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10_0905_일요일_04:00pm
스페이스씨 청년작가 기획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 ㅅㅅㅅl_SPACE SSEE 대전 중구 대흥동 223-1번지 2층 Tel. 070.4124.5501 cafe.naver.com/spacessee
미술의 태생적 배경을 시간적으로 말할 때 그것은 과거형이다. 이것은 미술 표현의 시작 을 말하는 것인데, 현재의 관점에서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과거, 즉 어떤 부재를 증명하는데서 미술적 표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지의 역사를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경험으로써의 삶이 축적되고 난 뒤에 발생하는 현재에서 그 어떤 이미지를 길어 올리는 작업이 미술이라는 것이다. c.폴리니우스의 '박물지'에 나오는 이미지의 유래와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림이라는 것은 그러한 과거의 추억, 그리움, 안타까움 등 바로 지나간 어떤 부재에 대한 감성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 그렇다고 과거에 대한 강박이나 집착을 병적으로 피력하는 것을 옹호하며 현대미술의 다양한 양상과 의미를 폄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현재의 미술가운데 미래의 세계상을 강박적으로 상상하며 테크놀로지 시스템을 맹신하는 가운데 스펙터클(spectacle)의 미학이 개별적 미학을 대체하는 거대한 미술을 바라보면서 갖는 일말의 우려를 말하고자 함이다. ● 그렇게 보면 박용선 작가의 작업은 현재 우리일상에 만연한 비쥬얼적 기호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각종 디지털 기자재에 의한 거대한 이미지의 조작과 현란한 기술로 무장한 팀웍_테크니션 및 기업자본들과 연계되어 등장하는 미술_산업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는 비쥬얼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런 보잘것없는 미술이 스펙타클환타지호러액션어드밴쳐 이미지들에서는 도저히 내포할 수 없는 매력이 서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술의 태생적 이미지와 매스 미디어, 즉 영상미디어와의 차이가 드러나는 동시에 산업과 예술의 경계가 드러날 수 있다. -물론 매스미디어 기술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미술의 본질에 대한 철없는 질문과 미술작품에 대한 제 질문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미술의 영역이 무한하게 확장되는 동시에 장르 간 해체 융합되어 흐릿한 경계사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자연 현상과 사물에 나지막이 관여하는 한 작가의 시선을 통하여 또 하나의 미술세계를 탐색해 보기로 한다.
스페이스 씨 청년작가로 초대한 박용선 작가는 10여 년 전 미술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하였다. 졸업 후 그는 전통적 조각에 충실한 방법을 사용하는 동시에 약간의 변형을 가함으로써 관심을 새로이 유발하는 작품「손, 발에 관한 의심/ 2000년작」을 발표하였다. 인체가운데 손과 발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지만 관절 마디를 하나씩 더하여 익숙한 신체의 구조에 뜻하지 않은 의외성과 기괴함을 부여한 작품이다. 색채 또한 검은 색조를 띄었는데 구상적 조각으로서 잘 묘사된 익숙한 형태로만 보고 지나친다면 한 마디씩 더 있는 가락지들을 자칫 확인할 수 없다. 또한「욕망으로 가득한 의자/ 2000년작」와「개, 지시하는 손 / 2004년작」은 각각의 형태적 차이와 내용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경험에서 기인하는 내러티브(narrative)가 강하게 드러난다. 자신의 일상경험으로부터 미세하게 길어내는 세세한 감각위에 간단한 기술_low technic을 접목함으로써 메시지가 강화된 작품들이다.
그런데, 2005년 이후 등장하는 「나무껍질/ 2005년작」, 「12개의 사물들/2005년작」, 「여러 나뭇잎/ 2007년작」, 「펜 뜨개질/ 2008년작」 등과 같은 작품들은 2000년대 초기 작품들과는 사뭇 달라진 양태를 보인다. 그것은 형태를 만드는 양식과 재료뿐만 아니라 그의 태도가 변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 기존 작업들이 조각의 양식적 범위에서 자신의 언어를 고민하고 있다면 이 후의 작업들은 자신만의 언어를 확실히 만들어가기 위하여 기존의 장르나 양식적 고민으로부터 탈피하여 자유롭게 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작가의 일상 환경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 본다. 그 즈음 그는 '펜 뜨개질'작품의 드로잉적 장점과 한계를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확장하고자 대학원에서 애니메이션을 한 학기 공부한다. 이 후 그 장르가 자신이 지향하는 작품 세계를 포괄하거나 대변키 어려웠는지 다른 학교에 진학하여 동양학 대학원 불교학과를 졸업하기에 이른다. 어찌 생각해 보면 이는 미술의 형태적 또는 내용적 고민에 앞서 자신의 감각을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미술하기'위하여 '태도'를 갖추는 노정이었는지 모르겠다.
'세계 내 존재'로서의 작가적 숙명을 계속하여 감당하고 지향하기 위한 태도로써 말이다. ●「나무껍질/ 2005년작」「12개의 사물들/2005년작」「여러 나뭇잎/ 2007년작」「펜 뜨개질/ 2008년작」 ● 이번 2010년 작품들은 또 다른 작업세계가 가미되어 발표하지만, 2000년대 중·후반의 작업과 일련의 궤를 같이 하는 작업으로도 읽힌다. '나무껍질' 작업의 경우 숲속에 쓰러진 나무에서 껍질을 제거, 수집한 후 작업장에서 최대한 다시 재조립 또는 재구축한다. 따라서 전시장에서 보는 우리는 이것이 주조_케스팅(casting) 기법에 의한 나무 모조품인지를 의심하며 탐색하게 된다.-실제사물에서 형태를 채집하여 그 형태의 원본성을 존중하지만 생물적 ● 실제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서 사실, 그 부피나 길이 등이 변질 또는 조작된다.- '나뭇잎'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수집한 나뭇잎은 낡고 헤져있다. 이것을 조용히 거둬들여 일정정도 바느질로 수선한다. 작가가 취한 대상물에 치료적 수술을 가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감정이입을 넘어서 작가 자신의 위치를 완성한다. 따라서 작가는 전통조각으로 미술언어를 완성하기 보다는 그 영역에서 탈주하여 미지의 자연과 우주를 탐험한다. 미술이라 하든 조각이라 하든 상관없는 우주 자연과 자신의 관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환경으로부터 관찰과 관조를 넘나들며 최소한의 개입으로 사건을 만들고 그곳에서 작품을 탄생시키는 가운데 작가적 위상을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것이다. ● 한편, 일명 '비누작업' 연작들은 매스가 강한 전통적 조각 케스팅 방법을 여전히 활용하고 있다. 제작 방법상 실제 사물을 어느 정도까지 본뜬 다음 덩어리를 꺼내어 다시 조각을 가함으로서 대상과 가장 유사한 사물을 구현해 낸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전통적 양식의 조각적 방법론이 강한 작업 그리고 자연과 조응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이미지나 사물에 대하여 직관적으로 개입하여 최소한의 입장을 드러내고 그 대상자체가 갖는 의미를 확장해 가고자 하는 작업 등 크게 두 가지 방법론 및 시각으로 대별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러한 관점과 방법론에 의한 형태가 드러내는 조각적 완결성만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작용하는 어떤 강한 감성적 아우라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조각과 그 외 기타 작업을 마주보면서 함께 목도하는 것은 시각적 또는 조형적 완성태로써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그 물성과 더불어 사물에 깃드는 작가의 내면적 심성과 감각인데 이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향기 나는 세수 비누를 누적하여 덩어리_매스(mass)를 만들고 그것으로 양말과 포개진 수건, 스웨터 등 정결하게 세탁된 사물을 만들어 전시하고 오래도록 쓰는 이불과 방석 그리고 신발과 슬리퍼 등 평범하지만 나의 신체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물들을 재현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점은 나만이 아니라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생활 환경적 조건 가운데 이르게 한다는 것도 한 몫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가는 그러한 내러티브에만 의존하여 감성적 모드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최종 목적은 아닌 듯하다. 최소한 당시의 작품들이 그러하다고 치더라고 일련으로 지속되는 작업들과 연관하거나 여지를 둘 때 적어도 그러한 단정은 당분가 유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명명한 similitude. '유사'라고 해석되는 이번 전시에서 「유사한 시선」작품(2전시실)은 달빛에 드리워진 나무그림자에서 연유한 작품이다. 어느 날 작업실에서 바라본(-관찰) 달빛에 형형하게 드러나는 나무 그림자. 이 후 어떤 지경에 이르며(-관조) 문득 다가와 맺히는 총체적 이미지가 작동(-직관)하게 된다. 밝은 달빛에 드리우는 그림자는 먹먹하고 두려울 뿐만 아니라 아득하며 명상적 기운에 이르게 하는 마술 같은 힘이 있을 수 있는데 그는 이러한 경험가운데 그 인상을 전시장 안에서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재현된 철가루 그림은 당시의 달빛 그림자가 될 수 없는, 전혀 상관없는 사물로서 전시장에 실현되어 설치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처했던 어떤 실재를 가상하여 유사한 무엇으로 재현하여 작품이 된다. 작가는 이를 '유사한 시선'으로 개념을 제한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 자연에 대한 경험과 인상 또는 인식적 해석을 조형적으로 재현할 때 그것의 재현 방법과 결과가 미술의 자율성에 근거하는 힘이 약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와 모방 또는 재현사이 어디쯤에서 조형성은 방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유사' 달빛 또는 '유사'그림자 아니면 '유사' 한 무엇이라면 지금 2전시실에 있는 작품은 자연_실재에 대한 모방의 반복이 아닌 상동성으로 재현된 자율적 조형작품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또한 「느리게, 유연하게, 우아하게」(3전시실)는 해질녘 시냇물의 물비늘을 촬영한 영상을 폐유에 투사한 작품이다. 캄캄한 전시실 안에서는 폐유의 냄새와 함께 격자 틀 그림자가 겹쳐진 물비늘의 영상을 관찰하게 된다. 캄캄한 전시실에서 일순 몰입하게 되는 이 작품은 낯선 감각의 환경에 처하게 하여 강력한 경험으로 유도한다. 「유사한 시선」(1전시실)은 전시실 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인공조명 후 작업)을 끌어들여 물질화한 작품이다. 이는 '스페이스 씨'의 공간적 상황을 고려하여 작업 아이템을 실천한 작업이다. 공간에 상응하는 자연적 현상을 구체적인 물질로 현상하는 가운데 평소 작가의 자연과의 조응관계를 읽을 수 있는 작업이다. 이는 또 한편의 「유사한 시선」디지털프린트작업이 있는데 이 또한 누추하고 어두운 공간에 인위적 빛을 만들어 그 공간에 개입한 작업으로서 설치와 사진으로 각각 구현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 외 '나뭇잎' 작업과 '펜 뜨개질'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러한 작업 「유사한 시선」연작들은 그간의 작업과는 또 다른 특징적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 동안의 작업은 분명한 오브제로써의 대상을 가지고 그 대상과 유사한 형태로 재현하는 작품이 많았다면 이 번 전시에서는 오브제를 포괄하는 사물일체 및 비물질적인 어떤 환경적 인상과 상황의 경우를 대상으로 하여 작업의 출발 및 근거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즉 관심에서 비롯된 관찰의 대상이나 재현의 대상이 단일한 오브제들에서 이동하여 어떤 포괄적 환경으로 이동 또는 확대되었음 알 수 있다. 그것은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세계, 즉 자연을 상대하는 그런 태도라고 생각된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보다 확대된 존재인식으로 작품을 지어내고 있다. ● 이러한 작가의 시선과 그로부터 창작되는 작품은 일견 지역미술 현상가운데 '야투' 자연 미술과도 상관하여 분석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90년대 미술대 학창시절 대전 근교 공주에서 일어나는 자연 미술 활동현상은 젊은 작가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상관되기 때문이다. 그가 견고한 물성을 기반으로 대상을 추상하고 개념화하는 등 아카데믹한 조각세계로 발전하지 않고 사물의 형상과 상황가운데 이입하여 그 사물과 상황을 재현하려는 조형의지는 동양적 자연관에 입각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의 경향은 분명 지역_성 미술을 말할 때 자연미술과 함께 등장시킬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작가와 작품탐구의 맥락을 자연미술 및 지역_성과 연계하는 것은 작가의 비평적 토대를 넓혀보고자 함이다. ● 이번 전시를 통하여 작가의 미학적 개별성을 파악하는 동시에 그 맥락을 이 지역에서 생성되는 개념으로 삼을 수 있을까를 조심스럽게 제기해 본다. ● 문자적으로 선 인식 한 후, 다시 말해 문자적 해석 다음에 이미지를 마주한다는 것은 문자적 한계 안에 이미지를 가두게 될 것이다. 즉 문자라는 손가락이 달을 가리게 된다는 의미다. 문자가 태어난 지점이 어디인가, 자연 '그' 것이 아닌가. 그것과 가장 가깝고 그것에 가장 가까이 가는 예술적 지름길이 혹 이 근처에 있지 않을까. 이미지의 이면들들들 말이다. ■
Vol.20100920d | 박용선展 / PARKYONGSEON / 朴容宣 / mixed media.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