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ains-남겨짐과 남겨져야 하는 것

2010 Do Dream 1st Project   2010_0820 ▶ 2010_090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성호_박재현_서진우_양덕규_오택관 전진표_정재훈_정철규_한아름_황병원_황지영

주최_국민체육진흥공단 경주사업본부

관람시간 / 수~목요일_10:00am~06:00pm / 금~일요일_10:00am~07:00pm

스피돔 라운지_SPEEDOM LOUNGE 경기도 광명시 광명6동 780번지 광명 스피돔 4층 Tel. +82.2.2067.5488 speedom.kcycle.or.kr

Remains - 남겨짐과 남겨져야 하는 것 ● 흔적이 남는 것,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의 거스름을 통해 남겨진 것을 본다. 또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억을 쓸어 담고, 흔적을 챙긴다. 남기고 남겨진 것들은 누구에게나 호평 받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하찮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남겨져 소중한 것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이 하찮은 것이 되어, 남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의미를 찾고, 의미를 공유하고, 함께 소중한 빛을 발하며 남아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오늘도 남길 그 무엇인가를 찾아 다닌다. 자신이 위치한 곳에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고 하고, 그것도 오래 남아 있도록 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남기려고 할까? 그리고 왜 남기려고 하는 것일까? 또 왜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어 하는 것일까? 남기려고 하는 욕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잊혀 지지 않는 남겨짐은 어떤 것일까? ●『Remains』전에서 만나볼 수 있는 11명의 작가들은 그들의 화면에 무엇을, 어떻게, 왜 남겨 놓았으며, 그것을 바라보는 타자에게 다가가 어떤 울림을 전달하기 위한 흔적일까? 작가가 남긴 것과 그것을 보는 자에게 남는 것은 일치 할 수도 있지만, 일치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일치하는 곳에서 남겨짐의 수명이 길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 남기려고 하는 것 중 가장 첫 번째가 되는 것이 화면에 남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수많은 물음을 던지고 그것에 대한 해명을 해 내며 만들어내는 과정들이 남겨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그것에게 다가가고, 그것을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에 화면에 담겨진, 그리고 남겨진 것은 제각기 다를 것이다.

전진표_Ode to Process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 색연필_각150×150cm_2010
오택관_Off the map-Connection_캔버스에 유채_52×45.5cm_2010 정재훈_Three girls_캔버스에 유채_53×72.7cm_2010

선 위에 ● 실증적 속성이며 대상 자체의 특징인 선은 경계를 짓는 역할을 함으로써 남아 있다. 전진표의 화면에 나타난 선은 공간을 가르는 경계가 되기도 하고, 빠른 속도로 관람자의 시선을 또 다른 공간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무수히 그어진 화면 속의 선은 작가 자신만의 이데아가 되어 남아 있다. 모든 완성형이 결과적으로 하나의 형태를 지향해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된다면, 전진표의 작품에 끊임없이 계속되는 선과 면의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지배하는 색들은 완성형이 갖고 있지 않은 방식의 완성과 과정을 품은 연속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선들로 인해 화면에서는 없어지고, 또 다시 지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건축물의 형태가 보여 진다. 건축물이 그러한 것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모습이 선과 면으로 나타나 지워지고 그어지는 반복의 행위를 통해 화면에 남게 되는 것이다. 오택관이 그리는 지도는 과거와 현재에 타자와 나를 구분 짓거나 정치, 경제, 종교 등 현대 사회를 파악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성이 있는 지도가 아니다. 화면에는 화면의 끝과 끝을 가로지르는 선들과 그 선 사이에 남긴 삼각형의 공간으로 또 하나의 공간을 이루어 남아 있다. 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오택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규정짓기 위한 닫힌 구조의 지도가 아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동등하다고 보는 전제 하에 상상을 더해 만든 열린 공간으로서의 지도이다. 오택관은 이렇게 남겨진 선과 삼각형의 무수한 집합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지도가 아닌 잊고 있었던 감성적 열린 지도를 남기려고 하는 것이다. 정재훈의 화면은 극적으로 조용하다. 조용히 내리고 있는 빗줄기로 화면을 엄숙히 뒤엎고 있다. 이는 무섭게도 이성적이며 냉정할 정도로 절제의 순간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현실을 주체할 수 없는 충동적인 감성적 공간과 대비하듯 공존한다. 현실과 이상, 이성과 감성이 대립되는 두 공간에서 오는 갈등의 관계를 작가는 무수히 많은 선들, 빗줄기로서 중첩시켜 남기고 있다. 이것은 보는 이와 보이는 것 사이에서 형성된 중립된 관계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한아름_奈落_캔버스에 유채_80.3×116.3cm_2010 정철규_Lingering moment-여전히 감싸주는 것은_캔버스에 유채_지름100cm_2010
서진우_Weapon set_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62cm_2008

사물과 함께 ● 보이는 세계의 자기복귀에 의해 사물들 속에서 작가는 위치한다. 작가에게 다가온 사물은, 그리고 작가가 다가간 사물은 사물 그 자체의 속성에서 빠져 나와 눈에 보이지 않는 안감을 가지게 된다. 한아름의 화면에 남겨진 화려함은 극대화된 웨딩드레스의 형태(천의 구겨짐과 겹침)는 외형을 가꾸는 장식적인 요소에 대한 집착, 그러니까 본질을 감싸고 포장하는데 연연하는 현대인의 한 측면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외면을 가꾸고 포장하는 것은 타자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여 지는지에 대한 의식적인 행위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의식적 행위로 인해 외형적인 욕망을 남긴다고 할 수 있다. 타자를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을 보고 있는 볼록거울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시작한 정철규의 작품은 볼록거울의 외형적 형태와 닮은 화면에 자신의 상황을 사물로 비유하여 나타내고 있다. 볼록거울이 타자로서 자기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한 작가는 화면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소극적이지만, 대범하게 드러내고 있다. 화면에는 자신과 대치될 수 있는 다양한 사물 - 풍선, 낙하산, 화분, 포크레인 등으로 남아있다. 의미가 없는, 단지 기능만 존재하는 사물에 작가는 의미를 남기고,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끌어와 화면에 남기려고 하는 측면을 살펴 볼 수 있다. 이렇게 사물에 특별한 의미를 남기려고 하는 작품이 있다면, 반대로 서진우가 그리는 사물은 그 사물의 의미를 날려 보낸 채 표현된다. 기성화 된 사물, 즉 상품으로 둔갑한 사물은 현대 사회의 매체를 통해 평면 이미지로 변화하면서 더욱더 화려한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이렇게 변형된 사물은 화면에 불규칙하게 흩뿌려져 어떠한 사물인지에 대한 정확한 인지를 할 수 없도록 남기고 있다. 'Weapon Set'에 나타난 사물 또한 그 의미는 감춰지고, 숨은 채 색과 형태로 남아 그것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모호함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현대인들이 느끼는 모호함을 표현하고자 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다.

김성호_Artificial natur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크리스탈_47×118cm_2009
박재현_Japanese Buddha_C 프린트_51.1×76.2cm_2010 하문센_Timekiller movement_단채널 영상_00:02:30_2009

변신하여 ● 빛과 그림자, 색과 반사 이러한 것들은 온전하게 실재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이의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작가의 시선은 이것들에게 물음을 던진다. 김성호는 수많은 점들을 남긴다. 이는 광학적인 빛과 결합하여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빛으로 이미지를 형성해 나간다. 화면에 남겨진 점들은 무작위로 나열되어 도시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이진법적인 기호형식으로 나열되어 점자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점자를 통해 작가는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어줄 수 있는, 손끝으로 느끼는 세상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또 다른 측면으로는 물리적인 빛이 발하는 화려함으로 인해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둠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모습이기도 하다. 박재현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착시를 만들어낸다. 객관적인 시각은 지속적으로 입력 되어진 데이터들로 이루어진다. 그 입력된 데이터들 중 오류가 생기면 객관적 시각이 만들어낸 착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우연의 시간 속에서 착시를 느낄 수 있는 것을 찾아내고 특정부위를 제외하고 색을 버린다. 특정한 부분의 색을 버림으로써 화면의 내부는 합성으로 만들어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하문센는 작품 속에서 본인이 겪었던 기억이나 사회적인 이슈를 통해 남겨진 것을 기록하고, 또 그것을 지우는 행위를 반복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기억을 지우고자 하며, 또 되살리려고 한다. 이는 평면적으로 가시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하학적 패턴의 반복과 움직임, 그리고 반복적인 소리가 결합된 3D 영상작품으로 마치 최면술에 빠진 듯 그 기억 속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다.

황지영_흐르지 않을 오열1_캔버스에 유채_65×155cm_2010
황병원_Relationship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09
Remains-남겨짐과 남겨져야 하는 것展_스피돔 라운지_2010

깊은 곳에 ● 자코메티는 세잔이 평생 동안 깊이를 찾으려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로베르 들로니는 깊이는 새로운 영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깊이는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며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이렇듯 깊이라는 것은 한 번 찾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 찾아 가는 것이다. 황지영은 깊어지기를 바라고 진지하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하게 구속된 관념 속에서 남으려 하지 않는다. 현재 작가는 정체 모를 감정을 분출하다가 멈췄다고 말한다. 관념 속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여전히 애매모호한 이미지로 남겨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흐르는 순간이 아닌 흐르고 있는 과정을 담아내려는 의식, 그렇지만 흐르지 않고 멈춰있는 것, 그것이 황지영에게는 불안으로 자리 잡고 있고, 그것이 넘치고 있다. 넘치는 감정을 흘려 보내고 한없이 익숙한 먹먹한 시선의 전송 속에서 깊이 더 깊이 들어가기를 갈망하고 그곳에서 남겨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은 작품에서 깊이를 찾기 위한 노력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황병원은 일기를 자주 쓰는 편이라고 한다. 일기 속에서 작가는 스스로를 여리고 쉽게 상처 받는 존재로 표현하곤 한다. 정체성과 소통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하는 황병원은 그러한 기분을 습기에 젖어있는 모습으로 나타낸다. 그의 화면에는 여인의 몸이 무엇인가에 의해 젖어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작가가 맞이하는 시간의 짜릿함과 불안감 그리고 상실감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또한 소통의 깊이를 갈망하는 절실함에서 자신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다. ● 작가는 자신이 남기려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찾는다. 그리고 찾아낸 것은 또 다른 모색을 하도록 요구한다. 또한 보이는 세계의 막막한 바닥에서 불빛을 찾으려 하고, 그 불빛으로 밝히려 한다. 이렇게 작가가 화면을 통해 남기려고 하는 것은 찾고자 하는 그 무엇이 되며, 결과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에게 있어 남겨짐이란 이러한 시간의 세례를 받는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대가이다. 제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관점으로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찾고, 다른 것을 남기기 위해 찾아 다니고 있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남길 것인가? 라는 물음 앞에 서 있다. 그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남겨질 그 무언가를 항상 찾아야 할 것이다. ■ 정철규

Vol.20100821f | Remains-남겨짐과 남겨져야 하는 것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