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10_0911_토요일_04:00pm
주최/기획_빛뜰갤러리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빛뜰_bdgallery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226-5번지 2층 Tel. +82.31.714.3707 www.bdgallery.co.kr
인용1. 이론을 경험 학문이 문전박대하면 이론은 유령처럼 굴뚝을 타고 들어와 가구를 뒤집어엎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아주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론 학문이 역사가 취급하는 것과 동일한 현상을 다루면서도 역사를 문전박대하면, 역사는 쥐 떼처럼 지하실로 기어들어와 집의 바닥을 갉아먹는다는 말도 있는데, 이 또한 똑같이 사실이다._에르빈 파노프스키, 「시각예술의 의미」
인용2. 희망의 나라로 /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 산천경개 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 /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 찬 곳, 희망의 나라로. // 밤은 지나가고, 환한 새벽 온다, 종을 크게 울려라 / 멀리 보이나니, 푸른 들이로다, 희망의 나라로 /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 찬 곳, 희망의 나라로._현제명 작사, 작곡
어느 멋진 날 ● 먼저 첫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습관처럼 리모컨을 들어 TV를 켠다. 그리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몇 걸음 옮겨 컴퓨터 본체의 동그란 은색 파워 스위치를 눌러 부팅 시킨다.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거금을 들여 샀던 LCD TV로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 외교장관 회의에서 천안함 사건과 관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성명을 지지하면서도 공격 주체를 북한이라고 명시하지는 못했다는 외교부의 공식 발표를 들으면서, 컴퓨터 모니터로는 온라인 신문의 기사들을 훑어본다.
아파트의 전체 공간 중에 주방과 베란다를 포함해 길이로는 약 10미터, 넓이로는 5미터 가량의 직사각형 모양인 거실이 대부분 삶의 본거지다. 출입문을 기준으로 볼 때 왼쪽에는 TV와 컴퓨터와 모니터, 우퍼와 스피커, 복합기가 있다. 그 주변으로 붉은색의 멀티버튼 마우스, 은색의 Canon EOS DSLR 과 IXY 디지털 카메라, 카드 리더기, 노란색 CF카드, 파란색 SD카드, USB 메모리 몇 개와 같이 자질구레한 주변기기들이 뒤죽박죽 놓여 있다. TV 맞은편에는 밤색 기운이 도는 짙은 회색의 제법 부피가 큰 소파가 놓여있다. 몸만 빠져 나온 소파 위에는 탈태한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 같은 이불이 흐트러져 있다. 이불에는 지난 밤 뒤척임의 흔적들이 또렷한 형태로 새겨져 있고 땀 냄새가 기억의 잔상처럼 짙게 배어있다. 꿈속에서도 부자왕과의 혈투는 계속됐을 것이다. 지휘의 외침을 통해 6분간 생명력을 증가 시키고, 피분으로 분노를 확보하고, 전투 시작과 동시에 격노 켜고, 영투를 던짐과 동시에 돌진 박고, 방밀을 넣어 초반 어그로를 충분히 확보 하면서 동시에 키보드의 방향키를 조작하여 공대원들이 효율적인 딜링을 할 수 있게끔 부자왕의 머리를 돌려 탱킹 위치를 잡고, 이왕에 맞는 거 쫌 덜 아프게 사기를 외쳐 부자왕의 물리 공격력을 저하시키고, 천둥을 때려 공속도 늦추고, 활성화 될 때마다 복수 넣어주고, 영격과 방가를 유지하면서, 어그로 높은 딜러에게 경계 주고, 분쇄를 넣어 파열 데미지를 높이고, 튀는 어그로는 도발의 일격으로 잠시 붙잡아 놓고, 그래도 튀면 봉쇄, 가막으로 달려가 대신 맞아주고, 순식간의 끔살에 대비해 마우스 포인트는 최저와 방벽 스킬창 근처에 항시 머물게 조절해야 한다. 리분의 마지막 컨텐츠인 얼음왕관 성채에서의 '여명의 빛'은 흥분과 긴장의 연속이다. 밤샘 레이드의 흔적들은 거실 곳곳에 남아있다. 구겨진 담배갑과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꽁초, 그리고 거실 곳곳 여기저기에는 선풍기 바람에 흩날려 쌓인 담뱃재가 있다. 오베 때부터 지금까지 7년간, 아제로스에, 아웃랜드에, 노스렌드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하루의 첫 식사 메뉴는 한 시민단체에서 진행하고 있는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희망UP 캠페인'에 하루 동안 참여했던 어느 분의 체험기를 재연하기로 했다. 격에 걸맞게 식탁에는 분홍색 보자기를 깔고, 양은 냄비에 밥을 담고, 마트에서 미리 사다놓은 '3분 미트볼'을 전자레인지에 조리하여 밥 위에 얹고, 참치 캔도 하나 따서 옆에 놓고, 짝퉁 본차이나 그릇에 마실 물과 주걱을 넣어 비슷하게 흉내 낸 후 '황제의 식사'를 마쳤다. 밥 먹으라고 준 돈으로 쪽방촌 시각장애인의 속 푸는 약을 사느라 천원을 사회에 기부하고, 조간신문 1부를 읽으며 문화생활도 즐겼다는 그분과는 달리 하루 최저 생계비 6500원에서 남은 잔돈은 저금을 하기로 했다. 모 조직의 구성원 명단을 온라인상에 올렸다가 법원으로부터 공개 금지 가처분 판결을 받아 거액의 이행강제금을 부과당하고, 이어진 금융재산 압류 조치에 항의해 그 조직의 사무실을 찾아가 10만원권 수표와 1만원권 지폐 뭉치, 돼지저금통의 배를 갈라 꺼낸 동전으로 현금 481만원을 전달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준 어느 분의 후원금을 마련 위한 '희망 저금통'을 만들 것이다.
어땠거나, 촉박하다. 이제 작품 디스플레이까지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도 없고 의욕도 없다. 거실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향한다. 변기 위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곳은 늘상 습기가 차 있거나 퀴퀴한 담배 연기가 배어 있다. 변기 맞은편의 수건걸이에는 본디 선명한 하늘색이었겠지만, 이제는 낡고 해져 회색에 가까운 희미한 색깔로 바래버린 수건이 걸려있다. 부자왕과의 격렬한 전투로 땀으로 뒤범벅되고 끈적끈적해진 몸을 씻어내고, 수건으로 몸에 남아있는 물기를 닦아내며 거실로 나온다. 베란다를 통해 바깥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눅눅하고 후텁지근한 장마, 오랜만에 맑은 날이다. 바깥 공기와 흙냄새를 한껏 들이 마실 수 있는 기회다. 머리카락의 채 마르지 않은 물기를 털어내며 서둘러 옷을 챙겨 입는다. TV에서는 청계천에 은어가 서식한다는 서울시의 발표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멘트가 들려온다.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14층까지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층당 1초씩, 대략 15초정도 기다린다. 문이 열리고, 닫힌다. 15초 후 땅을 밟는다. 물기를 머금은 수건 때문인지 목 뒷덜미가 축축하다. 수건을 말려야겠다. 흙이나 오물이 묻지 않게 화단의 키 작은 나무 위에 걸쳐놓는다. 잠시 잔디에 놓아 보았다가, 땡볕에 달궈져 지글거리는 보도블록 위에 펼쳐 놓는다. 수분이 증발하면서 수건은 빳빳하게 말라간다. 짧은 여정을 마치고 좀 전에 내려왔던 궤적을 되짚어 다시 지상의 보금자리로 올라간다. ■ 류용문
Vol.20100922a | 희망의 나라로-김형석_류용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