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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0_0728_수요일_06:00pm
포스코미술관 공모 선정 작가展
전시기간 중 상영_실험영화 "Absence"
관람시간 / 09:00pm~08:00pm / 토요일_10:00pm~03:00pm / 공휴일 휴관
포스코미술관_POSCO ART MUSEUM 서울 강남구 대치4동 892번지 포스코센터 서관 2층 Tel. +82.(0)2.3457.1665 www.poscoartmuseum.org
인간의 눈은 두 개인데 왜 세상은 하나로 볼까? 아니, 왜 하나로 보도록 만들어 졌을까? 다윈Darwin적 접근으로, 생존율을 증가시키기 위한 정교한 변증적 과정이었을까? 아니면 우리에 모든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저 우연적인 자연의 변이變異였을까? 그렇다면 왜 태양과 달은 또 공교롭게 하나씩일까? 그것들이 두 개 이상이었다면 근거 없는 신념들에 인류사의 비극도 좀 줄지 않았을까? 우주에 그 모든 산물에 일원으로서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체계에 둘러 싸여 있다. 우리에 사고는 다분히 시간적 인과관계로 이해되며 그것은 또 공간과 관계한다. 이 두가지 신체적 제약은 인식에 틀을 제공하며 그 한계를 자각하는 태도는 공포와 상상으로 이어진다. 시지각사史에서 세계에 대한 관찰, 현상에 대한 이해에서 돌이킬 수 없는 어떤 함정으로 빠져들게 된 것도 이 탓은 아닐까? 예수 와 마호메트 그리고 알베르티Alberti는 모두 선지자일까? ● 역사적으로 시각은 신뢰보단 불신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플라톤에서 데카르트에 이르는 시각에 대한 태도가 그러했으며, 그들에 결벽증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회화에서 영화 너머까지 이 모든 시각적 매개물들은 그 탄생부터 환영幻影에 대한 환상과 멸시라는 이중적 업보에 원죄를 지녔던 것이다. 세상을 단일적 구성으로 보도록 형성된 과정이 인간으로 하여금 현상에 대한 인식에 있어 편향적 인과관계로 규정하는 원인이 되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단안적 현상 인식태도가 시간이라는 개념과 균질한 순행성에 대한 이해를 강요하진 않았을까? 사진술의 개발과 영화의 등장에서 GUI까지,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그들에 시지각적 완성의 과정으로 강요하진 하지 않더라도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관성에 가속도로 치닫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에게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먼 옛날 인간이 인간이라고 말할 수도 없던 그 시절에 소리나 냄새에 의존하며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생존과 번식에만 급급하던 시절도 있었을 텐데, 왜 인간의 신체에서 눈이라는 시각체계가 발생하고 그것이 이토록 지배적 감각체계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눈은 가장 복잡한 진화과정을 거쳤다고 말한다. 그 정교한 구조적 복잡성에 원동력은 개체간 소통에 주도적 역할로서 확대를 의미하며 우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현대 문명의 시각중심적 환경과의 연관성도 흥미 있는 지점으로 맞닿아 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구체화 하거나 어떤 상상을 발현 시키는 과정에는 마음속에 시각을 작동시킨다. 우리는 생각을 할 때도 시각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 현대 미디어사회는 영상映像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의 문명에 시각이 이토록 지배적인 체계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어떤 연유일까?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적 과정이었을까? 영상은 우리에게 끝없는 판타지fantasy를 제공한다. 그것이 정교하게 사실처럼 꾸며진 것이든 노골적으로 비현실감을 조성하든지 간에, 정방형에 스크린은 그 실체적 존재감을 최대한 억제하며 그 안에서 구현되는 이미지에 환영적 기능성에 그 역할이 맞춰져 왔다. 다시 말해 기능하지 않는 기능성이 스크린의 미덕이 된 것이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사실적 기록으로 전적인 객관적 재현으로 인정받아 왔던 것이다. ● 사진이 갖는 고증적 속성으로서의 심리적 작용이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전통적인 세계 재현의 방법에서 엄청난 사건이며 분명한 변화에 전조이다. 사진은 회화가 오랜 세월동안의 각고의 노력에도 가질 수 없었던 신뢰성을 일거에 확보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과 공간에 분명히 위치하고 현상을 묵도默禱하고 있다는 확신이다. 사진은 결코 현상에 비평을 가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과 공간을 같이하며 '현상에 공범자'로서 정황에 위치할 뿐이다. 어쩌면 그렇다 믿기 때문에 우리는 사진의 사실성을 신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성이란 결코 단순히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은 분명 아니다. 그것은 현장에 기술적이 모사模寫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심상의 표현을 위한 형식주의적 과장이 용인될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지각사에 대한 역사적 규정이 최근에 사진술이나 영화적 시각화의 사실주의적 표현의 기계적 방식을 '목적론적 결과'로 그 수렴점을 삼을 경우 사실성에 대한 모든 규정을 대표할 위험도 내포하고 이는 다양한 출발점에 다른 접근들의 가능성을 닫아 버릴 편협함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리얼리즘realism이라는 영역은 방대한 범위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인색하고 까다로운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회화의 장대한 역사를 영화는 그 짧은 역사에서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체 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 한다"는 생물학적 규정을 여기에 대입 시켜 본다면 무리일까?
이제는 영상이 사실을 전달해 주고 객관성을 확보해 준다는 신뢰는 순진한 생각이 되어버렸다. 한 세기전 사람들이 그 매혹적인 사실감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암전속의 발광하는 스크린의 판타지는 이제 얇은 액정 면에 그 깊이감은 사라졌다. 이제 사람들은 스크린의 판타지가 제공하는 깊은 심연이 아니라 단 한치도 시선을 담글 수 없는 그 전기적 발광체의 매끈한 수면에 만족하고 소비해버린다. 이제 우리는 판타지에 들어가지 않는다. 다만, 그 판타지를 지켜볼 뿐이다. 어쩌면 사실성을 보여주는 방법의 기술적 진보의 다양화라기보다 그 모든 것을 사실적인 재현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의 관대함의 증가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재현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살아지면서 그 모든 것을 사실적 유희로 즐기고 감수하는 절망에서 기인하는 체념은 아닐까? 시선은 결국 "기억될 수 없음"을 이 모든 수고의 과정을 통해서 깨달았음은 아닐까? ● 인간의 눈은 이제 단일한 지점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동시에 두 개 이상에 관심을 두며 지각과정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산만함은 원초적 본능이었을까? 아니면 진화의 과정에서 지각감각의 오류일까? 또는 현대 영상미디어의 증대로 인한 일시적인 진화적 퇴화로 최근의 사건일까? 그도 아니면 풍부한 상상력과 오감의 풍요로움을 완벽하게 통제하던 감각체계가 혼란을 겪고 있는 잉여과잉의 재난 일까? 메두사Medusa의 홀림에 '믿었던 방패들'은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이 판명判明난 지금, 이제 눈을 가리거나 어쩌면 아예 뽑아버리는 페르세우스Perseus의 결단이 필요한 시대인가...
각각의 독립된 채널에 의해 두 개의 화면이 구성된다. 남자가 있는 공간과 여자가 있는 공간으로... 이렇게 만들어진 두 개의 공간은 각각의 이야기구조를 전개하는가 하면 하나의 단일화면으로의 구성을 이루면서 통합된 하나의 이야기구조를 만들기도 한다. 적당한 원근법적 통일감이 적용된 디제시스내(內) 재현적 공간의 시각적 일관성은 그다지 정교하게 조성되지 않더라도 관람객에게 통합된 이야기구조로서 작용하게 된다. 전형적인 드라마적 구조를 취하는 영상물이 보여주는 극적 긴장감이나 반전 등에 다양한 내러티브적 유희가 가능해 지는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가상으로 조성된 단일화면은 일반적으로 조성되는 단일화면과 근본적인 차이점이 하나 숨어있다. 바로 "드라마적 요소의 가변성"이다. ● 두 개의 화면은 상영 시간(길이)의 차이가 있다. 각각의 두 영상 - 두개의 독립된 드라마 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드라마를 만들게 될, 이른바 드라마재료(데이터베이스)라 볼 수 있는 - 은 각각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반복 재생된다. 그러다 보면 두 영상의 길이 차에 의해 서로가 통합되어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매번 반복 될 때마다 또 다른 이야기를 생산해 내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무한하게 - 엄연히는 유한하지만 - 재생산되며 관객의 개입(감상)과 만나게 된다. 관객들이 이 이야기구조에 어느 순간에 개입하는가와 또 얼마동안 개입하는가에 따라 이해되고 음미되는 이야기의 구조 전체의 결과물 역시 다양하게 재생산되고 소비될 것이다.
일상적인 풍경 또는 인물이 주어진다. 그렇게 주어진 이미지는 단일시점의 원근법적 권력에 순응하지 않는다. 그렇게 근대과학의 합리주의적 수렴점을 빗겨가는 것이다. 그것은 지각에 대한 욕망의 잉여가치 생산을 거부하며 동시에 이미지 안에 내재한 서사의 관성을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도상(圖像)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미지의 영역이든 필연적으로 상정하는 서사의 맥락에 대한 의지이든 다양한 관점의 편린(片鱗)들은 다양한 과정을 거쳐서 채집되는 것과 같이 그것들은 다시 다양한 관계적 맥락 속에서 만나고 재구성되어 소비에 이르게 된다. 그것들에 '관계의 이해와 맥락의 구축 그리고 소비'라는 과정은 편향적으로 구조화 될 수 없으며 그러한 관성을 강요할 수도 없음이다. 또 '정의될 수 있는 현상'의 생산과 소비라는 구조 역시 상호 보완(補完)적이며 수정(修正)적인 관계로서 재생산의 과정을 끊임없이 지속하게 된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시간적 순행의 내러티브적 구축을 이루고 이야기를 이해하며 주제성을 찾는 일반적 습관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내러티브라는 것이 영상적 시각화 안에서 시간적 순행을 고집하지도 않을 뿐더러 - 실재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기억하고, 말하고, 이해하고, 고집하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 사실상 이해의 문제 다시 말해 감상자 안에서 구축되는 내러티브의 맥락은 실재론 순차적 시간에 의해 정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감상자 안에서 그것은 시간적 역행을 이루기도 하고 파편적 정보로 존재하다가 적절한 스토리적 정보가 주어졌을 때, 순식간에 재조립되기도 하며, 심지어는 잘못된 정보로 전혀 다른 내러티브를 구축하기도 하였다가 나중에 수정되기도 한다. 이 중 어떤 것은 '반전'이라 칭하면서 감동하기도 하는데, 감상자의 영화에 대한 이러한 분석적 습관이나 지知적 부족에 의한 다양한 소비 행태는 결코 하나의 영화가 하나일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마찬가지로 생산자의 이것과 관련된 수사적 수법들은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모든 다큐멘터리조차 픽션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 공존(共存)이란 어떤 의미일까? 같은 시간에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은 공존을 보장하는 것일까? 우리는 누군가와 무엇을 함께한다는 것의 증거를 어디에서 찾을까? 함께 식사를 했다든지, 함께 영화를 봤다든지 하는 그런 것들? 어쩌면 타인과 함께 같은 시간대를 소비하고 같은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고 있음을 통한 위안은 아닐까? 누구와도 같이 할 수 없음에 위기를 느껴서 시간에 집착하고 공간에 의존하며, 그렇게 위로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실로 누군가와 같이 할 수 없음의 슬픔이란, 같은 시간에 같이 하지 못함과 같은 공간에 같이 할 수 없음의 고통보단 같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함에도 같이 할 수 없음은 아닐까... ■ 이기수
Vol.20100728b | 이기수展 / LEEKEESOO / 李基洙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