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10_0901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_문영미_변시재
주최/주관_CAN Foundation 후원_파라다이스 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오래된 집 서울 성북구 성북동 62-10,11번지 Tel. +82.2.766.7660
낡고 오래된 집, 예술이라는 벽지를 바르다 ● 낡은 기와지붕이 얹혀져 있는 단층의 허름하고 오래된 집이 있다. 사람들이 이사 가고 난 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량하고 허름한 집, 한옥도 아니고 현대식 건물도 아닌 오래된 집엔 지나간 사람들의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 세대가 지나가고 또 다른 세대가 살면서 남긴 삶의 흔적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위해 헌 벽지 위에 새로운 벽지를 발랐다. 그렇게 벽지는 두꺼운 층을 이루며 공간의 역사를 기록해나갔다. 허름하고 오래된 공간, 비가 새고 곰팡이가 핀 공간은 점점 폐가로 변해갔다. 개발주의의 불도저가 공간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리기 전에 손을 써야했다. 그것은 바로 공간이 가진 이전의 흔적들에 예술가들의 손길을 덧대는 것이었다. ● '오래된 집 재생프로젝트'의 명칭은 이렇게 생성되었다. 그것은 몇 겹의 오래된 벽지 위에 예술적 벽지를 새롭게 바르고자 하는 행위였다. 그것은 주거환경으로써의 건축이 아닌 예술실천의 차원에서의 재생산이었다. 여기서 '재생'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쓸모가 사라진 낡고 허름한 공간이 예술을 위한 공간으로 재생된다는 것과 둘째, 작가 개인의 창작활동에 새로운 변화가 생겨나 작업의 활력을 찾는 생산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사실 반듯하고 깨끗한 공간을 제공하는 수많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비하면 '오래된 집' 레지던스는 시대를 역행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레지던스 공모엔 많은 작가들이 지원하였다. 2009년 8월 14일 레지던스 사전 설명회에서 직접 오래된 집 두 채를 보여주었고, 활용이 가능한 작가만 공모에 지원하라고 권고하였다. 그 만큼 낡고 허름한 집이었다. 공모결과 최종적으로 문영미, 변시재 두 작가가 선정되었다. ● 문영미는 실제 시골도시나 도시 변두리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집을 그리는 작가로 자신이 오래된 집 레지던스에서 활동해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변시재는 도시 건설의 붐 속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공사현장에 대한 생각들을 작품으로 옮기고, 오래된 집에서 이를 펼쳐보이고 싶어 했다. 두 작가의 생각을 실험하는 장소로 오래된 집은 아주 적합했다. 그렇게 오래된 집은 일 년을 작가들과 함께 했다. 삐걱거리는 문을 고치고, 오래된 집을 창작공간으로 바꾸어 그 안에서 작품 활동을 펼친 두 젊은 작가의 열정은 단지 공간을 재생한다는 의미를 넘어 작가 개인의 내적성장과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가능케 하였다. 삶의 역사가 묻어있는 낡고 오래된 집에 예술적 향기를 불어 넣은 문영미, 변시재 두 작가의 의미 있는 예술적 벽지를 감상해 보자. ■ 백곤
공간 재생을 통한 또 다른 시간의 탄생 - 오래된 집의 재생 프로젝트 ● 성북동에 있는 허름한 한옥에서 문영미, 변시재 두 작가가 지난 1년간 진행한 『오래된 집 재생 프로젝트』는 특화된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다. 작가를 공모하는 과정부터 이 장소의 특수성과 연관된 작업을 하려는 작가들을 염두에 두었고, 선정 작가들은 이곳을 물리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으로 활용하여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것은 레지던시 공간에서 오픈 스튜디오를 한다든가, 부속 공간에서 전시를 하는 경우와 비교될 수 있지만, 얼마 전까지도 사람이 살았던 이곳은 작업이나 전시를 위한 중성적인 공간이 아니다. 한옥이 거의 사라지고 있는 대도시에서 운치 있어 보이는 프로젝트 같기도 하지만, 입주 작가가 실제로 당면한 현실은 매우 가혹했다. 그러나 두 여성작가는 손수 공간을 보수하고 장소가 주는 불편함마저도 작품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이곳은 개발과 재개발이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구조가 만연한 한국사회에 남아있는 일종의 과도기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폐가로 방치된 공간은 예술 작업을 통해 다시 활성화되고 재생된다. 이러한 작업이 단지 빈 공간을 재활용한다는 기능주의적 단계를 벗어나는 지점은, (재)개발과 연관된 공간의 정치경제학이 우리 삶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 좁은 땅덩어리 때문인지, 한국사회에서는 유난히 부동산과 관련된 이해관계가 전사회적인 이슈로 작동해왔다. 항상성이 유지되어야할 삶의 터전마저도 이윤이 지배하는 시장의 주요 품목으로 간주되면서,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는 한국사회는 역동적인 변화의 와중에 놓여 있다. 방향이 이미 설정되어 있는 변화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가치로 대두된 한국사회에서, 공간은 오랜 시간이 축적되고 삶의 문화가 고이는 장소라기보다는 매순간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부동산 개발이나 예술적 재생이나 모두 변화를 추구하고 있지만, 전자가 명확한 이윤 논리에 따라 진행된다면 후자는 미지의 것을 향한다는 차이가 있다. 문영미의 화화 작품들과 변시재의 설치작업에서는 역동적(?)인 변화의 회로에 놓여 진 삶의 터전에 대한 향수어리면서도 비판적인 시각이 공존한다. 길지 않은 시간의 흐름에도 쉽게 쓸려 나가버리는 삶의 터전으로 전형화 될 수 있는 이 공간에서, 작가들은 지나치는 목격자이거나 단지 진기한 것을 수집하고 배열하는 식이 아니라, 그 내부로부터 시공간을 재생한다. ● 일반인들보다 민감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느껴진 바를 소통될 수 있는 예술적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한 작가들에게 그러한 경험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이 이 프로젝트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다. 급격한 파괴의 와중에도 남아있는 미세한 흔적과 기억들은 작가들에 의해 탐사되었다. 이들을 통해 추상화된 현대적 시공간의 연속성에 내재된 불연속적 단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가시적인 연속성을 추동하는 것은 근대화의 진보적 과정이다. 이 과정의 피폐함과 폭력성이 두 작가의 작품에 직간접적으로 표현된다. 이곳은 각 시기에 지배적인 공간의 정치경제학이 제안하는 유토피아와 유토피아 사이에 낀 헤테로피아 같은 장소이다. 개발이 유토피아를 지향한다면, 재생은 헤테로파아를 지향한다. 푸코에 의하면 '헤테로피아는 주어진 사회적 공간에서 나타나는 희귀한 공간들이며, 그 기능이 다른 것과 다르거나 심지어는 정반대'이다. 이곳에서 작가들은 이행 과정 중에 있는 공백 지대의 시공간에 대해 숙고한다. 아파트나 연립주택으로 대변되는 등질화 된 공간 사이에 낀 이 이질적인 공간에서 정적인 구조에 대비되는 생성과 소멸의 시간이 기록되는 것이다.
문영미; 삶이 발명한 형태에 예술적 색채를 입히다. ● 문영미는 이 집을 실제의 작업실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폐가에 가까운 장소를 작업 공간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빗물이 새지 않게 벽과 바닥에 시멘트와 에폭시를 바르고, 벽지를 뜯어내고 벽이 허물어지지 않게 만들며, 기와까지 다시 올리는 대공사를 손수 진행 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을 재발견한다. 실제로 이 공간은 흙벽 위에 시멘트, 그 위에 벽지가 발려 있는 등, 화석이나 지층처럼 여러 시공간의 층위가 복합된 장소이다. 이렇게 조성된 작업실은 공개된 생산의 현장이기 보다는 고립된 은신처 같은 사적 느낌을 준다. 오래된 집 한켠에 가득 쌓여 있는 그림들은 황량함을 밀도 있는 생산의 시간으로 전화시킨 작가의 의지를 전달한다. 이 집을 소재로 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이런 종류의 집의 외관을 그린 작품들이다. 종류도 다양해서 작품 소재의 수집을 위한 여행도 잦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장소는 실제로 떠나기 위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며, 여행자적 시점으로 포착된 스치는 풍경들에 리얼리티를 보충하는 원천이 되었다. ● 대부분의 작품들은 귀하게 수집된 표본들처럼 화면 한 가운데에 초상화 같은 정면성을 유지한 채 고정된다. 문영미의 그림에는 수집된 다양한 형태의 집들이 파스텔 톤으로 변형되어 있으며, 이러한 형태와 색채의 향연 외에 가축의 분뇨 냄새나 파도소리까지 울려 퍼질 듯 실감이 있다. 그러나 어떤 풍경이든지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람이 사는 흔적만이 남아있어 매우 적막하고 향수적이다. 문영미는 2차선 도로 양옆에 나지막한 건물들이 죽 서 있는 지방의 전형적인 소 읍네 출신이며, 작품에 시골에 대한 향수가 묻어난다. 도시인들이 시골과 접할 수 있는 가장 흔한 인터페이스는 길가의 상점들일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 나타난 상가들은 「수퍼마켓」(2009)이나 「소문난 집」(2010)이란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허름하다. 주인과 손님은 물론, 무엇을 파는 곳인지조차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거기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기 직전의 것들에서 풍겨 나올 법한 멜랑콜리가 있다. 대부분 상가들은 거리를 향해 건물의 얼굴을 내밀고 있으며, 그 방향으로 의자도 놓여 있다. 그것들은 아직 배우들이 등장하지 않은(또는 사라진) 무대세트 같은 느낌을 준다. ● 문영미의 풍경에는 삶의 발명품이라 할 만한 구체적인 사물과 배치가 볼만하다. 아래에는 상가이고 위에는 살림집인 「희운 이용원」(2008)은 예기치 못한 구성요소들이 복합되어 있으며, 최근작인 「주유소」(2010)에는 분홍 슬레이트 지붕을 가진 일반 가정집 같이 생긴 주유소가 독특하다. 작품 「창고」(2010)는 기능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이상한 평면의 조합으로, 지금은 사라진 구식 기계가 있는 장소로 추측된다. 옛스러운 집과 현대적 사물이 조합된 작품들은 초현실적 느낌을 준다. 그러나 사물과 상황이 날것으로 맞부딪히는 식의 초현실성은 아니다. 그녀는 찍어온 사진들을 컴퓨터에 옮겨 형태 정리나 색채 보정 같은 작업을 회화로 옮기기 이전에 수행한다. 이렇게 정리된 화면에서 여백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고, 이 여백을 채우는 파스텔 톤의 색채가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 작품 「제주도」(2009)는 보라색 대지와 베이지색 하늘 사이에 낀 평범한 비닐하우스를 시적인 풍경으로 만든다. 대부분 1-2층의 나지막한 구 건물의 지붕들이 이고 있는 허공은 매우 광활해서, 고개를 많이 꺽지 않으면 하늘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빌딩숲에 사는 도시인의 향수를 자극한다. ● 향수적이고 시적인 정감으로 가득한 건물 외관은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오래된 집과 같은 계열의 내부 공간을 가질 것이다. 총괄적인 설계나 디자인이 아니라, 여러 시공간대가 중첩되어 형성된 이 오래된 집들의 안팎은 인간의 심리구조와도 유사하다.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에서 말하듯이, 여러 시간대가 중첩된 복잡한 집의 이미지는 인간의 내밀한 존재의 지형도가 되는 것이다. 안과 밖의 공간적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들이 집 안에 있다면, 마찬가지로 집 또한 우리들 안에'(바슐라르) 있다. 지금은 낯설어진 오래된 집의 공간적 배치는 그 안에서의 삶을 추적하게 하면서 공간화 된 추억의 형태로 집약된다. 이곳은 밖의 적대적인 힘으로부터 내부의 존재를 보호한다. 물론 이 보호는 열악한 물리적인 구조상 한계가 있는 것이지만, 이곳이 다름 아닌 작업 공간으로 변모하면서 단지 개발에서 소외된 지역을 넘어 밀도 있는 이질성으로 채워진다. 그곳은 강제된 변화의 바람 바깥에 존재하면서 은자의 가난함을 받아들이는 예술가의 거처가 된 것이다. ● 근대화로 집약되는 외부로부터의 강제된 변화는 도시 전체를 수직수평의 격자로 구획된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유폐는 안과 밖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다만 각자가 위치한 시공간을 얼마만큼 내밀한 것으로 변모시키는가에 따라 세상이라는 거대한 감옥으로부터의 상대적 자유가 보장될 뿐이다. 그러나 내밀한 영역들의 파괴는 점차 가속도가 붙는다. 작가는 계급의 격차를 벌릴 뿐인 개발을 추동하는 업자들에 대항하여, 그것들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작품을 통해서나마 수집하고 보존하며 기억하려 한다. 발 빠른 변화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자들을 더욱 가난하게 하는 강제된 변화의 바람은 지상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삶의 터전을 무화시킨다. 가난은 보이지 않는 것, 보여 지지 말아야 할 것이 된다. 문영미의 작업은 이 지워진(질) 존재들을 정리된 형태와 정감어린 색채를 입혀 물질화한다. 그녀의 그림은 막 사라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작은 기념비들로 채워진다. 과도기적 거처들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작은 기념비들은 무의식마저도 코드화시키려는 시장의 힘에 대항하여, 지금 여기와는 이질적인 시공간대로 이동시킨다.
변시재; 기억과 상상에 의한 치유 ● 변시재의 작품에서 우리 삶의 터전은 공사장의 천막에 가려진채 수수께끼처럼 등장하며, 포장되어 이동 가능한 손잡이가 달려 있곤 한다. 집은 대지에 굳건하게 뿌리박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 중인 과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으로도 희극으로도 보여 지지 않고, 마치 맹목적 자연처럼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의해 변모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작품 「demoli-creation」은 녹색으로 포장 된 집인데, 그 안에 영상이 투사된다. 언제라도 손쉽게 들려지고 이동되고 껍데기가 홀랑 벗겨질지 모르지만, 그 내부에서는 나름의 내밀성이 전개되고 있다.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는 붉은 새의 영상은 희망과 불안함을 교차시킨다.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변시재는 자연과 문명을 추상적으로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자체를 또 다른 생태계로 간주 한다. 아파트는 개발의 산물이고 더 많은 이익을 위한 또 다른 개발의 잠재력을 가진 주거지로, 그 자체가 포장된 상품 같은 면모가 있다. 개발지역에서 살았던 작가는 늘 눈에 띄던 펜스 천을 기억하고, 오래된 집을 재생하는 이번 프로젝트에 적극 활용한다. ● 변시재의 경우 이 이 집을 작업실로 사용하기 보다는 학생들과의 수업 등, 주로 프로젝트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은 들렀다고 한다. 입주 당시에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이곳에서 작업을 시작하면서 많이 좋아져서, 자신을 치유하는 공간의 상징으로 초록색 집을 만들었다. 예술가가 도시를 치유한다는 과대망상을 가지기 보다는, 자기 스스로를 치유한다는 소박한 목표에 방점을 찍었다. 이 공간에서 이후 정식 전시공간에서 발표될 작품들이 시작되었고, 레지던시의 마무리를 전체 공간을 설치하는 것에 할애했다. 작가에 의하면, 우유 곽 같이 생긴 종이 집은 과거의 생각을, 초록색 집은 현재의 집을, 무지개 하우스는 바라는 공간을 제시 한다. 현재의 경우 집은 공사 현장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 영상은 대지가 숨을 쉬듯이 움직이고 건물들이 자라나며, 도시 전체가 만들어지는 모습이다. 작품 「operating city」는 개복 수술을 하는 듯한 장면이다. 폐같이 생긴 형태 안에서 기계적인 형태들이 나오고 피 묻은 새가 날아다니며, 톱니바퀴에서 돋아난 크레인들이 시계처럼 돌아간다. ● 파괴와 생성이 공존하는 현장에서 시간은 어김없이 과거에서 미래를 향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보인지 퇴보인지 작가는 명확히 제시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작가는 건축물이라는 고도의 인공적 형태에서 움트고 성장하는 자연적 힘을 강조한다. 공사장 펜스용으로 많이 사용하는 무지개 천으로 싼 휴대용 하우스를 표현한 작품 「불편한 관계 속에서 그를 만나다」에서는 공간 내부에서 자라나 빛을 향해 굽어 올라 밖으로 뻗는 나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드로잉 작품들에는 화분같이 비좁은 한 뼘의 공간 안에서도 살아가는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가진 집들이 명확한 논리와 방향성이 없는 뿌리줄기처럼 이어져 있다. 대지에 깊이 자리 잡은 나무 같은 굳건한 뿌리가 부재한 그것들은 취약해 보이면서도 강인하다. 그것이 콘크리트 정글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대안적 방식인 것이다. 레지던시를 마무리하는 설치 작업에서 변시재는 이 오래된 집을 무지개 천으로 모두 싼다. 그것은 추후에 있을 재개발 뿐 아니라, 작품을 통한 공간 재생이라는 상징을 중첩 시킨다. 작가는 이 오래된 집을 '상상하고 추억하는' 공간으로 만든다. ● 그것은 레지던시를 위해 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낡은 시간표에서 시작된 것이다. 오래된 집은 작가의 유년기와 교차되면서 치유와 갱신의 공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들은 균열과 불연속성을 두드러지게 하지만, 이 틈들을 녹색 생장의 에너지로 채워나간다. 칙칙한 회색 공간으로 남아 있던 그곳은 시간여행을 통해 아이 같은 천진한 눈으로 환상적인 놀이 공간으로 변모한다. 애증의 대상이었던 현대 도시를 서술하기 위해 어린아이나 이방인의 시점을 되찾고자 한 발터 벤야민처럼, 작가는 오래된 집을 변모의 무대로 삼는다. 그램 질로크는 발터 벤야민에 대한 연구인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상상과 추억이 전제하는 시공간에 대해 '기억들이 소우주 안에서 서로 마주쳐 강력히 자라는 동안, 기억은 작은 것에서 좀 더 상세한 더 작은 것으로, 가장 작은 것에서 무한소로 진보 한다'고 말한 벤야민을 인용하면서, '사건과 형상이 과거로 물러가면 사건과 형상의 높이는 작아지지 않고 오히려 커진다'고 말한다. ● 변시재의 작품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공간적 스케일과 시간적 순서의 뒤죽박죽은 이 작은 집을 미로처럼 만든다. 감싸인 거대한 포장 막은 중심과 주변의 명료한 관계를 파악할 수 없는 표면적인 시공간, 즉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한다. 거대한 나무가 집 내부로부터 자라나는 이미지는 안과 밖이 기묘하게 연결된 위상기하학적 도형을 떠오르게 한다. 거기에는 미니멀한 형식 속에 내재된 연극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가 있다. 작가가 의존하는 기억은 정확한 시공간을 재현하는데 있다기보다는, 공간과 기억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성이 주목한다. 그것은 공간과 기억을 동시에 변모시킨다. 그램 질로크는 벤야민의 예를 들면서, 기억과 도시는 서로 스며든다고 말한다. 기억은 도시환경을 형성하고, 도시환경은 다시 기억을 형성하는 것이다. 기억은 도시와 유사하게 전개 된다. 명확한 지도가 없는 이 여로에서 여행자는 빈번히 길을 잃지만, 헤매는 것은 또 다른 것을 발견하기 위한 방편이 된다. 이 미로적 시공간 속에서 아이의 놀이 같은 유희적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놀이의 모델 속에서 매번 낯설게 변화하는 세상과의 화해가 일어나며, 그것이 작가가 말한 치유 과정이 아닐까. ■ 이선영
■ 멘토링 프로그램 ○ 일시_2010_0723_금요일 오후 3시~5시 ○ 방식_작가 2인과 참여멘토 1인이 만나 작품에 대해 논의. ○ 참여멘토_이선영(미술평론가)
■ 약도 ○ 대중교통 이용시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 - 마을버스 3번, 일반버스 1111번,2112번 승차 - 홍익중고등학교역 하차(3정거장) - 선잠단지 우회전 50m직진 - 우회전 ○ 일반차량 이용시 한성대입구역 사거리 - 성북동 방향 1km 직진 - 선잠단지 50m 직진 - 우회전
Vol.20100904d | 삐걱거리는 문을 고치다展-오래된 집 재생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