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10_0818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강은주_김설희_김유경_김자희_박형주 유지민_이미현_이영화_장세경_한아림
협찬_백송 미술문화재단 Baiksong Art Center
관람시간 / 10:30pm~06:30pm / 일요일 휴관
백송갤러리_BAIKSONG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9 Tel. +82.2.730.5824 www.bsartgallery.com
『나르시스의 방』과 10인의 세상 ● 프로이드는 세상과의 상관관계에서 과도한 감각적 하중이 전달될 때 장벽 혹은 방패장치를 써서 스스로 보호하듯, 자기성애적인 자아는 외부의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보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아는 자기 밖의 세계와 관계하게 되는데, 이때에도 자아를 향한 리비도 집중은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결국 자기애는 인간의 정상적인 성적 발달 과정, 즉 개성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자생적인 정신적 에너지를 의미하는 리비도적 현상이며, 자기도취적 측면보다 오히려 자기 방어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인 아들러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안에 존재하는 열등한 요소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억압되어 일종의 콤플렉스로서 작용한다고 하였다. 개인은 자신이 지닌 정신적, 육체적 열등요소를 보완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고 이런 노력을 통해 인격이 형성되고 사회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긍정적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이는 성본능을 중시하는 프로이드의 설에 반대하여 인간 행동과 발달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존재의 보편적인 열등감, 무력감과 이를 보상 또는 극복하려는 권력에의 의지, 즉 우월의 요구라 하였다. 결국 나르시시즘의 개념으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무력하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독립해서는 생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사랑의 상실이 강조되어 잃은 것을 되찾으려는 보상심리가 충동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 된다고 하였다. ● 이번 전시『나르시스의 방』을 백송화랑과 공동기획하게 된 배경은 화단에서 미래의 주역이 될 젊은이들의 열정과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여러 생각들을 가감 없이 펼쳐 보이고 싶은 생각에서이다. 그들의 호기심과 고민들을 생각하면서 이들에게도 결핍과 억압이 존재하고 그 것을 해소하기 위한 공통된 현상들이 나타난다는데 주목하게 되었다. 나아가 과거와 미래의 생활환경과 문화적 변화를 예견해 보며 이들의 그림 한 점 한 점의 완결된 미적 가치를 논하기 보다는 도도한 시대적 흐름과 가치기준의 변화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우선『나르시스의 방』에 참여하는 10명의 신예작가들에게 공통으로 보여 지는 현상을 정리해 보면 첫째, 동‧서양의 회화라는 이분법적 구조나 사유 및 표현의 방식 등 구속에 반한 자유로움의 희구이다. 이미 서구화된 의식주 등 사회구조와 아직도 변함없는 한국인만의 사유구조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갈등이 전제되지만 기존의 질서와 형식을 부정하며 생각의 중심을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자기 본성으로 회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 둘째, 20대라는 신체적 정신적 발달과정에서 오는 인간의 발달 과정, 즉 개성화 과정에서 에서 겪게 되는 리비도적 현상이다. 불완전한 신체적 성장과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며 자기 방어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세상과 사회구조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기보다 마음속에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서 자신의 모습과 세상을 자위적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어쩌면 그 공간 안에서의 자위는 자기위로와 치유, 자책의 반복으로 이어지며 결국은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탐구과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셋째, 물질만능의 사회적 구조에서 오는 괴리감이다. 성장기의 보호막에서 벋어나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시점에 선 이들은 바라보이는 현대사회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능동적인 경험보다는 인식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그 속에 보여 지는 모순을 부정하며 현실에서 자신을 떼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왜곡하거나 모순의 조합 등의 기법으로 자기만의 우주를 만들어가며 그 속에서 심리적 안정을 찾으려는 것이다. ● 강은주의 경우에는 무의식적 행위를 그림으로 시각화 하는데 관심이 있다. 불완전한 형상들을 배열하고 드러냄으로써 시각적 위기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화면 속에서 절단된 신체나 훼손된 물건, 동물과의 합성 등을 통해 모순을 극대화 시키며 그들의 조합 과정을 통해 오히려 안정감을 찾으려 한다. 본인이 이야기 하듯 선과 악의 사이에 있는 자아와 현실의 불안함, 자존감과 자괴감 사이를 모순으로 받아들이며 극대화 된 모순의 조립이라는 과정을 통해 생존 즉, 긍정으로의 집착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설희의 생각은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찰나의 감정들을 되돌아보며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는 데서 시작된다. 보여 지는 현상의 이면, 즉 세상의 보이지 않는 관계와 그로 인해 남겨진 삶의 흔적들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그 흔적들에게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라는 생명을 부여하면서 상상의 세계를 열어 간다.
김유경은 사물의 인식에 대한 원초적 의문을 가지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대상의 인식체계에 경계선을 긋고 모호함이라 설정과 함께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비현실, 자연과 인위 등의 의문을 즐기고 있다. 결국 인식의 항상성을 경계할 뿐 아니라 '낯설게 보기' '새롭게 바라보기' 등을 통해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김자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인의 욕망으로부터 시작하여 유혹의 착각과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까지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감성을 여과 없이 즐기고 있다. 어쩌면 화면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본성적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가감 없이 화면에 드러냄으로써 자위와 자책의 과정을 반복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박형주는 현대사회의 구분된 경계 속에서 소통할 수 없음조차 지각하지 못하는 세상을 바라보며 고립된 자신만의 공간을 설정하고 있다. 그 안에서 세상과의 대립과 공존이라는 스스로의 나약한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지만, 어찌 보면 바깥세상과 끝없는 소통을 희구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고립된 자신을 즐기고 있는 듯하다.
유지민의 생각은 어릴 적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알 수 없는 불안과 폭력의 기억으로부터 해방구가 되어 주었던 교회의 작은 기도실로부터 시작된다. 그때의 시공간에서 경험했던 빛의 무리가 춤추는 환상이 그에게는 자유를 위한 상상이자 현실을 극복하는 근원적 상징이 되고 있다. 그는 빛과 어두움으로 갈라놓은 환상 속에 기억의 파편 하나하나를 드러내면서 자신의 삶을 단련시키고 나아가 자기 정체성 탐구의 도구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현은 '보다'라는 의미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늘 보던 풍경이 갑자기 낯설어 지거나 어떤 메시지로 다가오듯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풍경 속에서 바라보는 것들에 '왜'라는 자문의 과정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자신만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영화에게 있어 삶은 곧 욕망이다. 욕망 앞에 주체인 '나'와 '타자'를 혼동하는 경험과 생겨나는 내적 고독은 자연스럽게 욕망을 대리해 줄 제3의 공간을 만들게 되고 끊임없이 돋아나는 욕망의 반복을 일으킨다. 열기구, 선인장, 해골 등으로 상징화되어 나타내는 작업 과정을 통해 스스로 불러일으킨 욕망을 직시함으로써 억압된 현실 속에 불안정한 자신을 자각시키고 결국 심리적 안정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장선영은 그림이란 태어날 때부터 새겨지고 있는 자신의 무늬라고 말하고 있다. 그림이란 스스로 무늬를 내는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림이라는 외형적 인식이나 결과보다 생각을 드러내는 과정을 통해 감정, 기억, 꿈 등 삶의 모든 것을 안개가 걷히듯 걷어내며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그림이란 혼자만의 위로와 치유의 놀이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한아림의 생각은 막연하지만 어릴 적 꿈꿔왔던 자신의 모습과 현실의 간극에서의 갈등과 자신의 거짓된 결핍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평소 느끼는 현상의 불확실성에 대해 "불안과 두려움의 바탕 위에 또 다른 세계로의 통로를 찾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심리적 공간 안에서 현실과 욕망 사이에 흔들리는 자기 자신을 어루만지며 치유의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를 통해 현실을 자각하고 '거짓 자기'로부터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는 용기를 기르며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 이번 전시『나르시스의 방』을 통해 우리는 이들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결코 모순된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흐름에 따른 사회, 문화적 변화와 성장과정에서 오는 정신적 필연성의 일부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억압과 결핍이 무엇이고 그로 인한 정신적 노력을 바라보고 격려해야 한다. 이들의 자생적인 심리적 경험이야말로 미래의 우리 문화를 열어갈 씨앗이기 때문에 그림 한두 점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진화가 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 이선우
Vol.20100819i | 나르시스의 방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