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NE

차주용展 / CHAZOOYONG / 車朱庸 / photography   2010_0901 ▶ 2010_0907

차주용_산성#01_C 프린트_90×180cm_2007

초대일시_2010_090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공휴일_11:00am~07:00pm / 마지막날_10:00am~12:00pm

갤러리 룩스_GALLERY LUX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82.2.720.8488 www.gallerylux.net

십자가들의 도시, 그 진부한 풍경을 더 깊이 읽는 법종교는 성스러움의 경험에서 생겨나며, 그 경험의 표현이다. ( 루돌프 오토) /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민중의 아편이다. (칼 마르크스) / 누구나 한 번쯤, 아니 어쩌면 자주, 전동차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차창 밖으로 십자가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둠이 내리면 불이 켜진 십자가들의 행렬은 더욱 도드라진다. 십자가로 가득한 도시.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이 된지 이미 오래다. 너무 흔해서 진부하기까지 한 풍경. 차주용 작가에게서 이번 전시회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떠오른 생각도 그랬다. 십자가 풍경이라니, 빤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사진 작품을 보고 금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들의 실루엣을 어렴풋이 본 적은 있지만, 정작 이제껏 그 풍경을 또렷이 제대로 본 적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차주용_미아#01_C 프린트_113×200cm_2010

인간 문화의 모든 요소가 그렇듯, 종교는 양면적이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주기도 하지만,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거나 만용을 부리게 만들기도 한다.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생명을 죽이고 갈등과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종교란 성스러움과 소통하며 삶의 궁극적 물음을 풀어가려는 진지한 모색이라는 낭만적 견해, 그리고 종교란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며 망상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아편이라는 비판적 견해, 어느 쪽이나 종교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못하는 건 이 때문이다. ● 그런데 많은 경우 종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아주 편리하다. 믿어버리거나 치워버리거나, 대개 둘 중 하나다. 어떤 이들에게 종교란 무조건적인 믿음의 영역이다. 불합리할수록 믿음은 더욱 강해진다. 따지지 말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이성이란 한낱 거추장스런 장애물이거나 기껏해야 장식품일 뿐이다. 반대로, 어떤 이들에게 종교란 망상의 영역이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종교에는 불합리한 점들이 너무 많다. 종교라면 당장 알레르기부터 일으키는 그들에게 믿음이란 이성으로 물리쳐야 하는 기만일 뿐이다. ● 사실, 어느 쪽이든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무조건적인 믿음은 쉽게 맹신과 독선으로 치닫고, 이성 절대주의는 쉽게 냉소와 오만으로 변질된다. 둘 다 역사 속에서 갈등과 폭력의 빌미가 되곤 했던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후자보다는 전자가 더 해롭다. 믿음은 '믿게 되는' 수동적 행위인 반면, 이성은 '추론하는' 능동적 행위다. 믿음이 타고난 감각이라면, 이성은 길러지는 능력이다. 이성이 믿음보다 연륜이 짧은 것은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이성에는 자기-비판이라는 자정 능력이 있는 반면, 믿음에서는 이런 비판의 포기가 오히려 더 큰 미덕이라는 점이다. 이성이 변질되는 경우보다 믿음이 변질되는 경우가 좀 더 많은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차주용_미아#02_C 프린트_113×200cm_2010
차주용_화정_C 프린트_50×40cm_2009

십자가가 즐비한 풍경을 보면서 한 마디 논평을 던지기는 비교적 쉽다. 값싼 구원, 천박한 믿음, 치열한 경쟁…. 온갖 부정적인 어휘를 구사해가며 개신교라는 종교를 비판하면 되니까 말이다. 이 땅에서 한 세기가 넘는 역사를 거치고도 여전히 문화적 타자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개신교에는 물론 비판받을 만한 구석이 있다. 개신교가 우리 사회에 선사한 많은 유익한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툭하면 불거지는 개운치 않은 소식에 이내 묻혀버리고는 한다. 그래서 개신교처럼 사람들이 '신자' 아니면 '안티'로 확연하고 깔끔하게 양분되게 만드는 종교도 참 흔치 않다. ● 하지만 사실 즐비한 십자가는 개신교라는 특정한 한 종교만의 자화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종교 문화, 나아가 우리 사회 자체의 적나라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것은 맹신과 독선이 체질화된 우리 자신의 초상화다. 간편한 해답을 찾아 헤매고, 이게 답이다 저게 답이다 하는 말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개신교만이 아니라 대개의 종교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아무런 의심 없이 쉽게 믿어버리고는 오히려 의심하는 사람을 매도하는, 그래서 세상을 우리 편과 너희 편으로 깔끔하게 갈라버리는 우리 사회 자체의 모습이기도 하다. 값싼 인스턴트식품 같은 구원의 맛에 길들여진 채, 여기에 길이 있다 저기에 길이 있다 하는 소문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모습도 그렇다. 그것은 개신교만의 모습도, 종교들만의 모습도 아니다. 그것은 소중한 가치들을 내팽개치고서라도 돈과 성공 그리고 허세를 좇는, 그런 것들에서 구원을 찾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맹신과 독선에 빠진 종교인들도 문제지만, 우리 사회 전체가 종교 못지않은, 아니 종교보다 더 심하게, 맹신과 독선과 찌들어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차주용_장한평_C 프린트_60×80cm_2009

십자가가 즐비한 풍경을 연출한 장본인은 개신교이고, 따라서 카메라의 포착된 그 풍경을 보며 일차적으로 개신교라는 종교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십자가들은 단지 그 획일적인 스타일과 규모와 그리고 색깔로 인해 조금 더 도드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 밑에는, 둘레에는, 뒤에는,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아도 엄연히 우리 종교문화 전반의 맹신과 독선, 나아가 우리 사회에 가득한 맹신과 독선이 깔려 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단순한 하나의 오브제가 아니라, 우리 종교문화와 사회를 반영하는 기호요, 우리가 그 심층으로 파고들어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는 상징이다. ● 어렴풋이만 보았고 그마저 기억의 파편 속에 묻어두었던 십자가들의 실루엣이 뚜렷한 명암과 세밀한 선, 절묘한 구도와 눈부신 색채의 사진 속에서 지금 우리 눈앞에 선연하게 펼쳐져 있다. 진부한 소재에 생명을 불어넣고, 지루하고 그리 아름다울 것 같지 않았던 풍경에서 뭐라 딱히 표현하기 힘든 슬픔과 아름다움마저 느껴지게 만드는 사진들. 저 십자가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우리에게 무슨 말을 요구하고 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흑백논리에 갇힌 이야기는 아니어야 할 터. 맹신과 독선에 갇힌 우리 사회와 종교의 그늘진 면에 관한 이야기든, 우리 사회와 종교를 건강하게 지켜줄 합리와 공존의 밝은 면에 관한 이야기든, 모든 이야기는 결국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십자가들이 덩그러니 우리 시대의 상징으로 도드라져 있는 저 풍경의 이면에는, 비록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어도, 희망과 절망, 이성과 맹신, 이기심과 이타심이라는 온갖 모순과 양면성을 지닌 채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십자가들의 풍경이 말해주는 것, 우리가 그 풍경에서 읽어내야 할 것은 바로 그 사람들,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다.

차주용_배봉초교_C 프린트_100×200cm_2009
차주용_산성#04_C 프린트_63.5×200cm_2007

사진 촬영 기법은커녕, 사진 작품을 감상하는 법조차 모르는 문외한이지만, 사진 작업이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깊이로 현실을 포착해내려는 분투라는 건 안다. 사라질 것들을 기억 속에 붙들어두려는 노력이라는 것도 안다. 사진이나 언어나 모두 현실의 재현이기는 마찬가지지만, 언어란 재현된 것의 재현이고, 그만큼 현실로부터 더 멀다. 그래서 사진은 가진 거라곤 언어밖에 없는 나 같은 먹물쟁이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숙제를 던져준다. 사진이 재현해 보여주는 저 풍경에 대해 무슨 말이든 해보라고. 어렵지만 고마운 숙제다. 사진 속 풍경의 빛과 어둠, 선과 여백을 읽어내려면 예리하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은 시선의 힘을 길러야 한다. 읽은 것을 말하려면 그만한 폭과 깊이를 지닌 언어의 도구를 연마해야 한다. 사물을 읽는 시선과 사람들에 관해 말하는 언어를 가다듬을 기회를 선물해준 차주용 작가에게 감사를 드린다. ■ 김윤성

Vol.20100827g | 차주용展 / CHAZOOYONG / 車朱庸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