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10_0806_금요일_05:00pm
2010창작지원작가 이동주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김종영미술관 KIM CHONG YUNG SCULPTUER MUSEUM 서울 종로구 평창동 453-2번지 2,3,4전시실 Tel. +82.2.3217.6484 www.kimchongyung.com
이동주, 시선이 머물던 자리에 물음표를 남기다.-「달팽이」2005 ● 한 남자가 길을 가고 있다. 두발이 아닌 네발로. 그것도 등 위에 집 한 채를 지고서 말이다그는 마치 달팽이 같은 모습을 하고 드레스덴에서 라이프찌히까지 이렇게 다녔단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라는 유행가 가사도 있건만, 그가 짊어진 이 작은 집은 그가 편히 쉴 곳이나 안식처라 하기 보다는 오히려 떨쳐낼 수 없는 버거운 짐처럼 보이기만 했다. 달팽이의 집은 위험에 처했을 때, 보호막이라도 되겠지만, 그가 짊어진 집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기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쳐버릴 수 없는 그 '집'. 과연 그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이길래 이런 퍼포먼스까지 했어야만 했을까. 네 발로 기어가며 그가 본 유럽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러는 동안 그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은 과연 유럽인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뙤약볕이 작열하던 여름 한가운데에서 그를 만났었고, 그의 '달팽이'에 대해 들었었다. 그리고 어느덧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는 지금, 나는 그가 네 발로 걸었던 유럽의 한 거리를 걷다 다시 그의 '달팽이'가 떠올랐다. 그에게 직접 묻지 않았기에, 여전히 분명한 답을 얻지 못한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도대체 그는 왜 '집'에게 시선을 주었던 것일까.
집 ● 한국 사회에서의 '집'은 좀 특별한 것 같다. 일반적으로는 가족 구성원들의 보금자리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종종 그것은 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투기의 대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사회 모습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집은 '누구와' 연결되느냐에 따라서 많은 의미의 변주를 허용한다. 평범한 중산층의 집은 안락하고 아늑한 보금자리의 이미지를 주는가 하면, 기러기 아빠들의 집은 마음 한 켠 싸해지고 쓸쓸함이 감돌고, 투기꾼들이 보는 집은 그저 촌스럽게 화장을 하고 거리에 나 앉은 여인네 같은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이동주의 집은 어떤 것일까. 이동주의 집은 단순하다. 집에 대한 디테일은 없다. 장난감을 그냥 가져와서 쓰기도 하고, 나무로 집을 짓기도 하지만 그 집은 아이들이 그린 그린 그림만큼이나 단순하다. 그리고 그 집에는 사람이 없다. 사람이 없이 시선만 머무는 집. 그래서 이동주의 집은 보는 사람을 사변에 빠지게 하는 매력이 있다. 「여행」이나 「집」은 이동주가 집이라는 모티프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먼저 「여행」을 보자. 두 개의 모니터에 각각 영상이 나오고 있다. 하나는 빨간 집을 보여주는 영상이고, 다른 하나는 지나는 기차를 보여준다. 이 영상의 소스가 어디에서 나올까 궁금해 질 무렵, 전시장 한 켠 테이블 위에 놓은 빨간 지붕의 작은 장난감 집과 그 주위를 맴돌며 돌아가는 열차를 볼 수 있다. 장난감 집에 설치된 카메라는 집 주변을 맴도는 기차를 보여주고, 기차는 원형으로 이어진 레일 한가운데에 있는 집을 비춘다. 열차 집 주변을 돌고 있지만, 집에 닿지 못한다. 집은 열차를 보고 있지만, 열차로 다가가지 못한다. 여행의 상징인 열차, 긴 여행의 과정에서도 집은 그렇게 마음 한 구석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일까. 독일이라는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온 작가의 마음 한가운데 저렇게 집이라는 것이 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일까. 기차로 대변되는 여행과 유학생이었다는 작가의 사정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려 하면,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읽혀질 위험도 있지만, 이동주는 교묘하게 이 작업을 통해 개인사적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인 경험의 차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런가하면, 2008년 제작한 「집」은 「여행」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일단 나무로 만든 집은 「여행」에서의 집보다 크지만, 「여행」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집은 누가 보아도 집인 그렇게 전형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이번 집에는 문도 창도 없다. 다시 말하면,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창구라곤 없다.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집. 밖에서는 도저히 안의 상황을 짐작할 수도 없게 견고하게 닫힌 그런 집이다. 하지만 그 집이 왠지 낯설지 않다. 문도 창도 없이 외부세계와 단절된 그의 집은 마치 그것이 지금 우리들의 집이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만같아서 오히려 마음이 짠하다. 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이동주는 외부에서 들여다 볼 수 없는 그 집 안에 카메라를 통해서 집 안의 이야기를 밖으로 내뱉는다. 하지만, 집이 스스로를 드러내 보여주는 이미지는 새로울 것이 없다. 그저 흔히 볼 수 있을법한 여느 집안의 풍경일 뿐이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는 그런 집이 과연 가능할까? 창도 문도 없기에 외부와의 소통이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안에 장착된 카메라를 통해서 그 안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그 '집'이 던진 물음표이다.
카메라의 시선 ● 이동주의 작업을 읽기 위해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카메라의 시선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다른 작가들과는 완전하게 차별화되는 뭔가 새롭고 획기적인 방식으로 카메라의 시선을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한눈에도 알 수 있는 그런 일반적인 방식으로 카메라의 시선을 사용한다. 그래서 언뜻 그가 쓰는 기술적인 면은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에게 있어 카메라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맥락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카메라를 쓰고 있느냐라는 것이 더욱 정확한 지점일 것이다. 「여행」에서나 「집」에서나 심지어 「달팽이」에서도 그의 카메라는 정직하게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네 발로 기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담담히 담아내는 카메라고, 등 위에 얹혀진 집에 장착되어 있는 카메라가 담는 세상을 여과없이 보여주며, 장난감 집과 그 주위를 맴도는 열차 안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문도 창도 없는 집 안에 카메라가 있어서 집 안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그러나 기어가는 그의 등 위에, 장난감 집 안에,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집안에 설치된 카메라가 내보이는 영상은 밋밋할지언정, 그 영상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에게 카메라는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자신의 시선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적어도 그에게 예술은 보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깜짝 놀랄만한 테크닉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 새롭기만 한 것을 추구하는 것도 아닌 듯 보인다. 오히려 그에게 예술은 그가 일상에서 담담하게 느껴가는 어떤 것들을 사람들에게 직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주며, 그로 인해 보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거나 의문시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에 더 가까운 듯 보인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하나로 읽히지 않는다. 다양한 레이어 안에서 누군가는 이동주의 작업 안에서 이 시대 사람들의 소외된 모습을 읽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엇가기만 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미끌어짐을 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삶의 고단함을 느낄 수도 있다.
Zoetrope-돌아가는 세상 ● 최근 그는 쥬트로프를 활용하는 작업에 빠져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쥬트로프는 원통형의 실린더에 일련의 그림들을 붙여 회전시키면서 이미지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초기 시각장치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쥬트로프에 꽂혔을까. 이제 한국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일까. 그 역시 뭔가 '새로워야 한다'는 작가적 강박에 빠져 무엇인가 새로운 것으로 우리를 놀래키고 싶었던 것일까. 이런저런 궁금증을 가지고 그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쥬트로프 작업이 이전 작업과의 완전한 결별도 아니며, 독일에서의 경험과 기억과의 이별도 아니라는 것을, 아니 독일에서의 경험과 기억의 잔상의 연장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쥬트로프는 그가 만든 투명 실린더에 이미지를 붙여 그 이미지들이 계속적으로 돌아가게 하며, 돌아가는 모습을 카메라로 포착하고, 또 거기에 독일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유러피안 스타일의 집을 투사하여, 몇 개의 이미지 레이어들이 겹치고 중첩되게 하였다. 마치 기억이라는 것이 시간의 선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듯, 결과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의 단편에는 투사되는 이미지의 선후가 없이 뒤섞인다. 세상이란 것이, 삶이라는 것이 어쩌면 목적하는 하나의 지점을 향한 진보도 아니고, 과거의 경험과 현재가 만나고, 그것이 다시 피드백 되어 돌아가는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은 아닌지요? 라고 묻고 있는 듯, 하염없이 그의 세상은 '돌아간다' 이번 작업에서도 작업의 매카니즘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그대로 드러나 있다. 때문에 관객은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과연 이 작품이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며, 중첩되는 레이어들을 통해서 보이는 이미지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작가 이동주 ● 이동주의 작업에는 아직 큰 기복이 보이지 않는다. 감히 그것을 독일스타일이라고 불러도 될까. 아니면 작가의 개인 성향이 그런 것일까. 작업 바깥세상에 관심한번 기울일 법도 한데, 그것은 내 일이 아니라는 듯 그저 무덤덤하게 자신의 작업에 집중하려 한다. 그동안의 작업 스타일로 미루어 짐작컨대, 공장에서 작업을 찍어내듯 단시간에 무수히 많은 작품들을 찍어내는 작가들처럼 많은 작품들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놀랄만한 혁신적인 기술을 쓰는 것도 아니고, 설령 쓴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들을 드러내 놓을 것이기에 형식적으로 새로운 것을 통해 우리를 놀래킬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에 더 집중하며 듣고 싶어지게 된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그가 던진 질문에, 작업의 의미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예술도 자본시장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기에 약삭빠르게 시류를 읽고 거기에 편승하는 작가들도 많아지고, 그런 몇몇의 작가들에게 성공이라는 타이틀이 돌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특히 현대예술이라는 것은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닿는 길을 찾아가는 길이고, 어쩌면 그렇게 세상을 바꾸어갈 수도 있는 것이기에,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작업하는 그의 모습이 더욱 오래 마음에 남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음 그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지 더욱 궁금해지고 기대되는지도 모르겠다. ■ 신보슬
Vol.20100809e | 이동주展 / LEEDONGJOO / 李東柱 / installation.vid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