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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존재에 대한 호기심, 그리움 ● 조각의 길. 이일호가 이번 전시에 부친 이 주제는 근 40년 넘게 조각과 씨름해온 작가의 이력을 생각하면 약간 의외다 싶다. 조각의 길이 뭔지를 묻고 있는 것인데, 그 물음 속엔 조각에 대한 지와 무지가 함께 들어있다. 조각에 대한 확신과 신념(그의 표현으로는 사랑)이 지에 속한다면, 지나온 발자취는 있는데 앞을 보면 언제나 허당이고 모르는 길이 무지에 속한다.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지보다는 무지다. 즉 조각은 침묵한다. 그리고 그 침묵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침묵은 마침내 돌파할 수 있는 일시적인 장애가 아닌, 조각의 항상적인 조건이다. 조각을 항상적으로 미지의, 미답의 경계 위에 설정하는 것. 그리고 그 불확정성과 불안정성을 기꺼이 껴안는 것. 그런데 아직도, 싶다가도 작가의 조각이 여전히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사실 작가의 조각은 조각에 대한 무지가 무색할 만큼 다양하고 치열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미니멀리즘이 대세이던 시절(1970년대) 작가는 기하학적 형상과 유기적 형상을 결합한다든지, 소재 고유의 물성과 역학(이를테면 중력이나 장력 같은) 등 모더니즘 조각의 본질에 천착한다. 그리고 이후 지금까지 형상조각으로 선회하는데, 작가의 진가가 발휘되는 쪽은 추상보다는 이런 형상조각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형상조각은 자연스레 인체를, 인체의 조건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평면으로 조형된 인체(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가상의 거울이나 수면을 마주한 인체(자기분신, 자기복제와 대면한 자기반성적인 인간의 내면적인 성찰을 엿보게 하는), 머리나 몸체에 구멍이 뚫린 인체(여타의 조각에서처럼 물질이 들어 공간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공간경험을 여는), 욕망과 에로스를 실어 나르는 인체(정신분석학적인), 존재와 존재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연이어지면서 윤회의 사슬을 도상화한 인체(종교적인), 눈에서 발산된 빛을 매개로 서로 소통하는 인체(커뮤니케이션학에 연동된), 퍼즐처럼 조합된 얼굴(주체를 이질적인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으로 보는 후기 근대적 자의식을 반영한), 그리고 물과 불이 하나로 만나고, 현실과 초현실, 현실과 신화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하나로 통합되는 일련의 상징주의 경향의 작업 등 작가의 형상조각의 스펙트럼은 실로 넓고 깊다. 형식적으로 다양한 가능성의 지점들을 실험하고, 의미로는 존재론적인 깊이를 건드린다. 모르긴 해도 작가에 의해 제안된 이런 형식적이고 의미론적인 지점들은 향후 여러 경로로, 특히 후배작가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천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존재에의 관심은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된다. 우주의 운행방식을 도상화한 것인데, 우주가 정해진 형식(형상)이 따로 없는 만큼 그 형식은 형상보다는 추상, 실제보다는 관념상의 외관을 취한다. 겉과 속, 안과 밖의 경계와 구분이 없는, 다만 무한하게 반복되고 순환하는 운행이 있을 뿐인, 무궁한 흐름이 있을 뿐인 우주에 진입하게 되면서 작가의 조각은 또 다른 전기를 예비하고 있다.
생과 사. 옆으로 누운 계란형의 자소상(두상) 위에 같은 크기의 해골을 하나로 포개놓았다. 눈을 감고 있는 자소상의 무표정한 표정은 아마도 그렇게 감긴 눈 안쪽의 어둠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삶과 하나로 포개진, 삶과 한 몸인 죽음과 만나고 있을 것이다. 바니타스(인생무상),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은 그저 삶을 경고하기위한 타자로서보다는, 진즉에 주체를 형성시켜준 삶의 일부였음을 주지시키기 위해 소환되고, 삶을 사는(살아온)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사는 것임을(살아왔음을) 주지시키기 위해서 호출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에로스는 삶이면서 욕망이기도 하고, 타나토스는 죽음이면서 시간이기도 하다. 죽음이 삶을 세척하고, 시간이 욕망을 정화한다. 그리고 그 의미가 색즉시공공즉시색과도 통한다. 여기서 색은 삶 또는 욕망의, 공은 죽음 또는 시간의 다른 이름이다.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다. 삶과 죽음은 서로에게, 서로의 아바타며 분신이다. 그렇게 나는 감긴 눈 안쪽으로 열린 그곳에서 나의 분신, 페르소나, 죽음을 본다. ● 존재의 본질. 골반이 주전자로 된 남자. 골반이 주전자로 돼 있으니 그의 남근은 자연스레 주전자 꼭지가 대신한다. 주전자는 해부학적으로 골반에 해당하면서도, 정작 중년남자의 배불뚝이 배 같고 욕망의 집 같다. 안쪽으로 단전을, 바깥쪽으로 남근을 부드럽고 풍만한 곡선으로 감싸고 있는 집. 남자의 몸은 원래 두 채의 집을 거느린다. 정신이 깃드는 머리와 욕망이 거하는 배. 그런데 그 남자는 머리가 없다. 그렇다면 정신은? 혹, 정신이 호흡이 들고나는, 기를 통어하는 단전으로 내려와 통합되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해서 단전이 곧 정신을 대신하게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배는 안쪽으로 정신(단전)을, 바깥쪽으로 욕망을 아우른다. 이처럼 몸에 포섭된, 몸에 붙잡힌, 몸에 통합된 정신(일반적으로 정신은 몸에 속해져 있지 않은, 몸의 타자로 여겨진다)이 욕망의 화신 같고, 주신의 화신 같고, 디오니소스의 화신 같다(그 주전자는 전형적인 막걸리 주전자를 닮았다). 유물론적 물신? 페티시즘? 욕망의 외화? 물신화? 그리고 특히 욕망의 화신으로서의 인간. 프로이드는 인간을 욕망의 동물이라고 했다. 욕망하는 인간은 생각하는 인간보다 먼저고, 놀 줄 아는 인간보다 우선이다.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욕망을 산다는 것이다. 주전자 배를 가진, 배로 숨을 쉬고 배로 생각하는, 그 남자는 이처럼 삶이 욕망 이외의 다른 무엇일 수 없음을 주지시킨다. 인생무상. 주지하다시피 불교에서 욕망은 만고의 원인이다. 삶을 고해에 비유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해서 욕망 곧 삶의 화신은 죽음의 화신이기도 하다. 배불뚝이 주전자 배는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견인하는 삶과 죽음의 내포를, 연쇄를 엿보게 한다. 그러고 보니 배는 무슨 무덤처럼 동그랗다.
하얀 말과 흰 낙타. 하얀 말과 흰 낙타를 소재로 한 작가의 조각은 그 대상과 실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재현적인 형상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오히려 작가의 근작들 중 그 의미가 가장 오리무중인 경우가 아닌가 싶어 일견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상징적이고 암시적이고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그 의미가 열려져 있어서 어떤 식으로건 해석이 가능한. 그러면서도 작가의 말마따나 자칫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는 식의 부분적인 이해의 짜깁기나 심할 경우에 오독에 빠질 수도 있는. 적어도 이 작업에 관한한 지엽적인 해석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아우라)를 읽는 것이 주효할 것 같은데, 여하튼 작업을 모호하게 하는 것은 지나칠 만큼 뚜렷한 형상들이 아니라, 그 형상들을 배열하고 배치하는 다른 방식에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말이 있는데, 그러나 그 말의 몸통 부분이 통째로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그 빈 부분에 짐승의 우리 같기도 하고 거대한 새장 같기도 한 구조물이 들어서 있고, 그 속엔 등신대 크기의 온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양식화된 사람 형상이 걸어가고 있다(단순히 서성거리고 있다기보다는). 그의 걷는 형국으로 봐서 그는 아마도 구조물로 대체된 말의 몸통을 통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배열과 배치는 낙타를 소재로 한 또 다른 작업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적용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얀 말과 흰 낙타는 무엇을 상징하며, 또한 그는 왜 어떻게 그 상징을 통과하는가(통과할 수 있는가). 생물학적으로 흰 말과 낙타는 결함이고 결손인지는 모르나, 신화학적으로 그것은 오히려 신성한 존재를, 현실 저편의 이상을, 이데아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 몸통을 케이지로 대체한 것은 현실을, 현실적인 욕망과 속박을 상징한다. 몸(몸통)과 욕망, 특히 배와 욕망을 등가치로 놓는 등식이 재차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해서 그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현실(케이지)을 통과해 이상으로 빠져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그 케이지를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는가. 그의 몸에는 케이지와 마찬가지로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구멍이 뚫린 것은 구멍을 통과할 수 있지만, 막힌 것은 구멍을 빠져나갈 수가 없다. 구멍은 구멍으로서만 통과할 수 있고 돌파할 수가 있다. 현실을 통과하게 해주는 구멍, 그것은 말하자면 사통팔방 뻥뻥 뚫린 의식, 열린 의식, 유연한 의식, 흐르는 의식, 타자를 포용하고 타자와 통하는 의식이다(이에 반해 막힌 형상은 자기아집으로, 에고로, 욕망으로 닫힌 의식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그렇게 열린 의식을 무기삼아 그는 현실을 빠져나간다. 이로써 이 작업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경로에 의미를 부여한 모든 종교적이고 인류학적인 제식들, 이를테면 성인식과 정화의식 같은 거듭남의 계기들에 대한 메타포처럼 읽힌다. 우리는 항상 어딘가로 가고 있다. 삶에서 죽음으로, 일상(현실)에서 이상으로. 그리고 때로는 저절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빠져나가야 할 때도 있다.
우주를 소재로 한 조각들. 「우주의 시원」, 「우주와 영성」, 「블랙홀」 같은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우주의 운행방식을 형상화한다. 대폭발(빅뱅)이 일어나면서 우주가 처음으로 생성되는 극적인 순간을(우주는 지금도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하고 있다), 우주가 내뿜는 영적인 기운을(작가는 그 기운을 침묵의 무한공간에서 발신돼오는 무슨 모스 부호 같은 전파로 가정해본다), 중력이 무한대인 탓에 모든 존재를 빨아들이는 우주공간을(공, 허, 무의 질료적 표상?) 형상화한다는 것인데, 도대체 그 형상은 어떻게 가능한지, 고정된 형태로 붙잡을 수는 있는 것인지, 처음에는 종잡을 수가 없고 난감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작가노트(에필로그)에서 '파'라는 말을 찾아냈다. 작가는 원래 부유하는 생각의 속성을 지시하기 위해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마도 고정된 루트 없이 이리저리 흐르는 생각의 꼴을 암시할 것이다. 불현듯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기법)이 떠오른다. 생각 곧 의식은 생리적으로 이리저리 흐르면서 부유한다. 그렇게 흐르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면 불현듯 부상하다가도, 재차 처음의 흐름 속에 흡수된다. 어떤 논리적 개연성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연한 계기에 지배된다는 말이다. 우주 역시 정해진 길도 고정된 형태도 없이 우연성의 계기 속을 이리저리 부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은 그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변화를 붙박이로, 운동성을 정지된 순간의 포착으로, 불연속적인 계기를 연속적인 계기로,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바꿔놓는 오류(오류라기보다는 바램?)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주는 인식론적 경계의 바깥에 있다. 우연한, 변화무쌍한, 움직이는, 불연속적인, 혼돈 자체의 우주를(우주의 생리를) 의미론적으로 해석한 것이 무한이고 침묵이며, 신화적으로 해석한 것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의 뱀이며(시작과 끝이 따로 없는), 이를 조형으로 옮겨놓은 것이 뫼비우스의 띠고 에셔의 그림이다. 주지하다시피 뫼비우스의 띠는 겉과 속이 따로 구분되지가 않고 한 면으로 연속돼 있다. 이 뫼비우스의 띠를 볼륨(공간)이 있는 입체로 확장한 것이 작가의 작업이다. 작가의 작업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겉과 속이 연속돼 있고 안과 밖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에셔의 알쏭달쏭한 그림에서처럼 공간개념이 허물어지고 재정의 된다. 더욱이 작가의 조각은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유기적인 형태마저 띠고 있다. 아마도 우주의 흐르는 성질을 표상한 것일 것이다. 여하튼 그 형상은 재현적이기보다는 유비적인 것이 될 터이다. 우주에는 정해진 형식(형상)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관상 우주(흐르는 우주)의 물리적이고 질료적인 표상처럼 보이는 작가의 조각은 사실은 우주에 대한 자신의 관념상을 옮겨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존재의 기원에 대한 호기심, 무한한 혹은 침묵하는 존재가 내뿜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에 대한 매료(차라리 황홀), 존재 이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존재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블랙홀), 그리고 특히 우연한 것들을 붙잡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 같은.
이외에도 작가는 옛 현자 내지는 은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버드나무 한 그루를 조형했고(버들선생), 각 부분에 매달린 끈을 당기면 구조물이 움직이는(움직일 것 같은), 무슨 장난감처럼 생긴 집 형상으로써 유년시절의 향수를 되불러온다(가족). 불현듯 작가의 조각의 키워드는 그리움, 곧 총체적인 의미로서의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우주로 표상된 존재의 기원에 대한, 그리고 존재 이후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마저도 결국 그리움의 한 갈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 고충환
Vol.20100810d | 이일호展 / LEEILHO / 李一浩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