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깨우기 1

정병국展 / JUNGBYUNGGUK / 鄭炳國 / painting.video   2010_0902 ▶ 2010_0912

정병국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18×291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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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903_금요일_06:00pm

2010 봉산문화회관 제4전시실 개관기념 기억 깨우기展 시리즈 Ⅰ_정병국 / Ⅱ_김호득 / Ⅲ_김명미 / Ⅳ_류재하

주최_봉산문화회관

관람시간 / 10:00am~07:00pm

봉산문화회관 BONGSAN CULTURAL CENTER 대구시 중구 봉산문화길 77 제4전시실 Tel. +82.53.661.3081~2 www.bongsanart.org

기억 깨우기Ⅰ『정병국』展 ● '기억 깨우기'는 그리움에 관한 기명記銘, 보유, 연상聯想, 상상의 과정과 그 재생이다. 예술이 삶과 동화되어 생명의 생생한 가치를 노래하는 것이라면, 예술은 또한 그 기억의 보고寶庫이며 지속적으로 그 기억을 깨우는 실천이기도하다. 그런 이유들로 인하여 예술은 자신이 탄생한 지역의 가치를 근원적으로 기억하게 되고 그 재생의 실천을 통하여 지역 집단에 재인再認된다. ● 우리는 지난해 기획전시 『미술-사람을 보다』의 소개 글에서 인용했던 멜빈 레이더와 버트람 제섭의 서술을 기억할 수 있다. "예술은 신에게 봉헌될 수 있으며, 옳은 행위를 하도록 북돋아주며, 지식에 기여하고, 효율성을 개선시킬 수 있으며 번영을 증가시키거나 사회개혁을 진행하거나 늦출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이 이러한 일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잘 하는 데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며, 어떠한 것도 아주 잘 해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 활동의 어떠한 형태도 생생한 가치의 표현으로서의 예술과 비길 수 없다. 예술은 과학이 말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며,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을, 우리의 사랑과 증오를, 높거나 낮게 평가함을, 정감적으로 중립적인 추상의 언어로서가 아니라 느껴진 성질의 생생하고 감동을 주는 '언어'로 말해준다." 다시 말하지만 이처럼 예술은 기본적으로 그 생生의 사건을 기억하는 메시지이다. ● 봉산문화회관 제4전시실(68.4㎡)의 개관기념 전시 『기억 깨우기』는 예술을 통하여 무수한'생'의 사건이 축적된 대구의 가치를 기억하려는 자리이다. '꿈과 가치를 생각하는 작지만 특별한 전시'를 지향하며 대구미술과 대구 지역성의 가치를 관객과 나눌 것이다. 전시는 12월까지 개인전 시리즈로 진행되며, 정병국, 김호득, 이명미, 류재하 작가가 참여할 예정이다. ● 『기억 깨우기Ⅰ-정병국』展은 그 첫 번째 전시이다. '화면과 공간을 장악하는 단순하고 거대한 원초적 이미지', '등장 대상간의 미묘한 불일치로 인한 낯선 긴장감', '멈춘 기억인 듯한 침묵의 순간들' 등, 작가는 영화 스크린을 보는 장면 상황 같은 회화 이미지를 창출해낸다. 대체적인 예술창조가 자아와 대상의 대면에서 시작된다면 작가가 대면한 대상은 인간이다. 예술 자체의 설득 구조와 이론적 내력들을 생략할 수 있다면 작가는 단지 인간 이미지의 기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 속의 기록과 현재의 현실 존재를 공존시킨다. 미묘한 불일치는 의도된듯하다. 대상은 서로 상대의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측면 혹은 등 뒤에서 조용히 걸터 앉아있다. 마치 마음으로 전해지기를 바라지만 언어로써 표현을 망설이는 연인 사이의 어색한 침묵을 떠올릴 수 있다. 작가의 기억으로 그려내는 이 특정 인간 이미지는 작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우리지역 문화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외로움과 함께 느껴지는 인간의 생경함', '관객이 화면 안에 서있듯이 느껴지는 대담한 설정' 등에서와 같은 시각예술의 힘과 전율의 체험은 관객이 작품에 몰입하도록 하여 집단의 기억을 깨우는 예술가의 예지적 특권일 것이다. ● 대구의 가치-기억 깨우기가 가능한가? 이 전시는 대구性을 떠올릴 수 있는 가치들을 찾아내고 연구와 아낌의 담론을 가꾸기 위한 제안이다. 거창하고 대단한 규모의 전시가 아니라 작은 공간에서도 보석처럼 빛을 발하는 전시가 되기를 기대하며 예술의 기본적인 실천으로서 '기억 깨우기'를 생각해 볼 것이다. 또한 우리시대의 '선택'과 미의 '진면목'이라는 가치의 담론도 함께 나눌만한 일이다. ■ 정종구

정병국展_봉산문화회관 제4전시실_2010

이미지들, 존재와 사물의 그것들, 간결함과 행복과 망각의 이미지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이며 만져지고 사랑받았다. 시선의 이 무게, 만짐의 이 무게, 미소와 목소리와 몸짓들의 이 무게, 그리고 엄격하고 아름다운 불일치, 사랑받았던 것은 비교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길 위의 한 줄기 햇빛이 그 길을 달렸던 기억을 여전히 오랫동안 밝혀 주듯, 간직되어 있다. 지나감들, 돌들, 애무들, 세계는 그 영원한 극복의 비밀 안에 묻히고, 우리의 시선들이 놀라면서 그것을 닫고 그것을 열며 그것을 뒤집는다. 보려는 열정은 사물들이 우리와 함께 똑같은 달리기 속에 이처럼 있으며 이처럼 간다는 생각의 열정이다. 그리고 예술은 우리가슴 박동에 비하여 수세기나 늦거나 아니면, 거꾸로 우리를 앞지름으로써 객관성의 야릇한 부족을 야기 시킨다. 왜 우리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 벽 위의 화폭이 눈먼 창문처럼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 창문에 의해서 팔들과 다리들 주위에 얼마나 커다란 공허가 펼쳐지는가? 너무 많은 이미지들이 있다. 모든 바깥모양이 실제와 아주 안 맞아 떨어진 나머지, 마침내 지속 없는 한 순간의 희열을 일으킨다. 가끔 예술은 인간이 겪어야 될 필요가 없는 것, 겪을 줄 모르는 것만을 예고한다. 그리고 현실 속에 웅크린 인식은 사물의 단호한 귀환을 기다린다. ■ 정병국

정병국_들리지 않는 소리_영상설치_00:05:00_2010
정병국展_봉산문화회관 제4전시실_2010

'역습의 리얼리즘' 혹은 알레고리 회화1. 3년 전, 미술평론가 이달승은 미술잡지 아트인컬처(2008년 5월호)에 실린 화가 정병국과의 대담에서 '역습의 리얼리즘'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사실상 이 제목 하나로 정병국 작품 세계의 설명이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것은 어느 고급 독자의 실제 코멘트였다.) 나 같이 '제목'에 목숨 거는 잡지(언론) 편집자의 경우, 이렇듯 짧지만 내용을 송두리째 함축하고 그러면서도 의미의 외연이 활짝 열려 있는 비평 용어를 만날 때면, 마치 황홀경 같은 짜릿한 쾌감에 빠지곤 한다. 나는 지금도 정병국의 작품 앞에 서면, 이 '역습의 리얼리즘'이라는 화두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역습의 리얼리즘. 리얼리즘에 '역습(逆襲)'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역습이란 상대편의 공격을 받고 있던 쪽에서 거꾸로 기회를 엿보아 신속하게 공격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역습이란 틀에 박힌 기존의 상황에서 일탈하려는 변혁의 몸부림이요, 어떤 노림수를 품고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도발적인 전술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습의 리얼리즘'이란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이되 상투성을 벗어난 뭔가 '별난' 리얼리즘, 또는 리얼리즘처럼 보일지라고 결국은 리얼리즘을 '뛰어넘는' 작품 세계란 뜻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포스트(Post) 리얼리즘'이란 말을 갖다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나는 이 '역습의 리얼리즘'에서 정병국 예술의 미술사적 계보는 물론이고, 그의 독자적인 예술 게놈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 2. 정병국은 자신의 그림을 이야기 할 때, 자주 영화를 끌어들이곤 한다. "나와 그림의 첫 육감적인 만남은 극장의 영화 간판을 통해서다. 또 어렵게(?) 극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눈앞에 펼쳐진 하얗고 커다란 스크린, 영화가 시작되기 전의 긴장감과 설렘, 어린 소년의 꿈의 크기만큼 그 스크린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앞의 대담 중에서) 정병국의 그림을 영화와 매치시키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 요켠대 흰색의 스크린은 대형 캠퍼스와, 등장인물의 대사(말)는 인물이나 동물 같은 이미지로, 소리 없는 침묵의 영상은 푸르거나 검게 전개되는 색채 배경으로․․․. 그렇다. 정병국의 작품에는 영화의 한 장면 혹은 연극 무대의 세트 장치를 떠올리는 조형어법이 구현되어 있다. 화가 정병국은 수많은 이미지들과 시간의 엉김, 그 생성과 소멸의 시나리오를 '색채와 이미지로 뒤덮인 평면' 그림으로 그린다. 그리하여 정병국은 작품에 등장하는 저 푸른 지평선, 시간을 뛰어넘는 공간의 분계선 속으로 끝없이 이야기를 밀어 넣는다. 3차원 영상의 2차원 평면으로의 전이. 이미지와 시간의 기묘한 '역습'이 아닐 수 없다. 정병국 그림에 드러나는 형상이야말로 '역습'의 수사와 아주 잘 어울린다. 언제나 그 형상들은 아무런 전주곡(前奏曲)도 없이, 어떤 구체적인 예고나 사전 브리핑도 없이, 그냥 느닷없이 우리의 눈을 덥석 덮친다. 그 어떤 욕망에 허기진 듯한, 그 욕망을 찾아 헤매는 듯한, 등을 돌린 뒷모습이거나 웅크리거나 아예 몸체가 날아간 투명인간 같은 형상들, 저 표정 없는 담담한 인물들. 나무와 바위, 구름, 허공을 날아가는 새 그리고 부서진 가구와 흩날리는 꽃들․․․. 인물들은 모두가 멈칫 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마치 배우가 연기하는 한 순간의 동작을 카메라 앵글로 포착한 이미지와도 같다. 그 이미지들이 지평선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 형상들이 때로는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이 '역습'의 포즈에서 우리는 또 다른 세계의 예감을 찾아 나설 수 있다. 정병국이 형상을 화면에 요리하는 구성 방법 또한 아주 극적이다. 머리나 신체 부위를 과감하게 화면에서 잘라버리는 클로즈업 수법이 불쑥 나타난다.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배경을 극도로 단순화시켜 주제 이미지는 광고 효과처럼 임팩트가 강하다. 그가 대형화면에 인물 하나만 덩그러니 그려 놓아도 '그림이 되는' 이유도 이 심상치 않은 화면 구성의 힘 때문으로 보인다. 꼭 대작이 아니더라고 언제나 그의 작품은 '시각적인 그럴 듯함'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정병국의 작품은 스펙터클하다. 정병국의 색채는 몇 가지로 절제되어 있다. 이 지독한 금욕 중에서도 으뜸으로 빛나는 색채는 블루(Blue)다. 그는 회색이나 검정색도 즐겨 쓴다. 정병국은 자신이 원하는 푸른색을 캔버스에 제대로 얹혔다고 생각할 때, 그림의 반은 완성한 셈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그의 작품에서 블루에 대한 발언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피카소에서부터 마티스와 이브 클라인, 그리고 우리의 김환기나 이우환에 이르기까지 '블루의 미술사'는 찬란히 빛난다. 블루는 기본적으로 대상 색이 아니라 정신의 색이요, 명상의 색이다. 정병국 그림의 블루는 오랜시간 어둠, 침묵, 음모, 비밀 속에 갇혀 있던 사상(事象)들이 마치 영화나 연극에서처럼 인공조명을 받고(페이드인(Fade-in) 혹은 페이드아웃(Fade-out) 상태),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며 우리를 어루만지듯 다가오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정병국의 블루는 자신이 고백한 대로, '색이라기보다는 수많은 기억의 시간들이 새로이 벌리는 밀회의 장소'다. 요컨대 블루는 '기억의 창고'요, '존재의 뒤꼍' 이라고 해도 좋다. ● 3. 푸른 음조로 물든 '존재의 뒤꼍'에는 언제나 이질적인 것들이 팽팽한 긴장과 갈등으로 출렁이고 있다. 낮/밤, 남/여, 앞/뒤, 겉/속, 성/속, 정지/움직임, 영원/순간, 인공/자연, 원시/문명, 실상/허상, 삶/죽음․․․. 이질적인 조형요소들은 이중 혹은 그 이상의 문맥을 만들어내고, 그 곳에는 표면적 의미와 숨은 의미의 차이, 의미들의 역전 등과 같은 알레고리가 움직이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시작적인 그럴 듯함'으로 말할 수밖에 없기에, 정병국에게는 모든 것이 알레고리가 된다. 그리하여 저 대개념들의 충돌은 그의 작품 가운데 혼성과 공생의 미덕으로 오롯이 살아 있다. 이러한 불일치 혹은 어긋남의 엇박자가 일구어내는 작품세계. 이것이 바로 정병국의 '역습의 리얼리즘'이 아니겠는가. 알레고리의 충동으로 물든 리얼리즘이. ■ 김복기

정병국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181cm_2007

'밤의 입술'밤에는 물고기가 물 밖으로 달빛을 때리러 나온다. (김수영) ● 회화의 죽음을 이야기하더니, 어느새 회화의 부활을 들먹인다. 하지만 회화를 줄이고 살리는 우리의 야단스런 호들갑에도 회화는 여전히 침묵한다. 회화는 죽은 적도 되살아 난 적도 없다. 회화는 그 권한을 박탈당한 적도 탈환한 적도 없다.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는 회화에는 나이가 없다. 시류와 경향과 기교와 컨셉에 아랑곳 않는 그 곳 회화에는, 날짜 없는 시간을 사는 지향만이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침묵이 일러주는 지향. 침묵이 이끄는 그러한 지향을 일컬어 우리는 회화의 모험이라 부른다. 회화의 모험이란 다름 아닌 눈의 욕망이 나아가는 여정을 말한다. 그런데 눈의 욕망 즉 보려는 욕망은 그리려는 욕망과 보이지 않는 숨소리를 사이에 둔 동일한 욕망이다. 낯간지러운 감상이라는 비웃음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리움이라는 단어의 울림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리움이란 아직 만나지 못한 것 혹은 이미 잃어버린 것이 남긴 빈자리를 지켜보는 애석함을 말한다. 회화는 그림은 원래가 그렇게 그리움의 오랜 연인이었다. 일찍이 로마의 플리니우스는 그림이 품은 그리움을 두고 이렇게 적고 있다. "회화의 원리는 선의 도움을 빌어 인간 그림자의 윤곽을 뒤쫓는 데 있다"고. 여기서 그림자의 윤곽이란 회화가 머물 수밖에 없는 자리를 말하고, 뒤쫓는 움직임은 회화가 지날 수밖에 없는 시간을 말한다. 그림자의 윤곽을 뒤쫓는 움직임, 헛된 추적의 위험부담마저 감수해야하는 긴장, 이제 그리움은 나른한 감상이 아니라 긴박에 휩싸인 의지가 된다. 감상으로서의 그리움이 아닌 의지로서의 그리움. 이것이 바로 화가 정병국이 그림을 그린다는 그 이유만으로 견뎌내야 하는 그리움 즉 의지이다. 그런데 회화에서의 의지한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관철해야한다는 의미에서의 의지가 아니라, 화가가 나아가는 걸음걸이의 그 순수한 움직임 가운데 뜻과 힘이 새겨지는 의지이다. 가령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가는 가운데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비로소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자신을 맡길 때 그림은 시작된다. 그러나 화폭이 예감의 손길을 받아줄지 뿌리칠지 화가는 알지 못한다. 일언의 약속도 없는 길을 나아가는 행인의 간곡한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그 간곡함에도 불구하고 예감은 언제나 미결의 포우즈로 유예되고 만다. 간곡함이 도리어 덫이었던가, 화폭의 인물들은 도대체가 정처(定處)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정병국의 그림 앞에 서면서 우리가 낯설고 난처(難處)하여 끝내 설운 느낌을 지우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못내 조급하다. 화폭 앞에서의 낯설음에 서둘러 의미를 추궁한다. 난처함을 벗어나려는 조바심에 그림의 제목을 곁눈질해보기도 한다. 그림과 제목 사이에 미끄러지는 아슬아슬한 엇박자 탓인지, 제목이 낯설음을 도리어 더해준 탓인지, 우리의 낯설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은근한 듯 옹색한 제목은 반갑고 고마운 격려가 되기는커녕 곤혹의 그늘만 키우는 야속한 참견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우리는 화폭 앞에서 반드시 의미를 밝혀내야 한다고 부당하게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여기서의 낯설음은 안이하고 안락한 의미에 대한 기대의 좌절이 안겨주는 난처함 때문은 아닐까. 실제로, 우리에게 등 돌린 채 어두움을 향하고 있는 인물의 시선이 막막(漠漠)한 어두움의 심연을 향수하고 있는지 막막(寞寞)한 어두움의 장벽을 마주하고 있는지 우리로서는 요령부득이다. 어두움 속에 잠겨 푸르름의 깊이를 바라보는 인물은 우리의 갖은 호기심을 거절하면서 종내 말없는 의문의 검은 실루엣만 남긴다. 얼른 보기와는 달리 정병국의 그림은 고독 우수 방황 등과 같은 내면의 갈등이나 동요와는 무관하다. 착잡한 심리적 분장(扮裝)을 지워버린 화가의 시선은 이미 어떠한 내면의 웅성거림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인물의 심정적 움직임에 대한 궁색한 짐작이나 구차한 수다를 포기하게 한다는 데 그 매력이 있다. 짐작과 수다를 삼가면서 우리는 인물을 둘러싸고 드러나는 화면의 표정, 화면의 정경(情景)에 다가서게 된다. 무례하리만큼 대담한 화면, 인색하리만큼 절제된 색조 그리고 무모하리만큼 간결한 형태는 서글프리만큼 헐벗은 정경을 낳고 있다. 말 못할 구슬픈 수모와도 같은 푸르른 어두움에 잠긴 그 헐벗은 정경은 아무런 변명이나 수사 없는 화가의 숨은 순진성을 드러내며 힘을 얻고 있다. 화가의 순진하고 단순한 시선은 일찍이 그리운 세계와의 긍지있는 해후를 실의 속의 초조처럼 꿈꾸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움을 먹이 삼아 만남을 꿈꾸는 화가의 눈길은 내면을 뒤돌아보는 시선이 아니라 바깥으로 불려나가는 시선이다. 화가의 시선은 머리로 가늠하거나 심정으로 헤아리는 시선이 아니라 몸과 함께 나아가는 시선이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서 화폭이란 적정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세계를 옮겨 담는 장소가 아니라 몸이 미끄러져 들면서 함께 움직이는 자리이다. 화가가 향하던 기약 없던 세계, 어쩌면 그 세계는 언제나 화가 곁을 맴돌았던 알 수 없는 은밀한 유인(誘因)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상대적으로 거대한 기념비적 육체는 그가 인물과 거리를 취하기를 꺼리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령 모델을 바라볼 때 그의 시선에 읽혀지는 것은 모종의 심리적 편향에 따른 외관의 인상보다는 모델의 순간적 포우즈에 그의 시선을 빼앗기면서 함께 휘청거리거나 출렁이는 몸의 움직임이다. 이러한 인물을 대하는 심리적 거리(인간에 의해 계산된 인위적이고 의미론적인 거리)의 소멸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희미하고 허약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하여 그가 그린 인간은 사유하는 창백한 인간이 아니라 낯선 장소에서 만난 원초의 몸뚱이와도 같다. 아마도 그는 인물을 관조하기보다는 인물의 몸뚱이에 잠겨있는 침묵의 무게를 실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침묵의 무게를 통한 세계와의 소통에 대한 염려는 형상의 외관적 차이와 구별을 떠난 화면의 조형적 요구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정병국의 화폭에는 언제나 푸르름이 가득하다. 화면 가득한 푸르름은 어두움과의 비밀스런 공모로 텅 빈 정적의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 그런데 침묵의 무게로 일어서는 형상들은 그 자체의 부피로 화면을 과도하게 채우면서도 결코 정적의 공간을 손상시키지 않고 있다. 그 소리 없는 함성의 흔들림으로 파도는 바위를 닮고, 질료의 그 어두운 부동의 반짝임으로 나무는 바위를 닮고, 정오의 적막 속에 우뚝 선 그 볼륨의 반란으로 사람은 나무를 닮고... 이처럼 형상들 사이의 공명의 충만함에도 화면에 깃든 적막은 여전하다는데 정병국이 다다른 조형 세계의 미덕이 있다. 그런데 충만과 공허의 일치는 기어코 몸으로 맞이해야하는 감각의 밀도이다. 침묵의 무게, 그것은 날짜 없는 시간, 낯선 장소에서 나의 의식이 침묵의 몸으로 잦아들면서 나의 눈이 아닌 너의 몸에서 만나는 세계이다. 의식이 재촉하는 분별의 소란이 가실 때, 세계는 침묵 속에서 우리가 미처 눈치 채지 못한 그 고유의 말들을 우리 몸에 새기기 시작한다. "밤이며 고요 속에 더 한층 아름답게 이슬에 젖는 꽃처럼", 꿈 속 피안에서 밀려드는 소리 없는 파도의 벅찬 함성처럼. 하지만 아름다움과 감동은 자칫 우리의 주책스런 감정이입이 되기 싶다. 불타는 장미를 바라볼 때 꽃만 태울 뿐 우리의 몸을 태우지 않으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밤에도 꽃은 피우지만 우리를 흔들어 깨우지 않는다. 밤의 안락과 밤의 휴식을 포기하기엔, 우리에게 밤은 너무나 상냥하고 다정한 정처였다. 하지만 밤 속에 밤의 깨어남이 있듯이, 침묵의 밤 속에서 깨어난 세계는 이윽고 우리에게 위엄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오해는 말자. 위엄이 강제와 억압과는 다르다는 것을 화가는 알고 있다. 차라리 화가에게 위엄은 우리가 묻지 않고 눈감았던 세계의 숨은 매혹이었다. 세잔(Cezanne)의 검푸른 소나무는 우리를 비굴하게 만들기 않고 우리를 압도하는 알 수 없는 매혹 앞에 불러 세운다.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며 밀려드는 밤바다의 얼굴. 그 강압 않는 호소, 말없는 명령으로 침묵의 위엄은 우리에게 밤이 밤의 창을 두들기듯 밤의 입술로 다가온다. 멀어져가며 밀려드는, 숨기면서 드러나는, 사라지면서 떠오르는 세계의 얼굴, 그 침묵의 호소는 결코 저 먼 곳의 은총이 아니다. 언제나 우리를 빠져나가면서도 우리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고단한 생활에 드리운 그림자의 희롱. 사라지면서 드러나는, 아니 사라졌기에 비로소 드러나는 달콤한 듯 쓰라린 기습 같은 환영. 아이구야, 한여름의 번갯불 한 방에 내 눈이 멍든 것, 왠지 모르지요? 정병국의 회화는 바로 이 잠입의 장소, 기습의 시간을 엿보고 있다. 만나지 못한 것이 이미 잃어버린 것이 되는 난처하고 설운 미심쩍은 시간, 밤의 입술에 놀아나는 정병국의 그림은 정적 속의 교란으로 우리를 부추기는 것만 같다. 그러난 도발과 우아(優雅)의 입맞춤이 마네(Manet)가 피할 수 없었던 회화의 그리움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프랑스 작가 조르쥬 바따이유는 마네의 그림을 도발적 우아라 이름하였다). 밤의 입술은 모순을 불러 세워 다그치는 낮의 취조에 미련도 없다. 밤과 낮, 원시와 문명, 신화와 세속, 고전과 신파, 심각화가 정병국은 홀로 몸을 적신다. 그리고 모순이 잊혀지며 추억이 될 때, 밤이 꿈속에 피어오르는 회화의 그리움을 그는 회한으로 삼킨다. 아, 그런데 밤의 입술 너는 아량인가 기만인가? 화가는 혹 만날 수 있을까, 밤 속에 홀로 선 소년을. 어둡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홀로 선 소년은 알고 있을 테지. 땅에 피어나면 꽃이 되고 하늘에 떠오르면 별이 되는 것이 바로 소년의 꿈이라는 것을. 함께 달리며 꿈꾸는 우리 모두의 염원이라는 것을. ■ 이달승

정병국_scream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259cm_2007
봉산문화회관 전시실

정병국의 푸른 회화1. 정병국의 화면에는 몇 개의 색깔들만 등장한다. 푸른색, 그 대비로서의 회색, 그리고 강조되는 단순한 색깔들 뿐이다. 붉은색을 중심으로 노랑색과 녹색이 등장하기는 하나, 주된 색깔은 푸른색이다. 그 푸른색은 화면의 중심을 이루는 인물이나 소품들에 비해서 배경처럼 위치하고 있다. 중성적인 회색과 대비를 이루면서 화면에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며 중심인물에 대하여 강하게 발언하고 있다. 회색 뒤에 등장하는 밝은 꽃들이나 풀들은 하잘 것 없이 보일 수도 있으나 중심이 주제가 되는 인물을 회화적으로 설명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어느 화면에서나 위에는 푸른색, 아래는 중성적인 회색으로 분할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연상할 수 있는 하늘이나 땅이 아닌, 어떤 충돌 또는 의미로서 읽혀질 수 있다. 화면 위에 푸른색은 강한 대비감으로 인하여 작품을 보고 난 한참 후에도 중심이 되는 이미지를 뛰어넘어 우리의 심리적 뇌파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 이것으로 정병국은 의도하고 있는 인물의 내면적 심리를 담아내고 있으며 현대인의 고뇌를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결국 정병국은 이 푸른색의 발언을 위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2. 1980년대 그의 작업은 물감을 혼합하지 않은 원색 그 자체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푸른 배경은 색감이 가진 본래의 느낌을 무화시키면서 어떤 상징을 암시하고 있다. 그 배경은 주제로 그려진 나무나 중심이 되는 뒷모습의 사람들의 이미지를 역전시키고 있다. 색감의 차원이 아닌 구체적인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오히려 앞에 그려진 인물보다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많은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무것도 섞지 않은 물감을 그대로 사용한 푸른 바탕은 그 푸른 물성의 입자들을 동원하여 인간의 내면 속에서 꿈틀거리는 원초적 본능을 드러내고 있다. 하늘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정병국이 지향하는 그 푸른 바탕은 자연의 풍경 같기도 하며 '물성화된 감정'같기도 하며 앞에 그려진 인물의 잠재의식을 읽어내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 인물은 어느덧 얼굴 없는 사람이 되고 물성 그 자체를 그대로 바른 그 푸른 바탕은 하나의 자율적인 언어가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의 뒷모습은 오랜 그의 생활 속에서 배어나온 '인간 삶의 집약'일 수도 있다. 오히려 강한 시각적 발언이다. 익명적인 사람의 뒷모습을 통한, 인간 내면 속에 잠재하고 있는 함축된 원시성을 드러내고 있다. 어떤 경우는 사람인지 배경인지 구분할 수 없는 혼돈된 화면을 부여주고 있는데 인간이 자연과 혼합되어 자연의 일부처럼 자연이 인간의 일부처럼 서로 혼미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 경우 모든 이미지는 본래의 성격을 벗어버리고 정병국의 메신저가 되고 있다. 알 수 없는 이미지, 뒤틀어진 형태, 그리고 비정상적인 비례 등이 사실보다 강렬한 진정성을 전달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날 것 같은, 지극히 유치한 푸른 바탕, 그리고 그 위에 부유하듯이 그려진, 붉은색의 깊은 맛은 하나의 현실을 뛰어 넘은, 정병국이 만들어낸 초현실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정병국이 어린 시절 꿈꾸었던 것들이 잠재의식 속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다가 단숨에 비집고 일어나 불현듯이 생겨난 '정병국의 진정성'이다. 이러한 경향의 작업들은 1990년에 들어서면서 예비군복 같은 사회의 상징적인 옷의 껍데기로 변모되었는데, 그 옷은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듯이 표현되었다. 껍데기만 있는 인간의 허상을 보는 듯하다. 그 허상 속에 있었던 인간의 진정성은 무엇이었을까. 19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정병국은 사람의 정면의 모습을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황을 설정하여 인물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소품으로서 자연물이나 풀, 그리고 동물들이 등장한다. 어떤 경우는 최소한의 이미지만을 유지하면서 최대한 소거하여 초현실적인 상황을 연출하곤 했다. 제복을 입고 훈장을 단 완벽한 복장의 군인, 거울을 쳐다보고 있는 누드의 여인을 거울 속에서 바라본 시선, 정장을 입은 신사의 반쯤 잘린 얼굴 등 인간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담아내고 있다. 이는 어떤 내용을 함축하고 강하게 전달하려는 정병국의 숨겨진 의도이다. 마침내 그는 왜곡과 변형, 비현실성, 비사실적인 서술을 통하여 진지하게 인간의 원시성을 드러내고 있다. 2000년대에 이르면 그의 작업에는 벌거벗은 누드의 남성들이 등장하여 자연 속에서 어떤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성을 알 수 없는 중성적인 남성. 실체는 보이지 않되, 무언인가에 힘을 작용시키는 근육질 남성의 굳센 모습들.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무엇인가에 개입하는 사람들. 고뇌하나 표정 없는 석고 같은 인물의 어색한 자세. 누드의 남자, 화려한 꽃,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날림의 푸른색. 이처럼 부조화로 이루어진 비상식적 화면은 정병국이 의도하는 원시성의 세계이며, 이 알 수 없는 난해한 색감은 바로 정병국이 의도하는 아름다움으로서의 인간적 메시지가 되고 있다. 허공을 바라보거나, 어린 소년이 누드로 서 있거나, 건장한 군인들의 조깅하는 모습을 배경으로, 흩날리는 꽃잎. 고속도로 변 코카콜라 자동판매기 옆에 서 있는 누드의 여인. 누드의 미남자가 의자에 걸터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과 화려한 플라스틱 같은 꽃들. 강가의 빈 배위에 서 있는 발가벗은 소년 부다.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의도에 의해서 발언되고 있는 상황이다. 공중에 흩날리는 낙엽을 그려, 보이지 않는 바람을 알아채게 하듯이, 정병국의 작업들은 이미지의 허상을 통하여 살아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추상적 힘'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다. 가득함과 비어있음, 양과 음의 양의적 지점에서 고뇌하고 있는 인간의 실존성에 대하여 진지하게 묻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정병국이 연출하는 인간의 실존과 시간의 덧없음이다. ● 3. 정병국은 단순한 외형의 표현만으로 예술작업이 될 수 없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사물의 보이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예술의 의미를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작업이 단순한 감각경험으로부터 깊은 사유와 되새김을 통해 거듭난 사고 체계임을 의미한다. 그의 작업은 인간의 실존적 철학을 근거로 하여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인식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의미이다. 한편으로는 그의 작업은 희극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능성 속에서 '본질주의'라는 깊은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위해 그는 무모하리만큼 강렬하고 원시적인 색감을 시도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적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을 통하여 일종의 억압을 시도하고 있다. 평범한 것들에 대한 그의 강력한 변용과 왜곡은 인간의 원시성과 이중성을 회화적인 어법으로 서술하려는 하나의 방법이 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되 화면에서 더 이상 평범하게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되었다. 이처럼 평범한 요소들이 하나의 예술적인 본질을 밝혀내는 요소로 가능하게 되는 것은 평범함을 뛰어넘는 그 나름의 철학적 반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본질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화면에 등장하는 이미지가 지시하는 외형적인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미지에 감추어져있는 이중적 속성이다. 그의 이러한 두 가지 접근은 화면을 환기 시키는 긍정적 요소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극단적 대비는 인간의 진실을 예술로 바꾸는 그의 뛰어난 구성능력과 싶은 사유에 근거한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예술이 쉽게 도달 할 수 없는 어떤 절박감을 하나의 언어로 환기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그림을 볼 때 화면을 형성하고 있는 항목들에게만 주목하게 되면 그의 심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속성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평범한 것들에의 극단적인 변형을 통하여 인간의 실존감을 제시하고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 보이는 비현실적인 색깔들로 뒤덮여있는 상상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상상력은 오히려 철저한 실존과 생활 속에서 배어난 깊은 우수의 반대편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감각적인 표현은 시각적으로 인간의 눈을 강하게 자극하고 있으나 그 자극은 결국 우리의 심연을 건드리는 하나의 메신저이다. 이처럼 특정한 사유를 보편적으로 표현하는 정병국의 뛰어난 능력은 시각적 어법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으며 우리시대를 특징짓는 메타포가 되고 있다. ■ 김용대

Vol.20100913f | 정병국展 / JUNGBYUNGGUK / 鄭炳國 / painting.video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