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sco Works

선우항展 / SUNWOOHANG / 鮮于杭 / painting   2010_0818 ▶ 2010_0828

선우항_Landscape R-01_프레스코_2×11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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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단성갤러리_DANSUNG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30-3번지 Tel. +82.2.735.5588

어떤 현대적 자극도 허락할 수 없는 역사의 체취로부터* 선우 항의 프레스코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도록 한다. 벽화는 그것이 시작되는 동기로부터 작업방식과 기술, 그리고 소통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유화나 드로잉, 소형 브론즈상 같은 뮤지엄 피스(museum piece)들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벽화는 실내건 실외건 다수를 위해 제작된다. 그것의 목적은 소유가 아니라 공유에 있으며, 사적 공간 대신 공적 공간을 지향한다. 그것의 소통 역시 사적 취향이 아닌 공공의 감상 차원에서 성취된다. 따라서 공공의 주제가 다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며, 재질과 기술에 있어서도 실외환경에서 오래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선우항_Wave R-01_프레스코_240×120cm_2010

오늘날 장르로서 벽화가 시야에서 멀어져버린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예술의 용도가 탈공공화, 개인화되었다는 점, 예술 창작의 최종목적이 사적 취향에 대한 부응과 소유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 그 가장 우선적인 이유일 것이다. 오늘날 회화는 그레고와르 매소뇌브(Gregoire Maisonneuve)가 "정말로 그렇게 되어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술회한 바 있던 바로 그 방식, 즉 점점 더 왜곡된 욕망과 투기와 관련되고, 그 궁극에서 사업과 화폐의 도덕이 더욱 각별해지는 그러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현 사회와 문명에 있어서 공공성의 위축과 환대받지 못하는 벽화는 사실상 같은 맥락의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더욱 회화나 드로잉의 학습과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이 프레스코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선우 항의 행보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 프레스코화는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방식 중의 하나로, 재료의 예민함이나 기법 상의 까다로움으로 인해 오늘날 소수의 작가들에 의해서만 그 예술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프레스코화는 제약 속에서 일해야만 하는 방식이다. 그 효과가 대단히 현란한 것도 아니다. 그것이 매우 성공적일 경우에도 고도의 장식효과나 재기 넘치는 표면효과들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안료들은 시선을 잡아끄는 전략적인 채색효과와는 다른 가치를 지향한다. 안료가 석회층에 흡수되고, 석회층이 안료의 채도를 견제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 세계는 장식과 자극이 동시에 절제된 차분한 것이 된다. 질료와 안료의 혼융일체로부터 비롯되는 어떤 제 3의 존재감이랄까. 이로부터 프레스코의 묵중하지만 겸허한 차원이 발생된다. 석회층에 삼투된 안료들의 물화된 발색으로부터는 어떤 현대적 자극도 허락할 수 없는 깊은 그윽함이 배어 나온다.

선우항_Landscape S-01_프레스코_60×지름 80cm_2010_위 선우항_Wave C-02_프레스코, 금박_75×40×40cm_2010_아래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개념적 재간과 반짝 아이디어가 미(美)의 뇌관을 자처하는 시대에 굳이 고집스럽고 예민한 재료와 마주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노동과 인내를 요하는 작업과정을 기꺼워할 작가가 많을 리 없다. 대다수의 작가들은 현대의 길들여진 노선, 효과적인 기술과 순응적인 제작방식을 선호한다. 쉽게 통제되고 의도에 부응하는 널려있는 방식들 말이다. 일테면 그들-현대의 작가들-은 고해상도를 과시하는 대형 디지털 모니터와 출력물들과 다양한 전자매체들이 현대적 공간, 도시의 중성적인 거리들, 메탈이나 유리 소재의 차가운 벽들에 더 잘 부합할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 이런 맥락에서만 조망된다면, 21세기의 프레스코는 그 자체로 넌센스일 수도 있다. 선우 항이 그걸 모를 리는 없다. 하지만, 프레스코를 퇴행이나 시대착오로 간주하도록 만드는 그러한 요인들이 선우 항에게는 오히려 포기할 수 없는, 또는 포기해서는 안 될 이유가 된다. 프레스코의 반(反)모던적, 반(反)도회지적 특성은 아틀리에의 단절주의를 신봉하는 대신 강원도의 겨울 계곡을 사생하는 그의 심미 정서에 상응한다. 프레스코의 노동집약적 작업과정이야말로 메마른 관념주의나 속빈 언어유희에 대한 상징적인 치유일 수도 있다. 게다가 프레스코의 산업적 비효율성, 표준화에 대한 저항은 급속한 상업화에 대한 미적, 조형적 견제의 실천일 수도 있다.

선우항_Wave M-01_mezzo_메조 프레스코, 금박_76×46cm_2010_위 선우항_Wave C-01_프레스코, 금박_75×76×40cm_2010_아래

** 프레스코는 현대적인 방식이 아니라 천 년도 더 전의 방식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오늘날과 같이 네온사인과 쇼 윈도우로 대변되는 차가운 사회, 정보의 대량 살포와 의미의 집단학습이라는 끔찍스러운 소통을 알지 못했던 시절에 중요한 사회적 소통방식이었던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훨씬 더 공적이고 인간적인 목적에 부응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들에 훨씬 더 구체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선우 항에게 프레스코의 이러한 역사적 자취는 그것이 여전히 제공하는 조형적 기회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 태고의 체취는 그의 영감의 출처이자 예술론과 표현법의 근간을 이루는 요인이다. ● 분명한 한 가지는 역사의 무게를 못마땅해 하는 것에서 출발했던 '모던(modern)의 영혼'은 선우 항이 지향하는 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테면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와의 우발적인 재회를 기대하며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온갖 화보들을 들추적 거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수퍼마켓을 가득 매운 상품들로부터 손쉽게 영감을 채집하는 것, 컴퓨터로부터 간단하게 다운받은 이미지의 다발을 소비하는 만연한 방식과는 거래를 트는 것도 그의 방식은 아니다. 추운 겨울 강원도의 산과 계곡들을 찾아 떠나는 것이 그가 영감을 취하는 방식이자 일하는 태도다. 그가 만나고자 하는 세계는 안락한 실내에서 머리와 개념을 통해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화가의 일이 이미지 가공처리업과 뒤섞여버린 시대에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고단한 보행을 통해 얻는 느낌을 더욱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재간 좋은 이미지 사냥꾼 보다는 우직한 채집자에 더 가깝다.

선우항_Landscape Ⅱ_프레스코_90×90cm_2005

오랫동안 선우 항의 변치 않는 주제는 물, 혹은 물결이었다. 겨울 계곡의 눈 덮인 바위 틈새에, 아직 채 녹지 않은 살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결은 작가가 지향하는 궁극의 한 함축임에 틀림없다. 표면으로 가볍게 번지는 물결, 바닥을 드러내는 그 투명성이야말로 작가가 그토록 계곡의 작고 따듯한 모퉁이들을 찾아나서는 이유다. 그 표면 위로는 갈색의 겨울 숲과 그 사이사이로 비친 하늘이 드리워져 있다. 깊은 갈색과 단아한 청색의 그 반영(反影)은 주변에 쌓인 눈의 순결한 흰색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 맑은 울림을 지닌 정취를 만든다. ● 이 작은 우주에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의 이야기도 전개되지 않는다. 설화도, 영웅담도, 교훈도 없다. 그곳은 '존재론적 비움'의 공간이다. 하지만, 그 비움은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시간은 정지된 듯하지만, 그 역시 고립되거나 낯선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이 비움과 정지로부터는 다른 채움과 여정을 시사하는 잔잔한 감동이 전해져 온다. 그것은 웅장한 풍경과 기념비적인 장관이 자주 그렇게 하듯, 상대를 위축시키거나 주눅들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선우 항의 작은 계곡 양지녘을 잔잔히 흐르는 물결의 진정한 미학일 터이다. ● 선우 항의 관심은 최근 들어 더욱 물(水) 자체의 표현으로 기울고 있다. 표현의 측면에서는 사실 묘사를 다소 후퇴시키면서 직관적 재현으로 향하고 있다. 선묘에 의한 역동과 리듬의 구현에 보다 의미를 부여해 가고 있기도 하다. 객관적 사실, 형태적 구분이 한층 완화된 결과, 그림에선 중심과 변두리의 구분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으려는 올 오버(all-over)적 시도가 조금씩 보이기도 한다. ● 선우 항은 오랫동안 잊고 지내왔던 세계를 들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회벽에 깊이 흡수된 물화(物化)된 발색의 절제미와 함께, 그 자체로 정화하는 힘을 지닌 것임에 틀림이 없는 맑은 물결과 그 살랑거리는 음률에 보조를 맞추면서 다가온다. ■ 심상용

Vol.20100815c | 선우항展 / SUNWOOHANG / 鮮于杭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