나 꽃잎의 색도 어슴푸레한 자취로서만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하여 그 먹빛에 갇혀 대상들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형색이니만큼 존재의 질서는 기존 수묵의 세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된다. 여기에서 희미한 존재와 극대화 시킨 먹빛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과 길항작용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게 마련이다. 이는 서정적 실체를 넘어 하나의 의미로 이어질 수도 있음이다. 재언하자면 박진명의 작품은 서정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추후 의미론적 존재를 궁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동양의 수묵은 존재를 잠재형상으로 드러내고, 존재로서 잠재형상을 삼투하여 표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존재와 가능적 존재의 관계를 화면에 표출하는 기법, 즉 '형태에는 결락(缺落)이 있어도 의미에 결락이 없는 것'이 수묵의 진면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진명이 그려내는 존재들은 희미하기는 하나 그 개개의 형체가 너무나 여실하여 어떤 개념적 해석의 침투도 허락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게다가 그의 작품이 흔히 일획과 여백으로 흥취를 더하는 수묵이 아니라 사방 묵직한 먹빛으로 온통 채워져 있고 정연한 분위기마저 흘러 미적 숭고함마저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작품의 명제로써 'shimmery-photogene', 즉 굳이 번역하자면 '희미하게 반짝이는 잔상'이라 쓰고 있다. 잔상치고는 너무 정치하게 그려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것이 분명 실체의 형상임에도 잔상이라 이름하는 것은 형(實體)과 상(虛體) 중에서 작가가 상을 중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불어 이는 단순히 밤에 드러나는 풍경이라는 시각적 현상을 넘어 존재의 경향성과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언뜻 '시가 어찌 글자를 쌓아 놓은 것이겠는가?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야' 한다는 유우석(劉禹錫)의 생각과 닮아 있어 흥미롭다. 표피적 실체를 잊고 뜻을 구하자는 말이렷다. 박진명의 작품은 이런 사유를 정갈한 화면과 묵은 빛을 통해 적절하게 구체화시키고 있다. 여기서 묵은 빛은 외부의 빛이 아닌 화면 자체에서 스스로 발하는 개념적 먹빛을 말함이다.
실상 짙은 어둠 속에 보이는 실제 존재는 분명 화면의 그것들처럼 정치하게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17세기 화가 이징(李澄)의 '검은 산수화'를 떠올려본다면 박진명의 작품이 추구하는 바를 간파할 수도 있다. 이징의 '검은 산수화'와 박진명의 화면은 먹을 금같이 아낀다는 강령을 신념으로 했던 송대 화가들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 작품들은 먹이 갖는 중용의 미덕을 유린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허나 이런 어둠을 통한 존재의 정치함과 어렴풋함의 이중성은 '은폐된 것의 생명력', '낮아지는 것들의 아름다움' 등을 설파했던 장자의 '양행(兩行)'에서 세계관적 토대가 되고 있는 '반연(反衍)'의 사유적 지평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예컨대 박진명에게 있어 형상은 존재와 직접적으로 상응한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응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투사되느냐 하는 점이다. 이것이 저것에서 비롯되고, 저것이 이것에서 비롯되는 반연의 세계에서 한갓 사물이 모든 것에 상응하는 존재로 대체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의 대소나 태세, 강약, 상하, 미추 등은 중요하지 않다. 한편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지만 소유하지 않는 여백과 달리 이 먹빛의 어둠은 모든 것을 은폐하지만 그 존재의 생멸을 관장하지는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박진명은 희미한 사물의 존재를 통해 자연의 상실되지 않는 강한 생명력을 포착하고자 한다. 더불어 작가는 그 생명력 위에 자신의 또 다른 의지를 중첩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마치 잔상이 허위가 아니라 의미상으로 떨쳐버릴 수 없는 존재의 견고한 선형상임을 암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성찰에 이르면 그가 그리는 것이 꽃이나 넝쿨이 아니며, 그것이 반드시 꽃이나 넝쿨 더더욱 매화가 아니어도 좋다. 이는 그저 매화와 넝쿨을 부려 존재의 결여태로서의 잔상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의 희미한 잔상을 빌어 본래의 뜻을 탐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운필의 파격이나 형태의 정밀한 묘사를 억제한 작가의 고뇌 이후에 이룩해낼 수 있는 세계이다.
박진명은 이렇듯 서로 마주하는 것들을 조화롭게 화면에 안치시킨다. 우리가 벗어나고자 하지만 매료될 수 밖에 없는 서로 상이한 것, 모순되는 것, 서로 충돌하는 것을 한 화면에 모아 아우른다. 정치한 것과 흐릿한 것, 집중과 이완, 엉킴과 설킴, 예리함과 둔중함 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화면은 어떤 동요도 일지 않고 정돈의 상태를 나타내며 군더더기가 없이 평온하고 차분하다, 더 나아가 적막에 이른다. 따라서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형상은 은근하게 변화하며 서서히 움직인다. 조금씩 변모하기에 박동을 느낄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시선을 붙잡는다. 우리는 그 생성적 형상을 어렴풋이 볼 수 있다. 그 형상은 회피하는 듯 희미하지만 예측가능하고 감지할 수 있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달 항아리 형태 속에 부감된 듯한 매화는 고요함과 담박함 속에서도 그 본색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는 드러냄으로써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날 수밖에 없어 드러나는 존재형상, 즉 자신의 존재 자체를 끊임없이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재필선(意在筆先)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박진명은 외관상으로는 새로움을 담보하는 필묵의 파격이나 기존 관성에서 벗어나는 재료나 소재를 도입하거나 탐닉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젊은 세대들에 의해 방기되다시피 한 전통적인 관념이나 재료에서 응축된 탄성을 끄집어 내 독특한 관념적 풍경을 추구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형상과 먹의 임계점에 다다르지는 않는다. 이는 기실 절제된 형상과 정제된 먹빛으로도 동양의 이상적 관념을 구현할 수 있다는 신념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에서 완결된 문제란 있을 수 없다. 항상 다시 시작할 문제가 있을 뿐이다. 작가도 이를 통찰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는 그 통찰을 공유하면서 작가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르며 어디로 향하는지 추적하고 재음미해야 한다. ■ 유근오
Vol.20100929j | 박진명展 / PARKJINMYUNG / 朴眞皿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