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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910_금요일_05;00pm
1부_2010_0910 ▶ 2010_0920 2부_2010_0924 ▶ 2010_1004
관람시간 / 11:00am~07:00pm
나무화랑_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정동석의 「가득 빈」寫眞 ● "예술작품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작용하는 사회적 효과를 보는 것이다." - John Ruskin ● 궤적 ● 정동석은 30년간 풍경사진을 찍어 왔다. 80년대는 일상에 존재하는 '분단'의 현장을 포착해서 우리들의 무의식에 붙어있는 분단현상을 비판적으로 드러낸 「반-풍경」연작이었고, 90년대 작업은 그가 여기저기 옮겨 살던 이름 없이 버려진 시골의 들, 산, 물, 바다 등의 우리 국토의 속살을 촉각적으로 되살린 옵티컬한 발밑풍경이었다. 2000년대는 귀경한 서울에서의 도회적 삶에 대한 단상과 사진작업의 개념적, 형식적 일탈이 두드러지는 밤풍경들이다. ●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각 시기마다 다르게 그의 사진이 변화되었음에 비해 사진에 대한 이념이나 작업관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소외된 풍경 이면에 은폐되어 있던 문제를 되짚어보려는 작가적 태도가, 소재나 방법에서 일탈과 분절을 거듭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을 한결같이 보이게 한다. ● 정동석이 초기의 입장을 지금까지 견지해온 구체적인 단서들은 무엇일까. 먼저 외형적으로 쉽게 보이는 건 그의 작업과정이 '풍경'으로 일관한 점이다. 그런데 그 풍경은 눈의 호사를 위한 명산이나 명승지 등의 보기 좋은 경치들이 아니다. 정동석은 풍경이란 장르를 통해 풍광보다는 우리 삶에서 문제가 있거나 생각할 여지가 있는 동시대의 '상황'에 천착했다. 사진가로서의 독자적 조형감각의 바탕에서 사회·역사적 인식의 소통기제로 그의 사진을 개념지운 것이다. 풍경이란 장르를 고수했다는 사실보다는 사진을 통해 풍경을 사회적 인식공간으로 전환시키려는 미학적 태도가 그의 작업의 일관된 뿌리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초기작부터 근작까지 아우르는 이 일관된 태도로부터 변주해온 정동석의 독자적 형식은 사진에 대한 그의 태도의 연장선상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정동석의 사진에는 연출의 흔적이 별로 없다. 날씨나 광선의 조건에 구애받지 않은 일반적이고 평범한 상태에서의 촬영 같다. 스튜디오사진이 아닌 야외 풍경사진이니 당연한 것이라 지적한다면, 설명이 난감해지는 미묘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사진을 '화장'하지 않으려는 고집이나 기질 같은 것이 느낌으로 묻어나온다. ●우리의 시각은 빛에 의한 색상과 명암으로 세계를 수용한다. 사진은 더더욱 그렇다. 피사체에 가해지는 빛의 강도에 따라 차별화된 명암의 단계가 만드는 그라데이션의 변주가 사진가의 느낌이나 미적인 분위기를 좀 더 색다르게 만들어 준다. 거기에 줌이나 광각같은 렌즈를 쓰면 표현의 스펙트럼은 넓어진다. 피사체에 가해지는 광선의 강약, 조리개, 렌즈의 속성 등에 사진가의 개입이 커지면 결과로서의 사진은 전혀 다른 맛이 된다. 그래서 빛의 조건을 파악하고 활용하는 것이 사진가에겐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광선을 드라마틱하게 활용해서 피사체의 분위기를 색다르게 강조하는 방식을 선호해 왔다. ● 그러나 정동석에게 있어서 광선은 사진을 찍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다. 그는 시각효과를 위해 의도적으로 특정한 광선을 기대하거나 조절하지 않는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빛과 거리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며 렌즈로 인한 효과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자신이 서있는 자리(Standing Point)와 풍경과의 거리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며 자신의 인식을 오버랩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진속의 장소는 불현듯 거기에 간다 해도 항상 있는 그대로의 광경이라 할 만큼 전형적이고, 일상적인 분위기다.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늘 볼 수 있는 평범한 장면. ● 정동석은 이 일상의 미감을 자연스럽게 존재론적인 내용으로 연결하고 맥락화 시킨다. 화면을 다른 분위기로 치장해 보이려는 특별한 연출이나 시각 효과보다는 렌즈가 향하는 곳이 어떤 상황인지 깨닫고 그 상황에 대한 내러티브나 주제의식에 집중한다. 우리들 일상이 대본에 의해 연출되는 것이 아니듯, 삶을 증거하고 반영하는 풍경 또한 어떤 과장도 없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야 그가 바라는 내용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럴 것이다. 그의 사진이 심심할 정도로 담백하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또 다른 것으로, 정동석은 대상을 연출하지 않고 찍지만, 그렇다고 재현만 하지는 않는다. 재현보다는 대상이 처해있는 '상황'을 '포착' 한다는 게 옳겠다. 상황을 포착하는 것은 소재를 재현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소가 된다. 작가의 주제의식이나 지향성이 좀 더 깊이 있게 제시되기에 그렇다. 이럴 때의 앵글은 특정한 중심적 소재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주변이나 배경을 종속적으로 배치하는 관습적인 구성방식에서 벗어난다. 이른바 '주대종소(主大從少)'류의 일반적 화면구성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레임 안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주와 종의 관계없이 골고루 각자의 역할을 있는 그대로 하게 된다. 근경과 후경 구분 없이, 포커스와 프레임을 넘어서서, 마치 올 오버(All Over)로 확장되는 공간처럼 화면전체가 균등하게 기능하며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다. 이 방식은 관객의 화면에 대한 감성적 접근으로부터 주제의 인식적 수용에 이르기까지 그 소통구조를 자연스레 확장시켜준다.
형식적 특성에 덧붙여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정동석의 작업 전 과정이 지난한 노동에 비견되는 발품팔기의 바탕에서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의 사진에는 내용에 대한 일정한 기간의 사유와 함께, 현장의 느낌이 익숙해 질 때 까지 헤매거나 부딪힌 흔적이 묻어난다. 감각으로만 찍는 사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동석에게 사진은 자유의지로 자신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즐거운 유희이자, 현장에 집착할 때 오는 반복적이고도 긴 시간의 지루한 소비로 인해 꽤나 지겨운 노동일거란 생각이 든다. 80·90년대 구작에서의 해안가와 산골 오지에서의 지리적 헤맴도 그렇고, 근작인 「밤의 꿈」과 「가득 빈」연작에서도 긴 시간 동안 서울의 밤을 배회하며 숱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생생하게 느낀 것들의 즐거움과 고통이 작업동기로 작품의 바탕을 구성했을 터이니 말이다. ● 실제로 정동석은 2000년대 초반 약 2만 여명의 서울시민을 밤에 만나며, 그들의 삶과 꿈에 대해서 대화를 하고, 거기에서의 귀납적 사유와 감성을 토대로 「밤의 꿈>연작을 구상했다. 「가득 빈」연작은 바로 이 「밤의 꿈」의 경험을 다시금 연역하여 구축한 주제다. 여전히 현장성을 놓치지 않는 '무장된' 그의 시선에 의해 좀 더 간결하고 예민해진 조형어법으로 나타났다. 뚝심으로 현장에 매달리는 것은 사진과 작가적 이념과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진정성의 반증이자, 그가 상정한 주제를 리얼하게 작품으로 증명해 낼 수 있는 가장 큰 토대 일게다. 그렇지만 이런 것보다 더 두드러진 정동석의 장점은 독자적인 사진개념과, 문법과, 미적형식을 견인해 낸 그의 감수성이라 하겠다.
「가득 빈」연작 ● 불빛…, 주변의 검거나 흰 빈 공간. 불빛은 점으로 선으로 끊어질 듯 연결되며 간결한 흔적만 남긴다. 별이나 꽃 같다. 빈 공간의 꽃이니 '빈 꽃'인가. 예쁘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다가서면 그냥 예쁜 것이 아니라 삶의 토양에서 발아한 아름다움이다. ● 서울에서의 삶에 대한 단상을 정동석은 도심이나 변두리의 네온빛과 어둠의 풍경으로 제시했다. 사진에는 도심의 그 흔한 건물과 같은 입체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발광하는 불빛과 나머지 여백이 평면으로 자리하며 화면에 '가득 찬 어둠'을 '빈 여백'의 상태로 만든다. 아무것도 없다. 빛 주변 여백은 본래 사람의 흔적이 가득한 공간인데, 정동석은 텅 비어 있는 여백으로 바꾸어버렸다. 거기에 하얀 선이나 점의 동세만 남았으니, 대상을 재현하는 사진이라기보다는 안료의 물질성과 작가의 인위성을 소멸시키고 평면으로 환원한 중성적 미니멀 회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동석은 압축된 도시의 밤 이미지를 통하여 최대한으로 확산되는 서사를 그의 사진에 담지 함으로, 물질 자체의 사물성으로 환원하는 탈 이미지의 미니멀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 있다. ● 이 방식은 3차원을 재현하는 풍경사진과는 어긋난 궤도에 있다. 대상에 가해지는 광선과 명암의 생략으로 인한 발색(Tone)의 소거. 소실점(消失點)의 소실(燒失)로 원근의 거리감과 입체적 형상의 재현이 불가능해진 평평한 화면은 사진고유의 특성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사진의 가장 원초적 기능인 재현과, 반대로 재현의 무화(無化)를 통한 의미의 변용으로 사진과 회화의 경계에서의 새로운 표현이나 장르개념에 대한 실험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득 빈」연작은 네온 빛과, 그 빛을 둘러싼 어둠을 촬영한 것이 분명한 진짜 사진(寫眞)이다. 거리도 건물도 가로수도 어둠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거기에 남아있는 빛과 어둠은 물질이 아니므로 입체적인 질료도 형상도 없는 이미지로만 남게 되었다. 이 이미지가 갖는 실재나 환영에 대한 어떤 서술도 거부하는 이 풍경은 도시의 밤을 상징하는 기호로만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비어있음'은 도시에서의 삶과 정서를 뭉뚱그린 결정체다.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욕망과 의지가 환원되고 응축된 점이자 선이자 면이고, 다시 그 것들이 팽창하고 확산된 에너지이기도 하다. 비어 있으되 가득차고 가득 차 있으되 텅 빈 삶의 추상적 표지이기도(한편으로는 구체적 기호이기도) 한 이 화면은 블랙홀과 같이 도시의 모든 것들을 흡수하고 잠식한 상태다.
과거 도시의 밤은 빛과 어둠이 공존했었다. 낮이 양식의 축적을 위해 에너지를 쏟는 시간이면, 밤은 에너지를 충전해야 하는 휴식시간이었다. 이 휴식이 꿈이었다. 사람들은 어둠속에서 꿈을 꾸었다. 가족의 건강, 사업의 성공, 명예, 권력, 사랑, 학문, 애정…. 그런데 지금 도시의 밤은 충전보다는 소비에 가깝다. 밤은 인위적인 빛에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 인간에 의해서 타율적으로 밀려난 밤은 음습해졌다.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어둠에 안락하게 묻히기 보단, 빛을 찾아 욕망을 즐긴다. 꿈은 환락과 욕망, 유흥과 소비로 대체되어 버렸다. 거기에 알록달록 빛이 더 모인다. 거대한 빛의 감각의 제국. 그러나 어둠이 물러난 이 자리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인위적 빛을 보고 욕망을 꿈으로 착각한다. 사람들은 그 욕망에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 빛은 진리의 기표다. 어둠과 혼돈만이 있던 태초에 빛이 있으라는 '말씀'으로 비로소 세상이 인식 가능해진 창세기처럼, 빛과 언어는 인간이 로고스를 구현하는 첫 번째 단서였다. 빛으로 모든 생명의 탄생과 진화가, 언어로 사유와 소통이 가능했다. 그때의 어둠은 상상의 바다였다. 어둠은 빛의 조건이자 빛이 달리는 대지로 무궁무진한 생성의 가능성이 깃든 상징공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도시의 어둠은 꿈을 잉태하는 공간이 아니라 욕망의 기호인 빛에 억눌려 소외된 주변부이자 모순된 실제와 관념이 혼재된 카오스일 뿐이다. ● 빛과 어둠의 생태가 착종된 지금, 도시에서 산다는 건 괴물과 같은 생명력을 필요로 한다. 정동석은 욕망과 소외와 생존본능이 뒤엉킨 치열한 삶의 현장인 이 도시공간을 어둠으로 상정하고, 역설적이게도 생명현상이 발현하는 곳으로 보았다. 고정된 입장에서 세상을 분별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도시에서의 삶 자체의 생명력에 주목하며 '밤의 꿈'이라는 아름답고 추상적인 보편성으로 치환해 낸 것이다. 그 꿈은 삶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다. '가득 빈'은 작가의 이런 도시에서의 '밤의 꿈'이 좀 더 내면화된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이자 은유다.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응집이자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 밤의 네온 빛은 정동석에게는 생명현상의 상징적 기호이지만, 현실에서는 소비를 촉진시키는 자본과 욕망의 표상 아닌가? 이 욕망의 기호가 아름다운 생명현상의 표지(標識)라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작가는 이 욕망의 기호를 그의 사진형식과 역설적 어법으로, 가득 빈 삶의 꿈으로 바꿔버렸다. 열린 상징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 네온의 빛만을 취하고 어두운 곳에 희미하게 찍혀있던 도시공간을 더 검게 더 완전한 어둠으로 침잠시켜 버렸다. 네온 빛만 남고 모두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어둠이 원래대로 모든 것을 포근하게 감싸게 되었다. 그러자 욕망의 기호였던 네온 빛이 순연하게 조형적 빛으로 남았다. ● 그 결과, 피사체를 객관적으로 재현한 사실과 작가내면의 관념적 풍경이 공존하게 되었다. 실제와 관념의 개연성은 상호 의미를 뒤집으며 해석을 풍부하게 만든다. 또한 이 패러독스는 상징과 리얼리티를 넘나들며 이미지 안으로 연착륙한다. 소재와 상황에 대한 해석이 유동적인 과정이 되자 리얼리티는 오히려 더 극명해졌다. 도시의 도처에 있는 '욕망'을 기존의 선입관이나 이분법적인 판단과 경계를 넘어 '꿈'으로 전치(轉置)시켰으니, 이는 피사체의 철저한 재현인 사진이 그 재현을 넘어 또 다른 해석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의 객관적 풍경사진이 주관적인 입장을 담아내는 장으로 바뀌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의 사진은 사실적인 풍경이 아니던가. ● 정동석이 역설적으로 짚어낸 이 어둠은 우리 삶의 단편들 중에서 우리가 간과하거나 잊어버린 부분에 대한 반성이라 하겠다. 비유하자면 우리들의 눈과 기억에 잘 드러나며 기록된 주류 이데올로기의 역사가 노출된 것이 낮이라면, 긴 세월 소외되고 묻혀버린 많은 비주류의 삶들이 어둠 안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씩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갈수록 소외된 이들의 숱한 애환과 흔적들을 만나게 된다. 최대한 확장된 여백인 어둠을 정동석이 가득히 비어있게 상정한 것은 그 어둠속에서 생성되고 있을 이들의 에너지가 지향하는 열린 가능성의 세계 때문일 것이다.
정동석의 작업명제인 「가득 빈」은 이처럼 역전된 빛과 어둠의 시공간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주제의식을 언어로 표기한 수사다. '가득'과 '빈'이란 반어적인 의미를 조합한 이 문구는 법정스님의 '텅 빈 충만'처럼 일종의 禪적인 뉘앙스까지도 불러일으킨다. 그렇지만 구사 방식이나 화용(話用)에 따라 모든 어휘들이 실질적으로 구사되고 수용되듯이, 이 「가득 빈」이란 관념적 어휘도 구체적인 내용과 현장성으로 대체된다. 간단하고 견고한 화면 뒤로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그만큼 작가가 제공한 화면과 그 뒤의 인식이 깊고 넓다는 뜻이리라. ● 앞의 모든 서술은 정동석이 의도적으로 야기한 기존 사진어법에서의 획기적 일탈이자, 작업을 통해 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서울의 밤이 소재지만 그 밤은 구체적인 풍경이 아니다. 그의 작업노트에 기술된 바,"미분화未分化된 공간"으로서의 생성 가능성과 인위적으로 구획 지어진 온갖 구속과 경계를 무화시키고 자유롭고 싶은 생명현상이 발현되는 단면이다. 또 질곡과 같은 서울에서 숱한 사람들을 대면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가득 빈' 꿈을 수용하고 통찰한 이후의 정동석 자신의 마음이자 내면풍경이란 생각도 든다. 자신의 감성 한 끝 지점에서 사진의 사회적 맥락과 개념, 작업과정의 의미, 결과론적으로 제시된 이미지 모두를 보듬은 정동석의 밤풍경이 정갈한 마음과 같이 가득 비어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리고 광대한 내러티브를 이처럼 간단한 화면으로 이끌어낸 감각은, 고도의 필력과 집중을 동반한 선비의 견고한 일획처럼 부드럽되 예리하다. ● 벼리고 절제된 시각언어를 만든 작가가 제공하는 긴장에는 품격이 동반된다. 최소한의 이미지로, 혹은 기호로 축약되고 환원되면서 더 큰 울림을 주는 이유다. 그 토대에는 관찰자로서의 냉정한 입장과, 사람들을 이해하고 교감하려는 진실성과, 더불어 사진가로서 사진형식과 개념에 대한 일탈과 성찰이 총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을 찾는 것은 어렵지만, 찾았을 때 작품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그렇게 우리와 대화한다. 정동석이 그렇다. ■ 김진하
Vol.20100910a | 정동석展 / CHUNGDONGSUK / 鄭東錫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