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임현수展 / LIMHYUNSU / 林賢洙 / sculpture   2010_0825 ▶ 2010_0831

임현수_흔적_레진_48×17×13cm_2010

초대일시_2010_0825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_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상처의 풍경, 상처의 초상, 그리고 상처의 얼굴들 ● 임현수의 작업의 주제는 상처다. 여러 경로로 상처를 다루는 작가들은 많지만, 유독 상처 자체에 주목하고 상처를 주제화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독특하다.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성질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상처의식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본성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다른 동물들도 상처를 의식하지만, 유독 인간만이 그 상처를 내재화하고 곱씹고 자의식으로까지 부풀리고 정교하게 다듬는, 그리고 특히 사고를 위한 재료로서 상처를 사용하는 유일한 동물이 아닐까. 인간은 유형무형의 온갖 상처를 떠안고 산다. 삶은 곧 상처다, 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개인과 제도와의 관계로부터 파생된 사회적인 상처, 예기치 못한 사고와 의식적인 사고(예컨대 자살 같은)가 몸과 마음에 생생한 흔적(상흔)을 남기는 개인적인 상처, 그리고 특히 그 원인을 알 수도 치유할 수도 없는 존재론적인 상처(트라우마)에 이르기까지. 이 상처들은 사람을 숙연하게 한다. 상처가 결여와 결핍으로 나타난 존재론적 조건과 한계를 주지시켜주고, 좀 거창하게 말해, 죽음이 삶에게 건네준 흔적으로써 존재의 원인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 비록 상처 자체를 주제화한 것은 이번 전시가 처음이지만, 사실 작가는 진작부터 이런 상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렇게 반응한 것을 전시로 풀어냈던 것 같다(특별히 내세운 주제가 없어서, 혹은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신미술관 전시에서의 개인적인 상처와, 전작에서의 사회적인 상처가 그렇다. 그리고 근작에서의 타자의 상처에 이르기까지. 사실 상처에 대한 언술은 일정한 가정법을 피할 수가 없다. 상처는 인식의 문제라기보다는(어떤 상처) 감각의 층위에 속하며(얼마만한 상처), 타인이 그 상처의 강밀도를 파고들어 나누어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며, 나아가 모든 상처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층위에 속하기 때문이다(물론 그 와중에서도 일부 사회적인 상처와 같은 예외의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 이런 가정법을 무릅쓰고 전작(신미술관 전시)을 보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사랑 소유 집착」이다. 서로 맞잡은 손을 바느질로 꿰매놓은 이 사진 속 이미지는, 사랑하던 여자의 머리를 장식하던 리본을 몰래 가져와 그 리본에 달린 핀으로 자신의 생살에 고정시킨, 영화 속 남자가 생각난다(마농의 샘이었던가?). 그리고 그동안 주고받은 편지더미를 포장해놓은 것 같은 「선물」, 결정적인 순간의 기로에 선 「선택」, 그리고 아마도 상처의 흔적을 봉인해놓은 것 같은 「보관용기」들. 이 소품들이 어우러져, 마치 내 생애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고, 처연했던(이로써 상처 박테리아가 기생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갖춰진) 청춘을 떠나보내는 레퀴엠 같다. ● 그리고 또 다른 전작에서 작가는 사회적 상처를 다룬다. 긴 탁자를 중심으로 좌우에 정장 차림의 건장한 남성들이 도열해있는, 무슨 조폭의 모임을 보는 것 같다. 그 옆 테이블에는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그리고 탐욕적인 미식가들인 크고 작은 사시미 칼들이 피 맛을 음미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다. 외관상 조폭의 모임을 연상시키는 이 작업은 그러나 사실은 그 이면에서 사회에 만연한 온갖 형태의 권력을, 그리고 그 권력으로부터 파생된 상처를 내장한다. 이를테면 무슨 투명인간처럼 하나같이 머리가 없는 남성들이 권력의 익명성을 암시한다. 피권력자는 있는데 정작 권력의 주체는 없는, 사회의 단면을 상징하고 있는 것(미셀 푸코는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에서 권력의 주체와 객체는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고 본다). 여기에 조폭이 학자라고 한다면, 사시미 칼은 펜대로 바뀔 것이고, 법관이라고 한다면 나무망치로 대체될 수가 있을 것이다.

임현수_흔적_레진, 스테인레스 스틸_118×20×16cm_2010
임현수_흔적_레진_120×194×55cm_2010

이처럼 임현수는 전작에서 이미 개인적인 상처와 사회적인 혹은 제도적인 상처를 다룬 바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근작에서 타자의 상처에 주목한다. 작업하다 공구에 정맥이 끊겨 수술한 자국, 군대에서 무릎을 다쳐 수술한 자국, 쇄골부분의 골절로 인한 수술자국, 탈장으로 인한 수술자국, 그리고 삶의 무게로 인해 가벼워지길 바라는 마음, 그림 그리는 뒷모습을 포착한 등 등 지인들에게서 찾아낸 유형무형의 상처와 자의식의 흔적들을 채집하고 조형한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전작에서와 같은 무형의 상처 대신 유형의 상처에 주목한다. ● 그 와중에서도 무형의 상처를 다룬 경우가 전혀 없진 않은데, 이를테면 삶의 무게를 덜고 좀 가벼워지고 싶다는 지인의 마음을 담은 작업이 그렇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등신대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로 지인의 전신상을 조형하고, 마치 고무풍선처럼 그 전신상을 공중에 매달아 띄웠다. 무거운 현실(상처 혹은 상처의식)과 가벼운 욕망(상처의 치유)이 대비되면서 극적 긴장감을 자아내는가 하면, 형식적으로 조각의 경계를 공간설치로까지 확장시킨다. 불현듯 이 작품에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란 텍스트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욕망의 외화, 즉 무형의 욕망에다가 풍선처럼 가볍게 뜨는, 물적 형식을 부여했다고나 할까. ● 그리고 그림 그리는 뒷모습을 잡은 지인의 등. 마찬가지로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상처를 찾아볼 수는 없는, 그저 평범한 그 등이 암시하고 있는 무형의 상처는 아마도 외로움(혹 지인의 등을 쳐다볼 때의 조각가 자신의 연민 같은 것일 수도) 같은 것이 아닐까. 이 작업은 미셀 투르니에의 「뒷모습」이란 사진에세이집을 생각나게 한다. 뒷모습은 앞모습이 보여주지 못하는, 감추고 싶어 하는, 간과하고 있는 모습들을 다 보여준다.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더 많은 모습들을 보여준다. 어느 정도는, 앞모습이 가장이라고 한다면, 뒷모습은 진실이다. 은연중에 상처를 드러내고 암시하는, 해서 그 상처를 타인에게 들키고 마는. ● 이처럼 작가는 근작에서 무형의 상처를 다루기도 하지만, 대개는 여러 이유로 몸에 남아있는 실제의 상처에 주목한다. 몸에 상처 하나쯤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독 작가와 같은 조각가들은 그 몸에 온갖 크고 작은 상처들이 많은 편이다. 하는 일이 험하기 때문이다(오죽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미켈란젤로와의 논쟁에서 조각가를 노동자에 비유할 정도). 물론 이 상처들에는 조각하는 와중에 생긴 상처도 있고, 다른 경로로 생겨난 상처도 있다.

임현수_흔적_레진_55×194×128cm_2010
임현수_흔적_레진_53×41×28cm_2010
임현수_흔적_레진_172×80×25cm_2010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상처를 입은 사람을 모델로 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상처를 입은 신체의 부위를 모델로서 취한다는 점이다. 전체가 아닌 부분을 모델로서 취한다는 것인데, 이로써 일종의 상처-풍경 내지는 상처-초상화로 부를 만한 개념적 정의가 가능해진다. 이처럼 전체로부터 부분을 떼 내어 그 자체 자족적인 존재성을 부여해주는 방식 혹은 태도는 주제의식을 부각하는 강점이 있고, 주제에 집중하게 만드는 몰입이 있다. 그 이면에는 일종의 클로즈업 기법에의 공감이 확인된다. 이미지를 포함해 일종의 총체예술이랄 수 있는 영화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기법으로서, 클로즈업해 들어가는 카메라의 눈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이를테면 사람, 자연, 아니면 한갓 무기물 할 것 없이) 그 대상을 풍경으로 바꿔놓고, 초상으로 바꿔놓고, 특히 얼굴로 바꿔놓는다. 얼굴? 풀사이즈로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대상의 부분은 그 대상의 전체를 대리하는, 혹은 그 전체와는 또 다른 얼굴이다. 신체에는 무수한 얼굴들이 있다. 바로 카메라워크가, 클로즈업 기법이 사물의 표면을 더듬고, 신체 위를 탐색하면서 찾아낸 얼굴들이다. 작가는 이렇게 찾아진 상처-풍경, 상처-초상, 상처-얼굴들 앞에 서게 한다. ●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에서 신을 본다. 공감을 호소해오는 얼굴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얼굴들, 윤리의식을 자극해오는 얼굴들에서 레비나스가 발견한 신은 아마도 그 얼굴들이 품고 있던 상처일 것이다. 개인적인 상처, 사회적인 혹은 제도적인 상처, 그리고 타자의 상처에 이르기까지 임현수는 이 일련의 상처와 상처의식을 통해서 존재의 진정한 이유를, 원인을 캐묻는다. 이 지극한 자기반성적인 물음.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지는 물음. 이 물음을 묻는 작가의 태도는 진지하다. 그리고 그 전망은 밝다. 그 진지함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밝다. ■ 고충환

Vol.20100825g | 임현수展 / LIMHYUNSU / 林賢洙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