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10_0809_월요일_05:00pm
관람시간 / 09:00am~06:30pm / 주말,공휴일 휴관
송은갤러리_SONGEUN GALLERY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82.2.527.6282 www.songeun.or.kr
"인간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이 객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어를 매개로 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단순히 표현의 수단만은 아니다. 실세계라고 하는 것은 언어 관습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 우리는 언어가 노출시키고 분절시켜 놓은 세계를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다" (E. Sapir) ● "우리는 우선적으로 현상의 정지상태를 그리는 개념과 단절해야 한다. 소립자 물리학에서 물질이 정지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물질은 에너지처럼 존재할 뿐이며 방사를 통해 그의 존재를 알릴 뿐이기 때문이다. 부동적인 사고로 어떻게 물질을 검토할 수 있겠는가" (G. Bachelard)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어떤 떨림을 느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순간. 그 순간에 우리는 심장의 거친 박동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다. 아니 정확히 그 소리를 체감하는 것은 귀만이 아니다. 나는 온 몸으로 그 소리를 듣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 순간 소리를 '듣는다'라기 보다는 어떤 몸의 변화를 생생하게 '느낀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말로는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기어코 그것을 말로 옮긴다. '두근두근'. 그런데 그렇게 말로 옮기는 순간에 내가 온 몸으로 들었던 그 소리의 생생함이 사라진다. 말하자면 활성적이었던 것이 비활성적으로 된다. 맙소사 고작 '두근두근'이라니. 그러니 이런 가사는 얼마나 시시한가! "널 보면 두근두근 거려서 난 두근두근 떨려서 차마하지 못한 말.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매직플로우「두근두근」중에서)
그러나 그 느낌, 그 소리를 간직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근두근'이라는 부사를 택할 수밖에 없다. 똑같이 시시하지만 'pitter-patter'나 'pumping pumping'을 택할 수도 있겠다. 간직되기 위해서,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 소통되기 위해서 그 느낌은 어떤 말로 표현돼야 한다. 그 말이 문자의 형태로 가시화된다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표현된 것은 우리에게 어쩐지 아쉽게, 공허하게, 시시하게 다가온다. 물론 최초에 그 느낌, 그 소리를 말로, 단어로 표현하기 위해 고심했던 누군가는 우리와 달랐을 것이다. 그에게는 아주 넓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듀균듀균'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고 '두군두군'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으며 '더건더건'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다. 가장 근사한 표현으로 '두근두근'을 택했을 때 그의 기분은 어땠을까? 좋았을까? 섣불리 단언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에게 '두근두근'이라는 단어는 그 좋은 느낌, 그 몸의 변화와 어떤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최초의 선택 이후에 사정이 달라졌다. '두근두근'은 그 모든 선택의 가능성을 압도하는 정답이 됐다. 이와 더불어 '듀균듀균', '두군두군', '더건더건'은 틀린 표현, 잘못된 표기가 됐다.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우리의 가슴은 '두근두근' 떨려야 한다. 절대로 '듀균듀균' 떨리거나 '두군두군' 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따르고 받들어야 할 명령이다. 그 명령은 납득할 만하지만 고압적이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경험을 나누고 소통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고압적인 명령 체계에 생래적인 거부감을 갖는 종류의 인간이 그러할 것이다.
이대철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대철은 말이나 단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원체험, 본래적인 경험에 민감한 작가다. 그는 최초의 인간이 지녔던 너른 선택지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자신이 현재의 고압적 커뮤니케이션 체계에 결속돼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이미 배운 것을 그는 버릴 수 없다. 그래서 이대철이 택한 방식이 가시화된, 즉 특정 형태로 고착된 문자를 조각내는 방식이다. 예컨대 그의 작품에서 문자 'WOW'는 여러 개의 알록달록한 층(layer)이 함께 결합된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런가하면 '부웅'이라는 글자를 여러 층으로 분해하여 바닥에 길게 배열하고 그 배열의 양태를 통해 본래의 자동차 소리, 그 속도를 암시하기도 한다. 또 「퍽」이라는 작품에서는 문자를 구멍(凹)의 형태로 제시하여 그 실체성(凸)을 의문에 부치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대철은 말과 단어는 본래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 선택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면에 너른 선택지가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이렇게 그는 가시화된 문자 이미지의 고정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을 해체하고 그것을 활성적 집합체(energetic agglomerate)로 돌려놓는다.
이런 의도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업이 있다. 예컨대 그의 「28개 '쿵'의 작은 커뮤니티」(2010)나 「24개 '짝'의 작은 커뮤니티」(2010)를 보자. 여기서 우리는 28개, 또는 24개의 다른 소리를 듣는다. 아니다. 그것은 같은 소리다. 우리는 '쿵'이나 '짝'을 듣는다. 28개의 '쿵'소리는 모두 다른 소리지만 같은 소리다. 마찬가지로 24개의 '짝'소리는 모두 다르지만 같다. 마치 공중변소처럼 하나의 단어에 여러 소리가 드나든다. 여기서 '쿵'이나 '짝'은 익명의 인물들이 여행하는 정거장과 같은 것이다. 소리들은 매 순간 단어 속에 스며들어 '이것은 나다!'임을 확인시켜 주고 또 떠나간다. 우리는 연달아 쿵, 쿵, 쿵…소리를 듣는다. 매번 같은 소리가 아니라 다른 소리를 듣기 위해서. 어쩌면 그로부터 아직 '쿵'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던 때 들었던 '쿵' 소리를 듣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저 들려오는 쿵짝 소리에 몸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잘 들으면 여기저기서 다른 크고 작은 소리들도 들려올 것이다. 잠시 판단을 중단하고 그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 홍지석
Vol.20100809h | 이대철展 / LEEDAECHUL / 李大哲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