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10_072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00pm / 일요일 휴관
두루 갤러리_Gallery THROUGH 서울 용산구 이태원 1동 102-29번지 Tel. +82.2.3444.9700 www.gallery through.co.kr
인간 실존의 벽(壁)과 그 너머의 판타지 ● 이희진의 작품은 언뜻 보아 생경한 색채와 단순 명확한 윤곽의 구상 형태 때문에 나이브한 이미지 회화로 비추어진다. 하지만 작품 앞으로 다가가 현실과 불협화음을 일으킬 것 같은 생소한 이미지들을 바라보노라면, 우리는 금방 아르카익한 초현실적 환상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욱이 환상의 내용이 처음 나이브하게 보았던 인상과 달리 인간 존재에 대한 진지한 사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는 순간, 작품 이미지에 대한 이해는 어느 듯 실존주의 해석으로 뒤바뀌고 만다. 판타지의 회화가 존재에 대한 사유로 출발했다는 사실은 다소 예외적이어서 그만큼 흥미로운 일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인식의 경로를 살펴보기 위해, 우선 작품을 형성한 주요 소재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해보기로 하자. ● 작가는 이미 삼, 사년 전부터 거의 동일한 소재를 다룬 작품에 매진하고 있다. 처음에는 도시의 거대하고 묵직한 벽돌 벽의 통로를 따라 여러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형상이 차츰 기호화되면서 사라졌다. 화면에 벽만 남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화면 배경으로 청명한 푸른 하늘이 등장한 동시에 그와 대조를 이루는 것처럼 묵직한 붉은 색의 벽돌 벽이 그려졌다. 하늘과 땅, 공기와 흙, 정신과 물질, 청록색과 적색 같은 이원 대립형식을 통해 다양한 차이를 연출하는 표현을 즐기려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들게 하는 연작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작년 후반기 즈음 작품에 변화가 찾아왔다. 작가가 벽의 단순한 물리적 중량감을 포기한 대신, 그 벽을 막다른 공간 혹은 한계나 틀을 의미하는 도상 이를테면 다분히 의식적인 상징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 이번 2010년 7월 개인전에 소개된 작품들 여기저기에서 그러한 변화된 벽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관심을 기울일만한 또 다른 변화도 발견되는데, 그 전의 벽이 다소 낮은 채도의 적색 벽돌들로 평범한 외양이었다면, 최근의 벽면은 채도, 명도가 한껏 올라간 강렬한 주홍색 벽돌로 구성되어 감상자의 무딘 시선을 거의 낚아채다시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긋난 층으로 쌓인 벽돌 벽의 모습을 거부하고, 납작한 사각형 벽돌들을 퍼즐 형식으로 연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작가가 육면체 벽돌의 원래 부피나 무게감을 소멸시킨 대신 이제부터는 화면 공간의 현실 원칙을 넘어 자신의 의식을 따라 자유롭게 구성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덕분에 최근 작품의 벽돌 벽은 딱딱한 고체의 덩어리라기보다 작가의 상상에 따라 형태가 얼마든지 유연하게 변화될 수 있는 환상적 실체로 바뀌어 있다. 한 마디로 실증적인 사실 묘사가 아닌 비현실의 판타지 세계가 된 것이다. 이로서 작가는 자아의식이 희구하는 환영을 최대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다음과 같은 의문이 남는다 : "그렇다면 중심 모티브인 벽에 투사된 작가의 의식은 대체 어떤 것일까?".
흔히 '벽'(壁)이라 하면 건물을 둘러싼 고정된 물리적 실체를 뜻한다. 그런데 작가가 그리고 있는 '벽'의 모습은 현실에서 마주치는 벽과는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작가는 이 벽을 자기 의식을 비추어내는 대상 특히 인간의 존재양식에 대한 의식의 결과물로 삼기 때문이다. 주홍색 벽돌 벽이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말대로 "인간 삶 자체의 상징"이되거나 인간 존재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제약, 한정된 테두리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그렇게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의 내용을 각양각색의 벽의 형상을 통해 투영시키고자 한다. 자신이 의식했던 혹은 다른 인간의 삶을 통해 의식했던 그런 존재 상황에 대한 사유가 벽면의 도상으로 현현되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거기서 감상자는 고뇌와 절망의 존재상황을 읽을 수도, 환희와 희망의 존재상황을 읽을 수도 있다. ● 그런데 필자는 이희진의 작품에서 인간 존재의 상황이 절망과 희망 사이의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꿈꾸는 상황이란 이슈를 제시한다고 본다. 절망 속에 위치한 희망이란 비합리이고 역설이지만, 실존주의에서는 이런 부조리한 존재자 상황을 실존이란 개념으로 잘 설명해준다. 실제로 작가는 캔버스 화면 위에서 실존의 상황을 벽면 자체를 통해 그리고 벽면과 그 너머의 광경이 연출하는 대비를 통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묘사해낸다. 마치 인간 의식의 상태를 표현하듯이, 벽면은 '닫힘'과 '열림', '폐쇄'와 '개방'의 형태를 취하면서 '구속'과 '자유', '억압'과 '해방'의 의식을 비추어낸다. 작품들을 보면, 벽-'테두리가 화면 공간을 완전히 폐쇄하는 법은 결코 없다. 시야를 가로막는 듯 싶다가도 어느 한 방향으로 꺾여 물러나거나 아니면 벽면 중간에 큰 구멍이 뚫려 있기도 하다. 그래서 감상자는 언제든지 벽돌 벽 너머의 광경 즉 시원하게 트인 푸른 하늘과 녹색의 식물들을 바라볼 수가 있다. 다행이도 그 곳은 마침내 숨을 크게 내쉴 수 있는 드넓은 공간이면서, 그지없이 밝고 자유로운 세계이다. 하지만 감상자는 그곳이 비현실의 세계이고 또한 기이하게도 인간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판타지의 세계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마치 삶의 막다른 한계에 맞닥뜨릴 때마다, 그 한계인 벽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절실한 의식이 만들어낸 환영이라고 할까?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보이던 벽면의 한쪽에서 발견한 이 탁 트인 공간은 존재의 실존적 모색이 만들어낸 허무한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현실에 절망한 존재자에게는 그 환상이 구원의 '숨구멍'이 될 수 있다. ● 벽 뒤로 펼쳐진 광경을 좀 더 주목해보자. 여기에는 눈부신 청색 하늘과 낯설도록 무성히 자라나는 식물들이 그려져 있다. 누구라도 현실의 풍경이 아님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는 어설픈 초현실의 장면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꿈 속 풍경이 그런 기묘한 낯설음의 세계이고 이상한 불안함으로 충만한 어색한 광경이지 않던가. 더욱이 작가는 화면 공간 어디에도 인간의 모습을 그리지 않아, 마치 역설의 형이상학파 화가 조르지오 데 키리코처럼 인간 부재를 통해 존재의 우연성과 무상성이란 초현실주의의 핵심 내용을 강조하려 한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필자가 생각하기에 작가는 전통적인 초현실의 환영에 멈추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존재양식에 대한 실존주의적 사유를 지향했다고 판단된다. 인간의 자리를 대신한 무명의 기이한 벽 --어느 작품에는 벽돌 하나하나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 과 하늘 그리고 식물은 다름 아니라 존재 이유를 모르는 인간의 '의식의 영점(零點)' 상태를 표시하는 기호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작가는 화면에서 벗어나 화면의 판타지를 바라보며 환상을 만들어내는 위치에 서있을 것이다. 애매한 존재의 진상을 모색하기 위해 화면-스크린 위에 자신의 의식을 투사하여 존재 이유를 되묻고 있을 수 있다. 실존주의에서 존재의 본래 모습은 아무 정당성도 없이, 뜻도 이유도 없이 내던져져 있는 상태로 설명된다. 이를테면 이 벽과 나무가 저 하늘이 왜 여기에 또는 저기에 있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음이다. 그래서 일체의 합리적 설명과 실증적 묘사는 존재의 본체를 드러낸다기 보다 오히려 그것을 위장하거나 은폐하는 기만으로 비추어진다. 그러므로 작가는 작품에서 굳이 사실적 묘사를 포기하고, 비합리의 초현실적인 판타지 즉 붉은 벽돌들의 퍼즐과 기이한 식물들의 부조리한 어울림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 광경 안에서는 옳고 그름의 판단이 모호하며, 질서와 비례 그리고 원근법 같은 미술의 대원칙-미술사에서 지배적이고 결정적이었던 규칙-이 처음부터 도외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하여 감상자가 자신의 습관대로 화면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 든다면, 그것은 작품의 본질과는 상관 없는 감상자 개인의 생각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또한 합리적 연관도 없이 그렇게 서있는 벽과 산 그리고 나무가 네가티브한 허무주의로 함몰되지 않을지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왜냐하면 각각의 도상은, 세계 내 존재가 '나'와 상관 없이 즉자적으로 존재하듯이, 화면 여기저기에 우연히 위치하며, 벽 뒤편에서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부조리한 도상을 통해 작가가 추구하는 바는 무엇일까? 결국 그것은 작가의 작업노트에서도 기술되었듯이 인간 존재의 진정한 얼굴과 삶의 면목에 대한 인식이라고 해야겠다. 일찍이 장-폴 사르트르가 1937년에 탈고한 단편 「벽」(1939, 갈리마르 초판)에서도 존재의 고뇌와 절망은 희망의 환상을 통해 자의식을 회복하고 투쟁의 의지까지도 일구어낸다고 보고 있다. 인간을 구속하는 두꺼운 감옥의 벽, 죽음이 임박한 극한 상황이란 벽, 절망과 부조리 그리고 판단이 모호한 세계라는 벽, 등등 그 모든 벽들이 인간 실존의 운명적 장벽들로 그려지지만, 이 실존을 도피하려는 시도로 골방 벽 너머를 향해 그려본 일련의 환상들이 적어도 자의식의 정체성을 확인해주었던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작가 이희진도 실존의 벽 너머로 아침나절의 짙푸른 하늘과 대낮의 무성한 수풀을 떠올리며 의식의 진정한 자유를 희구했었는지 모른다. 물론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사르트르가 묘사한 인간의 역설적 회상과 독실한 신앙인인 작가가 그린 불합리하고 기이한 판타지가 동일한 사유의 경로를 따랐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양자는 자아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여러 단상과 환영들을 스크린-사르트르는 한 줌의 하늘, 화가는 캔버스 화면-에 투사하여, 그 형상들을 관찰하고 묘사하면서 존재의 진면목과 자아의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해나간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 후기산업사회에서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격심한 경쟁과 복잡한 정보화 물결에 떠밀려 당혹과 좌절 속으로 쉽사리 매몰되곤 한다. 이런 때일수록 존재에 대한 성찰이 요구되며, 자신의 의식을 통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모순과 갈등의 현실-벽 너머로 자의식을 찾아나가는 환영을 그린 이희진의 회화는 관심 있게 주목해볼만 하다. 누구든지 실존의 벽에 부딪혀 고뇌하게 되지만, 그 너머로 환상을 그리며 자신의 존재상황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다면, 갈등에 거듭 매몰되는 일에서 극복할 수 있을 것이고 존재의 진실을 알아가는 길을 확보할 수도 있으리라. 바로 이런 점이 신앙인인 작가가 감상자들에게 보내는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전하는 메시지라고 여겨도 좋을 것이다. 물론 감상자는 이 작품을 접하면서 불합리한 실존의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 전제조건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작품이 전달하는 기이하면서도 불안하고 어색한 감정 --기묘한 도상들과의 만남으로 인한 존재의 흔들림이라고 해야 할까?--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작품 감상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상황에 대한 사유도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서영희
■ 이희진[email protected]
Vol.20100721i | 이희진展 / LEEHEEJIN / 李喜珍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