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9:00am~06:30pm / 주말 휴관
송은갤러리_SONGEUN GALLERY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82.2.527.6282 www.songeun.or.kr
집은 사람을, 사람은 집을 만든다 ●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자 전시제목인 '금광석'은 1톤에 몇 그램 만 있어도 금속으로 정제되는 광물질로, 무엇인가로 변신하고 정련되는 과정에 투입되어야 하는 어마어마한 물질적, 기술적, 그리고 심리적 에너지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위대하다고 해야 할지 잔혹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는 과정이다. 박대성의 모든 작품에는 돌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예술작품에 쓰였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볼품없는 돌멩이들이다. 그는 마치 새가 집을 짓기 위해 자신의 몸을 이용해 가져올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재료들을 물고 오듯 돌을 찾아다니며, 수집된 돌을 작업에 활용한다. 현실 속에서 정확한 평균치와 부합되는 대상을 만나기 오히려 힘들듯이, 너무나 평범한 것은 막상 찾기 어렵고 이를 위해서는 오랜 방황을 거쳐야 한다. 그렇게 마련된 돌은 그것이 정초를 이루는 집을 만들지만, 그 집은 비바람을 막을 수도 몸을 완전히 숨길 수도 없다. 영원히 완성될 것 같지 않은 이 집들은 계속 진행형이다. ● 대형 설치 작품 「금광석」은 전면의 작은 돌 뒤로 밝은 색 집 틀같이 보이는 것들이 여러 겹 나열되어 있다. 작은 돌로부터 시작된 몇 겹의 틀은 순차적으로 커지면서 여러 단계의 형태의 변주를 보여주다가 벽면에 붙은 마지막 국면에 가서야 지붕이 뾰족한 집의 전형적인 도상으로 귀착된다. 이어지는 공간적 형태의 변주는 시간의 추이를 보여준다. 땅 속의 돌은 마치 씨앗처럼 성장과 변신을 거듭하는 것이다. 작고 단단한 돌들에서 속이 텅 비고 취약해 보이는 틀로의 진행은 무언가를 새로 채우기 위해 속을 비우며, 돌덩어리의 냉랭한 기운을 보다 온기 있는 상태로 변화시킨다. 사진작품 「금광석으로」는 설치 작품에 대한 부연설명이며, 거대한 부피들의 시작점인 작은 돌을 강조하고 있다. 동명의 철조작품에도 돌이 등장하는데, 바닥이 3미터가 넘는 구조물 한 켠에 얹힌 돌은 물리적이 아닌 상징적인 무게감을 내포한다. ● 마치 지어지고 있는 집의 긴 그림자처럼 보이는 바닥 면은 돌을 위한 움푹 패인 자리가 있다. 철 구조물과 돌의 관계는 서로의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순환적 관계를 이룬다. 그 자연스러운 형태와 단단한 존재감으로 인간을 떠오르게 하는 돌은 집 안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밖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돌로부터 정제된 재료인 철의 상징성은 인공적 구조와 자연적 덩어리의 대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집은 인간의 연장이며 인간을 보호해 주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박대성의 작품에서 집은 과정 중에 있거나 해체되고 있다. 집과 동렬에 놓인 인간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집이자 주체는 사라짐으로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어릴 때는 물론, 프랑스에 있던 몇 년 동안에도 수없이 이사를 다녔지만 그에게 집은 영원히 정착 가능한 안식처 같은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매번 바뀌는 주거지는 자신의 상태를 반영하는 사회적인 기호나 문자 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현대 언어학은 기호나 문자 자체가 지시대상으로부터 계속 미끌어지는 유목의 상태임을 강조한다.
박대성에게 집은 그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무엇이며, 그 사이에서 한시적인 기간 동안 유랑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극히 나약한 변종에 불과하다. 집을 짓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철, 나무, 돌 외에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석고라는 재료는 부서지지 쉬운 인간의 몸을 상징한다. 작품 「돌_석고」는 석고 덩어리가 해체된 상태를 보여주는데, 그 옆의 사진작품에는 돌과 아귀를 잘 맞추어 집의 형태를 갖춘 이미지가 보인다. 이 작은 작품은 다른 것에 비해 돌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사진과 설치로 구현된 이 작품은 구조의 기반을 이루었던 실체인 돌이 빠지자 구심점을 잃고 와해 되어버리는 상황을 대조한다. 보다 긴 시간의 주기를 생각하는 작가에게 자연물과 인공물 사이에는 분명한 위계가 존재한다. 서양 건축보다 자연에 더 순응하는 한옥 구조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덤벙주초」는 돌 위에 기둥처럼 세운 참나무를 통해 인간과 집의 관계를 나타낸다. ● 돌을 기반으로 해서 세워진 나무 기둥 위은 말단 부분에서 집의 형태로 변모하고 그 안에 사람의 실루엣이 새겨진다. 사람 안에는 심장이,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의 형태가 빈 구멍으로 남아있다. 집은 사람이고 사람은 집이지만, 이러한 상호성이 가능해지는 것은 서로를 비움으로서이다. 박대성의 작품 속 집은 개인의 내밀한 공간이자 은신처, 즉 자신에게 속한 잡다한 것들을 모아놓는 전형적인 집의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다. 현대사회가 되면서 모든 것이 추상화되고,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분리되는 가운데 집은 사회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만능 해결책으로 부상했지만, 공적 영역과 분리된 사적 영역은 때로 감옥으로 전화한다. 사적영역이 공고해진 근대 시기에 예술작품의 주요 무대는 고립되고 유폐된 자아의 또 다른 모습인 밀실공포증적 공간이었다. 모더니즘은 사적 공간 내부에 가득 쌓아 놓은 소유물들과 어우러져 발생하는 눅눅한 판타지의 세계와 분리불가능하다. ● 자기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그리고 그 영역에 소유물을 보다 많이 축적하기 위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가속화된 것도 바로 근대이다. 축적은 타인을 억압하지만 종국에는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부메랑이 된다. 물론 안이 없는 바깥만의 삶 역시 피폐 하긴 마찬가지이다. 박대성의 집은 안과 바깥, 사적인 영역과 공적 영역의 분리와 구별 대신에, 점진적인 전이의 지대가 있다. 안과 밖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이 잠재적 공간은 주체로도 객체로도 환원할 수 없다. 가령, 박대성의 이전 작업 중 새집을 모티브로 한 작품은 이 잠재적 공간의 의미를 잘 살리고 있다. 그것은 실제의 새집이 그러하듯 특별한 도구를 통한 가공이 불필요한, 주변 환경으로부터 주어온 것들이면서 그 자체가 몸의 산물이다. 새가 물고 오는 재료들은 자신의 체액과 깃털, 그리고 몸의 압력을 통해 집으로 만들어진다. 그것은 개체를 보호하고 감싸지만, 동시에 우주로 열려있다.
솟대를 닮은 작품 「덤벙주초」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중심으로서의 인간-집을 강조한다. 그것은 지상에 뿌리를 박고 있지만 하늘을 향하는 중간적이고 과도기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투사한다. 어떤 문화이든 집의 건조에는 상징성이 내재되어 있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집을 짓는다는 것은 세계의 재건이라고 말한다. 지속성과 현실성을 위해 새로운 주거나 도시는 건조의 의례에 의해서 우주의 중심에 투영되어야 한다. 그것은 각각의 건조물을 중심으로 만드는 우주의 여러 차원의 교차점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조직화되고 우주화 된 중심을 갖춘 공간이나 영역을 확보하는 행위에는 신에 의한 세계창조나 예술가에 의한 작품의 창조에 비견할 만한 차원이 있다. 집은 우주화 된 공간이며 그자체가 소우주인 인간에 상응한다. 그러나 이 상징적 중심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가변적이다. 인간은 더 이상 지상에 우뚝 선 중심적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다. ● 박대성의 작품에서 돌은 상징적 우주에서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돌 그 자체는 우연적 산물이다. 작가는 돌 수집 과정의 우연성을 강조한다. 중심을 설정하면서도 그것을 해체하는 식의 발상이 여러 작품에서 감지된다. 덩어리는 수많은 겹으로 확산되거나 아예 사라져버려서 그 위에 건립된 것들을 와해시켜 버린다. 그의 작품에서 해체는 붕괴라는 부정적 이미지로 비추어지지 않으며, 꽉 옥죄었던 것이 풀어지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늘과 땅을 잇는 인간-집은 그 내부가 텅 비워 있으며, 바깥으로 투영됨으로서 비로소 형체가 드러난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돌은 우연하게 발견되어 어디든 잠시 머무른 곳의 정초석이 되어 우주의 여러 영역들 사이를 연결하는 중심이 된다. 자신으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와의 강밀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중심은 존재하지만, 그 중심은 여럿이며, 무시간적 진공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동한다. ● 선사시대의 유적 등에서 알 수 있듯, 돌은 인간의 불안정성에 비교되는 항구성이라는 상징성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여러 모로 중심이 상실된 현대에 초월적 실재의 상징성은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박대성의 작품에서 돌은 변치 않는 정초가 아니라, 변모의 씨앗이며 촉진제가 된다. 그것은 마치 연금술적 대상처럼 변화무쌍한 과정 속에 놓여 있다. 광물은 양적, 질적 차원의 변모를 거치며 우주창생의 신화를 반복한다. 최초의 시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확대 변주되는 과정들은 확고한 동일성이라는 범주를 와해시킨다. 사유하는 자신으로 귀결되는 철학적 동일성의 개념은 세계를 주체의 대상으로 삼을 뿐이다. 그것은 수직 수평의 격자로 환원된 도시 문화 생태계에서 전형적이듯, 주체를 소외시키고 객체를 도구화 시킨다. 그러나 박대성의 작품에서 집-인간의 형상에 는 넉넉하게 마련된 타자의 자리가 있다. 그것은 지상의 한 장소에 유폐되어 음울하게 독백하는 존재를 세계와 대화하는 존재로 전환시키는 열린 공간이다. ■ 이선영
머리속에 떠돌아다니는 형상을 실제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짓이 아닐까? 오늘의 시작도 그리 편치 않았다. 발걸음을 옮기 전 은근슬쩍 들었던 불안한 생각은 역시나 예감 적중.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무심코 지나쳐버린 돌멩이 생각에 몹시 아쉬움이 남는다. 더 그럴싸한(?) 돌멩이가 있을지도… 사실 그 안에는 욕심과 게으름에 원인이 있음을 잘 알면서도 이런 짓을 매번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에 오늘, 다시 한 번 울화가 치민다. / 내가 찾아 헤매는 그럴싸한 돌은 바위인지 돌멩이인지 나도 아직 모르겠다. 그저 내 몸이 허락하는 무게의 물체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난 그 모양새도 색감의 특징도 멀리했다. 너무나 쉽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유용함도 없어서 눈길조차 보내지 않는 돌을 찾는다. / 그런데 산에서 강으로 그리고 인적 드문 길에서조차 ... 없었다. / 과연 나의 생각을 닮은 돌을 찾을 수 있을 지 난감해진다. ■ 박대성
Vol.20100827c | 박대성展 / PARKDAESUNG / 朴大成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