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10_0908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코사스페이스_KOSA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37번지 B1 Tel. +82.2.720.9101 www.kosa08.com/home
탈주를 꿈꾸는 페르소나의 실체들 ● 안경문의 조각은 프란츠 카프카의 인물들을 떠 올린다. 『변신』의 그레고르나 「단식광대」의 주인공 같은. 물론 「단식광대」의 주인공은 '단식'과 무관하지 않고 또한 그것은 1924년 6월 3일에 굶주림으로 사망한 카프카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레고르는 갑충이라는 벌레로 '변신'했고 죽어갔으나 안경문의 조각은 그것들의 한 순간을 잡아 채 표현한 듯하다. 1991년 이후 그의 조각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자코메티가 보여주었던 실존적 인물상들처럼 앙상하게 말라 있는데,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조각은 자코메티식 실존주의의 '뼈'라기보다는 실존이 제거된 '미이라'에 가깝다. 살육의 시대를 건너 삶을 지속하는 자, 살아남은 자의 실존적 고독을 응결했던 1950년대의 '뼈(실존의 상징으로서)'는 내장을 들어낸 뒤 포장된 주검이 되고, 후일 재생/부활의 꿈을 꾸었던 '미이라'와는 미학적 해석이 결코 가깝지 않다. 안경문의 인물들이 카프카의 인물들과 오버랩 되는 지점은 바로 거기다. 그의 인물들은 미이라처럼 마치 나비를 꿈꾸며 고치가 된 애벌레들 같기 때문이다. 애벌레와 나비의 간극에서 우리는 현실과 비현실 또는 현실과 초현실의 3차원적 판타지를 상상할 수 있으나 작가는 오히려 그것을 허상과 실상으로 치환하여 보다 궁극적인 '인간의 본질'을 되묻는다. 고치가 된 애벌레는 허상인가 실상인가, 나비로 변신하는 애벌레는 나비인가 애벌레인가. 이러한 물음을 인간에게로 돌리면, 매 순간 현재를 살지만 곧 과거가 되어버린 시간들과 어디선가 밀려와 삶을 바꾸는 시간들 속에서, 우리가 속한 곳은 어디인지 묻는 것과 같다. '나'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는 지금 여기에서 이어질 뿐이라는 사실, 즉 존재했던 순간들과 존재할 순간들이 허상과 실상의 알레고리로 잇대어져 있다는 깨달음은 그 이후다.
고치, 나비를 꿈꾸는 존재 ● 90년대의 작품들은 인체형상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인체형상들은 유충들의 '탈아脫我-껍질 벗기, 허물벗기'와 닮아 있어서 때때로 우린 인간이 어떤 성숙을 위해 육체의 껍질을 벗은 것은 아닌지 의문한다. 1993년의 작품들은 어딘가에서 발견된 그런 허물들이다. 작품들은 거푸집에서 떠낸 단단한 물성의 형상들로 보이지 않고, 가벼운 가죽들처럼 말라비틀어진 형상으로 의자에 혹은 문살에, 벽에 달라붙어 있다. 그래서 그 형상들과 장소는 존재의 흔적들로 보이기도 하고 비현실적인 실존공간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런 흔적의 형상들이 깊게 사유하며 '존재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 1998년의 작품들이다. 그는 씨줄과 날줄을 엮듯이 줄을 엮어 '두상頭象'을 만들기도 하고, 가죽 같은 천으로 얼굴을 떠내기도 하며, 그런 허상의 가면으로부터 가늘고 긴 뿌리를 내리기도 하고. 2004년의 작품들은 그렇게 뿌리내린 존재들이 완전한 고치로 돌아간 형상들이다. 그는 미이라 같은 형상들을 비닐로 포장하여 세우고 매달았다. 온 몸을 파랗게 칠한 푸른 미이라는 아니 푸른 육체는 꿈꾸는 애벌레들처럼 두 팔로 자신을 감싸 안으며 자기에게로 소급해 들어가고 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새 삶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보여주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왜 그는 푸르게 살아 있으면서도 '새 삶', '다시 삶'의 부활을 꿈꾸는 것일까? 철학자 이정우는 『변신』을 탐독한 뒤, "하나의 삶, 하나의 세계, 하나의 상황이 극에 달하면 그 삶, 세계, 상황으로부터의 탈주를 꿈꾸거나 실제 어떤 식으로든 탈주가 발생하게 된다. 그레고르의 상황이 그렇다."고 언급하며, "열심히 일해 봤자 빚 갚는데 급급하고, 늘 시간에 쫓겨 시계를 쳐다보면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 그러면서도 메마른 인간관계에 황폐한 가슴을 가지고서 살아가는 현대인, 그런 현대인의 상황의 극한에서 변신이 발생한다."고 토로한다(『탐독』, 40쪽). 안경문의 인물들도 다르지 않다. 그의 인물들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들이다. 산자들이 고치를 짓고 들어 간 이유는 그들의 삶이 극에 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급급하게 쫓기고, 황폐해진 삶으로부터 탈주를 시작했다. 삶의 바깥으로 멀리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내부로 더 깊숙이 침잠해 들어감으로써 그들은 그들 본연의 자아를 깨우고 밝힌다.
자아, 탈주하는 얼굴 ● 새로운 삶, 다시 사는 삶을 위해서 삶의 내부로 들어가는 행위는 '나' 자신을 뒤집어 까기 위한 몸부림이다. 삶의 내부로 낮게 포복해 들어간 자만이 새로운 자아를 만날 수 있다. 삶의 빠른 무게를 내려놓고 멈춰 서 본 자만이 자신의 진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그것이 곧 탈주의 시작이다. 안경문은 고치로 들어간 인물들의 다양한 얼굴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탈주하는 얼굴들과 마주한 것이다. 2005년의 한 작품은 고치의 그물로 형성된 몸 위에 '돌' 얼굴의 인체다. 고치와 몸이 다르지 않은데, 선문답 같은 돌 하나가 머리로 둔갑해 있다. 그 돌은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막돌이자 강돌이다. 돌의 자연적인 물성이 인간의 머리라는 것은 곧 자연과 인간의 '일여一如'를 뜻한다. 이 놀라운 화두는 2008년의 석고두상과 쌍을 이룬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은 두루뭉술한 두상에 그는 붉은 색과 푸른색을 칠해 놓았다. 음양이 혹은 이理와 기氣가, 하늘과 땅이 모두 자연의 이치요 본질이라는 뜻일 터. 그는 바로 거기서 새롭게 출발한 듯하다. 2006년과 2007년의 '두상'들은 그런 본질에 대한 사유가 빼어난 상징으로 드러난 증거라 할 수 있다. 철과 스테인리스 스틸로 조각한 작품들은 '선조각線彫刻'의 특성을 살리면서 겉과 속, 허상과 실상의 이중적 실존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나는 두툼한 철판 라인으로 내면의 덩어리를 표현한 뒤 그 위에 스테인리스 스틸로 얼굴의 윤곽을 드러냈고, 다른 하나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된 겉 가면을 벗기면서 드러나는 얼굴을 표현했다(2006년 작품). 둘 모두 페르소나의 이중성을 은유화 하고 있다. 그런데 2007년의 얼굴은 투명하다. 겉과 속이 없다. 겉 같기도 하고 속 같기도 하다. 2005년의 돌이 투명하게 하나의 얼굴로 재생한 것이 어쩌면 이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드물게 보이는 그의 목조 작품들은 그로테스크한 페르소나의 실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페르소나야 말로 변신이 필요한 그레고르이며, 또한 우리 자신이다. ■ 김종길
전시명『내면 풍경』은 개인의 거주 공간의 의미와, 현대인의 마음속 무의식적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2중의 의미로 쓰였다. 한 사람이 바닥으로 꺼져 들어가는 듯한 피로감을 느끼며, 쉬고자 누웠으나 기울어진 바닥에 불안하게 붙어있다. 이는 이 공간의 주인공이자 공감하는 관찰자 자신일 수 있겠다.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불안한 현대인의 분열된 무의식적인 심리상태를 나타내며, 한편으로 그러한 심리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현실을 초월하고픈 욕구를 표현한 두상과, 메마르고 가시 돋친 현대 도시민의, 비를 기다리며 뜨거운 뙤약볕을 견디고 홀로선 사막의 선인장과 같은 심정을 그리고 있는 선인장, 자연스러움을 벗어나 인위적으로 꾸며지고 조작된 현대문명의 환경으로 표현된 어항 속에 머물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고뇌하고 반문하는 인물을 표현하고 있다. ■ 안경문
Vol.20100908c | 안경문展 / AHNKYUNGMOON / 安敬文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