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N SUIT

강주현展 / KANGJUHYEON / 康柱現 / sculpture.installation   2010_0823 ▶ 2010_0830

강주현_SKIN SUIT-Rider_PVC, 레진, 디지털 프린트_170×200×100cm_2010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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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823_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공휴일_10:00am~05:00pm

한전프라자 갤러리 KEPCO PLAZA GALLERY 서울 서초구 쑥고개길 34(서초동 1355번지) 한전아트센터 1층 Tel. +82.2.2105.8190~2 www.kepco.co.kr/plaza

현실과 가상현실, 그 사이에 사진이 있다 ● 장 보들리야르는 현대를 가상의 시대로 진단(엄밀하게는 예견)한다. 감각적 현실과 가상의 현실이 겹치는 단계를 지나 점차 가상의 현실 쪽이 부풀려지는. 감각적 현실이 가상의 현실에 편입되는. 여기서 감각적 현실은 그 자체 실체로서보다는 다만 가상의 현실이 참조하고 인용하는 원천으로서 그 의미가 축소된다.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라. 실제로는 없는 것이면서 마치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인식의 지점들이며 감각의 성분들이다. 이런 가상의 시대를 반영하는 가장 강력한 매체가 사진이다. 사진은 오랫동안 현실을 재현하고 모사하는, 현실을 반영하고 증언하는, 현실을 복제하는 매체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사진은 이처럼 현실 그대로를 충실하게 재현하던 시절부터 진즉에 가상의 시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심지어 본격적인 가상의 시대를 연 사실상의 계기가 된 디지털 매체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그랬다. 초기사진의 레이오그램과 다다의 포토몽타주 그리고 초현실주의의 사물의 전치에서 보듯 사진은 한편으로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참조하고 인용하는, 현실을 해체하는, 현실을 재편집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비전을 열어놓는 일에 복무해왔다. 그리고 디지털 매체와 결합하게 되면서 사진은 마침내 가상의 시대를 열고 가속화하는 계기로서 작용한다. 어쩌면 사진은 가상의 시대를 열기 위한 첨병이며 전범이었는지도 모른다. 보들리야르가 인문학적 이론가이면서 동시에 사진작가로도 널리 알려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마도 현실을 참조하고 인용하는 사진, 현실을 변형시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비전을 열어 놓는 사진의 가능성을 알고 매료되었을 것이다. 사진은 얼핏 현실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뛰어난 재현능력이 바로 함정일 수 있다. 현실 그대로를 빼닮은 꼴로 인해 즉각적이고 강력한 호소력을 견지하면서도, 정작 그 호소력을 이용해서 현실을 변형시키고 변질시키는 일에 복무하는 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중요한 현대사진의 위상이며 존재의미라고까지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강주현_SKIN SUIT-Rider_PVC, 레진, 디지털 프린트_170×200×100cm_2010
강주현_SKIN SUIT-Female_PVC, 레진, 디지털 프린트_170×90×50cm_2010

강주현의 작업 역시 이처럼 현실을 참조하고 인용하면서도, 해서 외관상 현실을 빼닮았으면서도, 정작 그 닮은꼴을 이용해서 현실과는 다른 종류의 비전을 열어놓는다. 그리고 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주요 매체로서 사진을 끌어들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진과 조각의 경계를 허물어 일종의 사진조각을 실현하고, 사진과 드로잉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사진드로잉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사진을 매개로 해서 조각과 드로잉의 전통적인 장르와 형식의 벽을 해체해 어떤 의외의 비전을 열어놓는 것이다. 사진과 조각과 드로잉이 하나로 만나질 수 있는 형식적 가능성을 실험하는 이 프로젝트의 이면에는 후기근대주의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소위 탈장르와 탈형식, 그리고 나아가 탈의미(기왕의 의미를 수정하고 보충하는, 혹은 의외의 의미로써 기왕의 의미를 대체하는)를 아우르는, 이른바 탈의 논리에 대한 공감이 엿보인다. 그 형식적 가능성을 실험하는 작가의 작업에서 전작과 근작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속돼 있으며, 상호보충적인 관계에 놓여진다. 해서 먼저 전작을 살피는 것이 순서일 듯싶다. 「Dupe style」. 복제 스타일이라는 말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감각이 이전 감각을 기억으로 되살려낸 것(복제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착용하는 의복 역시 몸의 습성을 모방(복제)한다고 본다. 감각이 감각을 복제하고 의복이 몸을 모방한다는 이 발상의 이면에는 존재의 아이덴티티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하는지에 대한, 그리고 특히 문화의 소산인 양식, 모드, 스타일이 존재의 아이덴티티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종래에는 어떻게 그 일부가 되는지에 대한 자기반성적인 물음이 있다. 롤랑 바르트는 『신화론』에서 문화적 사실이 자연적 사실인 것처럼 조작되고 유포되고 받아들여질 때 일종의 신화가 발생한다고 본다. 의복에 반영된 양식, 모드, 스타일은 분명 문화의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개인의 정체성, 특히 제도적 정체성(직업, 신분, 계급을 매개로 개인에게 부과되는 정체성)과 동일시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서 현대판 신화가 발생하는 것. 예컨대 유니폼은 이런 제도적 정체성이 반영된 전형적인 아이콘인 것이며, 작가의 작업에 유독 유니폼이 주요 소재로서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로써 결국 신화적 사실이란 진실이 아니며, 최소한 개인을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용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진실한 개인은 신화적 사실 뒤에, 유니폼 뒤에 가려져 있는 것.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신화적 사실이 유포시킨 허구성을 폭로하는데 맞춰진다. 작가는 이를 위해 등신대 크기의 각종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소재로서 등장시킨다. 투명한 OHP 필름에 전사된 이 이미지들을 잘라 세로로 긴 띠로 세분화한 다음, 그 띠들을 연이어 붙여 중첩시키는 방법으로 본래의 형태를 복원했다. 여기에 아크릴 프레임을 도입해 그 자체로는 고정된 형태를 유지할 수 없는 필름 형태의 이미지를 고정시킨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최초의 형태를 해체했다가 재차 복원한 것. 엄밀하게는 복원이라기보다는 재구성된 이미지가 비록 처음의 이미지를 닮아 있지만, 사실은 양감과 질량을 결여하고 있는 불완전한 이미지이며, 반쪽의 복원에 지나지 않는 것. 작가는 말하자면 존재의 실체감을 보증해주는 양감과 질량을 결여하고 있는, 다만 이미지만 있는, 표면만 있고 속이 없는 이미지를 통해서 그 신화적 사실의 허구성(제도적 정체성과 개인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유니폼을 보고 개인을 판단하는)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강주현_SKIN SUIT-N.3_PVC, 레진, 디지털 프린트_50×40×30cm_2010
강주현_SKIN SUIT-N.1_PVC, 레진, 디지털 프린트_30×50×50cm_2010

작가의 근작은 특히 의미론적으로 전작에 나타난 주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심화시킨다. 「Skin suit」. 피부 옷. 피부가 옷이 되고 옷이 곧 피부가 되는 어떤 경지. 피부와 한 몸인 옷. 피부 곧 몸과 하나인 옷. 이 주제는 한눈에도 몸을, 몸의 습성을 모방하는 옷을 다룬 전작에서의 주제의식을 사실상 되풀이한 것이며 따라서 어느 정도는 전작에서의 주제의식과 이에 따른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피부라는 구체적인 용어를 끌어들여 몸의 용례를 한정함으로써 의미론적인 측면(이를테면 의복과 개인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신화적 사실에 대한 논평과 같은)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지점(이를테면 주제를 직역한, 피부 옷과 같은)까지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전작과 근작의 차이점은 정작 의미보다는 오히려 형식적인 측면에서 더 두드러져 보인다. 즉 전작에서는 무엇보다도 필름 자체로는 고정된 형태를 유지할 수가 없어서 아크릴 프레임을 도입함으로써 비로소 형태를 고정시킬 수가 있었는데, 근작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그 초점이 맞춰진 것 같고, 나아가 그 자체가 연이어 다른 형식을 불러들이는 계기로서 작용한 것 같다. 이처럼 근작에서 두드러진 차이점으로 필름을 고정시키던 아크릴 프레임이 사라진 것이며, 따라서 필름 스스로 고정된 형태를 유지해야하는 만큼 필름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해서 투명한 OHP 필름 대신 폴리 계열의 플레이트 표면에 디지털프린트의 형태로 이미지를 전사한다. 그리고 레진으로 모티브의 일부를 실제로 떠내고, 이를 지지대 삼아 그 표면에 이미지를 덧붙여나간다. 일종의 신발(신과 발이 합체된)을 모티브로 한 작업을 중심으로 그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말 그대로 신과 발이 합체된 모티브의 일부(발목 아랫부분)를 레진으로 떠낸다. 그리고 신을 디지털프린트로 전사 출력한 이미지를 가로로 잘게 잘라(전작에선 세로로 길게 잘랐다. 아마도 가로 세로를 결정하는 것은 그때그때 주어진 형태에 맞춘 것일 듯) 길고 가녀린 띠들로 세분화한다. 그리고 레진으로 떠낸 부분 형태를 지지대 삼아 그 표면에 촘촘하게 덧붙여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덧붙여나가다가 실제 형태가 끝나는 지점(이를테면 발목 윗부분)에 오면 다만 빈 띠들만 중첩되면서 속이 빈 형태를 이어간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형태는 외계의 도움 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강주현_Drawing-Rider_종이에 잉크(transcription)_40×50cm_2010

그리고 재밌는 것은 프린트 상태의 이미지를 고정된 형태 위에 덧붙여나가는 과정에서 일정한 왜곡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평면의 이미지를 굴곡이 많고 섬세한 입체 위에 옮겨놓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작가의 작업을 보면 사실 고지식할 정도로 이미지 본래 상태 그대로를 충실하게 옮겨놓는 것 같다.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오히려 바로 이런 고지식함(?) 때문에 작가의 작업은 진정성을 획득할 뿐 아니라 의외의 지점까지도 건드린다. 얼핏 실제를 빼닮았는데, 정작 보면 볼수록 아니다. 자꾸만 실제와의 차이가, 오차가, 왜곡이 보인다. 그 왜곡이 없는 듯, 아닌 듯 한 것이어서 오히려 이에 따른 반응은 더 크다(현실과의 차이가 적을 때 오히려 이를 감지하는 감각의 반응은 더 커진다). 작가는 이렇게 신발(신과 발이 합체된)을, 넥타이를 맨 남자(뱃살과 의복이 합체된)를,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슴과 의복이 합체된)를, 헬멧과 복장을 정식으로 갖춰 입은 경주용 오토바이 선수를 각각 형상화했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슈트는 단순히 옷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착용할 수 있는 것, 몸에 지닐 수 있는 것 일체를 아우른다. 그리고 그 의복, 그 도구 그대로 몸의 일부가 되는 경지, 인격의 한 부분으로서 흡수가 되는 지경. 그 자체를 일종의 페티시즘 곧 물신화된 사물을 실현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사진과 조각과 드로잉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진조각, 사진드로잉의 형식적 가능성을 실험한다. 사진을 입체로 구현해 사진조각을 실현하고, 사진을 중첩된 선들의 집합으로 재구성해 사진드로잉을 실현한다. 주지하다시피 드로잉의 최소단위는 선이며, 작가의 작업에서 가로 혹은 세로로 긴 띠로 세분화된 조각난 사진 이미지의 편린들이 이 선에 해당한다. 해서 작가는 마치 이 선들을 이용해서 입체 위에, 나아가 허공 위에마저 드로잉을 하는 것 같다. 때론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는 형태 뒤쪽으로 마구 휘날리는, 엉클어진 선들이 드로잉의 실감과 함께, 모티브가 현실세계로부터 빠져나오면서 생긴 어떤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도 선은 형태를 고정하는데도 쓰이고, 형태를 해체하는 일에도 기여한다. 고정되는 형태와 해체되는 형태, 그 사이에 선들이, 선들의 다발이 있다. ■ 고충환

Vol.20100823b | 강주현展 / KANGJUHYEON / 康柱現 / sculpture.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