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사람들 ordinary people

박국진展 / BAHCGUHCZIN / 朴國珍 / sculpture   2010_0723 ▶ 2010_0731

박국진_Karma_혼합재료_70×45×25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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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협찬/주최/기획_한전프라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공휴일_10:00am~05:00pm

한전프라자 갤러리 KEPCO PLAZA GALLERY 서울 서초구 쑥고개길 34(서초동 1355번지) 한전아트센터 1층 Tel. +82.2.2105.8190~2 www.kepco.co.kr/plaza

눈 감은 자들의 신체, 박국진의 미메시스 1. 정상 ● 2009년 전 세계는 신종 플루[신종 인플루 엔자 A(H1N1)]와의 전쟁을 치렀다. 마치 14세기 유럽의 흑사병이 재발 한 것처럼 전 세계의 사람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모든 언론에서는 신종 플루에 대한 집중적인 보도와 예방을 권고했고, 의심되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격리당했다. 신종 플루로 의심되는 첫 사망자가 발생하고 언론과 보건당국은 감시와 격리, 그리고 의심에 의심을 더하여 관리를 하였다.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않았고, 마스크가 동이 날 정도로 사재기를 하였다. 조금이라도 발열이 있으면 부모자식 간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신에서 '세계보건기구(WHO)의 신종 플루 대유행 선언이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꾸민 음모'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음을 보도하였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 이후 신종 플루에 대한 이야기는 전 세계 언론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박국진_Save Trouble_혼합재료_90×80×63cm_2010

2. 비정상 ● 신종 플루 사건은 많은 생각할 지점들을 남겼다. 사회의 정상과 비정상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었고, 질병에 대한, 그리고 관념의 틀이 인간의 신체를 어떻게 훈육하고 제어하는지를 인식하게 하였다. 즉, 사회의 정상인들은 자신의 영속성을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과 비정상인을 구분하고 격리와 차별의 방법으로 타인들을 통제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푸코(Micheal Foucault)는 이러한 통제의 힘을 바로 권력(power)이라고 하였다. 그는 권력은 언제나 지식과 연계되어 있으며, 우리는 권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권력이 행사되는 장소 중의 하나가 바로 몸인데, 사회는 이러한 신체를 훈련하고 순응시켜 그 효용성을 최대한도로 증대하고자 한다. 바로 인간의 육체를 생산적으로 만드는 '생체 통제 권력(bio-powers)'의 장치가 사회속에서 제도화되고 운영된다는 것이다. 즉, 푸코는 인간의 몸을 생물학적 실체가 아니라 무한정 변화할 수 있는 '사회적 구성체'로서의 몸으로 인식하였다. 급기야 사회는 신체를 넘어 추상화 된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는 단순히 몸이 아니라 몸을 통해 드러난 정신과 관계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전문가, 즉 지식을 가진 권력자들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의 신체는 지식-권력의 틈바구니에서 끊임없이 구성되고 통제된다. 사회의 전문가, 혹은 사회적 담론이 인간의 신체를 제어하고 판단하는 일은 단순히 신종플루 사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등 전 분야에 적용된다.

박국진_Addiction_혼합재료_93×75×60cm_2008

3. 신체통제 ● 작가 박국진은 이러한 사회적 담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가 신종 플루에 대해 이야기 한 것도, 직접적으로 푸코를 거론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은 푸코가 이야기 한 권력과 인간 신체의 통제 현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실제 사람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는데, 하나같이 사회 속에서 차별받거나 시스템에 의해 통제당하는 비정상인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사회적 시선에 의해 억압당하는 신체와 돌연변이, 그리고 정상인을 위한 보조기구, 전자적으로 통제되는 인간이미지 등으로 구성되었다. 콜라를 수혈 받고 있는 인물「중독」이나 다이어트를 위해 무리하게 살을 빼고자 하는 거식증의 여인「카르마」은 어쩌면 우리들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산업사회의 환경오염과 대량생산의 과다 식량조달은 각각 「왜소증」과 「조숙증」이라는 기형적 인간을 배출하였다. 박국진은 이러한 사회적 이상 현상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작품을 통해 너무나도 명확하게 우리가 알고 있고, 인식하고 있는 사회의 비정상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의도가 비정상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였다면 아마도 작품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비정상과 정상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지점,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이 오히려 정상일 수도 있다는 지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푸코의 말대로 사회적 구성체인 인간의 신체가 사회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고 억압되고, 변형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 시대 인간의 신체를 바라보는 눈 자체가 시대의 관념이자 권력이기 때문이다. 광고에 나오는 늘씬한 여자들의 표상이 바로 거식증을 만들어내었고, 상품광고가 인간을 물건에 종속하게끔 만든 것이다. 그러니 환경오염과 사회구조는 말할 것도 없다.

박국진_Qian's Leg_혼합재료_70×48×30cm_2009
박국진_Precocious Puberty_혼합재료_120×50×35cm_2008

4. 편견 ●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인간의 인식과 편견에서 출발한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정상인보다 조금 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 다수의 정상인은 그 장애인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그 평가는 자신이 정상인이라는 범주에 속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즉, 연민과 동정의 감정 없이는 장애인을 정상인과 동질화시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박국진은 작품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비정상에 대한 편견들을 위트 있게 되받아 친다. 그는 장애를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장애가 하나의 편견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는 작품 「상상임신」을 통해 등이 굽은 꼽추 여의 심경을 보여준다. 등이 굽은 아주머니는 자신이 마치 상상 임신을 한 것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부풀어 오름을 경험하고 있으며,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도 없다. 그러나 꼽추 여인을 바라보는 정상인의 눈에는 연민과 동정이라는 필터가 끼워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 살 때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잃은 중국 소녀 첸 홍얀(Qian Hongyan)이 농구공을 다리에 끼워 살아가는 모습(「첸의 다리」)에서 우리는 슬픔과 연민의 감정이 느낀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연민은 그녀에게 의족을 만들어 주었고 그로써 그 소녀는 연구의 대상, 관찰의 대상이 되었다. 수영을 배우는 그녀는 수영장에서 의족보다 농구공이 더욱 편안하다고 한다. 물론 의족이 그녀의 삶을 더욱 정상적으로 살아가게 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려는 인간의 노력은 정상과 그렇지 않음을 명확히 구분하는 편견의 확인 점이자 생체통제 권력의 시작점인 것이다. 그녀의 표정을 보라 얼마나 해맑은가? 정상의 관점에서 정상이 아닌 것은 언제나 비정상으로 받아들여진다.

박국진_Decently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0

5. 정상을 향한 보철기구 ● 박국진은 재미있는 작품을 내놓았다. 바로 「특별한 다리」와 「친절한 손」이다. 정상인이 비정상을 체험할 수 있는 기형적인 다리와 보철 팔이 그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체험하기 위한 보철기구가 아니라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구분을 없애기 위한, 단지 표면에 드러나는 편견의 시각화인 것이다. 이처럼 외형적인 신체, 보이는 형체를 통해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지만 사실 그 구분은 생물학적 실체를 벗어난 인간의 추상화 된 사회적 정신에 의해 구분지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 구분은 단순히 인간의 신체를 넘어 사회구조 속에서 재지배되고 훈련된다. 21세기 디지털 사회는 인간의 신체를 기계적인 구성요소로 받아들인다. 전자지문을 통한 인간신체의 지배는 비정상의 개념을 더욱 확장시킨다. 기술에 의해 범죄자, 특별한 병력이 있는 자, 이탈자, 사회 부적응 자 등 인간의 모든 신체적 활동들은 기록되고 통제된다. 박국진은 전자잉크로 비정상의 아이콘인 괴물, 즉 「프랑켄슈타인」과 「지킬박사와 하이디」를 그려 정상적이지 않음을 상징화 시킨다. 사실 프랑켄슈타인, 지킬박사와 하이디는 디지털 사회를 살아가는 정상적이라 생각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는 비정상은 정상을 정의내리기 위해 만든 편견의 언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사회적 편견의 언어를 다시 환기시키기 위해 불평등, 비정상의 모습들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정상적인 것이란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입증할 증거를 자신 안에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외부에 있는 비정상을 설정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상은 언제나 우열의 위치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박국진_Dr. Frankenstein's Monster_캔버스에 먹, 피그먼트 프린트 스템프_100×122cm_2010

6. 배수구 마개 ● 인터넷에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구분하는 글이 하나 올라와 있다. 한 사람이 정신병원 원장에게 어떻게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구별하느냐고 물었다. "먼저 욕조에 물을 채우고 욕조를 비우도록 지시하면서 숟가락과 찻잔과 양동이를 줍니다." "아하!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면 숟가락보다 큰 양동이를 택하겠군요." 그러자 원장 왈. "아닙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욕조 배수구 마개를 제거합니다." 정상과 비정상은 신체에서 오는 물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인간의 인식과 관념에 의해 생성되는 것임을 이 글은 유쾌하게 전달하고 있다. 박국진이 사실적인 인간신체의 묘사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정상과 비정상의 이야기 또한 바로 이러한 편견과 오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닐까? 비정상을 향한 편견은 현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의식에서부터 출발하기에 타인의 신체를 끊임없이 통제함으로써 정당성을 갖고자 한다. 배수구 마개를 제거하면 모든 물들은 한꺼번에 사라지는데 말이다. ■ 백곤

Vol.20100723f | 박국진展 / BAHCGUHCZIN / 朴國珍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