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채집-헤테로토피아

김형무展 / KIMHYOUNGMOO / 金亨武 / painting   2010_0713 ▶ 2010_0721

김형무_단상채집-헤테로토피아_캔버스에 혼합재료_116.7×91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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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713_화요일_05:00pm

후원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공휴일_10:00am~05:00pm

한전프라자 갤러리 KEPCO PLAZA GALLERY 서울 서초구 쑥고개길 34(서초동 1355번지) 한전아트센터 1층 Tel. +82.2.2105.8190~2 www.kepco.co.kr/plaza

김형무의 작업-사이 공간, 현실과 가상현실을 가름하는 ● 김형무의 작업은 이중적이다.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 그 하나이며, 그 그림 속에 재배치될, 잡지에서 오려낸 복제된 이미지가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림은 대개 화면을 가로지르는 지평선을 중심으로 잡지에서 차용한 이미지의 편린들을 콜라주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일종의 가상-풍경이 연출되는 것인데, 그 인상은 마치 무중력 상태 속에 사람들과 사물들이 부유하는 것 같은 평면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이 비현실적이고 낯선 느낌은 근작에서 또 다른 국면을 맞는데, 풍경이 무슨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구조의 일부로 편입됨으로써 일정정도의 현실성을 획득하고 구체성을 얻는다. 그러나 현실성을 얻는다고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여전히 비현실적이며, 그러면서도 전작에서의 풍경이 근작에서의 전망을 위한 부분으로 재배치됨으로 인해 화면 안쪽으로 더 깊숙하게 열리는 조망이 가능해진다. 그 조망을 통해 보이는, 구조물 안쪽과 바깥쪽에서 일관된 맥락을 잃고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정체성 상실의 병을 앓는 현대인의 초상 같다. 뿌리도 없고 맥락도 없는, 다만 우연성의 계기가 지배할 뿐인 친근하면서도 낯선 세계(사실은 낯선데, 친근함을 가장한 세계)에 내던져진 실존적 인간의 자의식을 보는 것 같다. 콜라주 된 일상(복제된 일상), 친근하면서도 낯선 현실, 있으면서 없는 세계(헤테로토피아)와 더불어 현실 저편을 꿈꾸는 후기 낭만주의자의 징후(분열-시대유감)를 떠올리게 한다. 그 징후의 메타포를 도맡는, 거의 모든 그림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지평선이 현실이 속해져 있는 이편과 꿈이 향해있는 저편으로 세계를 구분한다. 그리고 나는 그림 안쪽으로 열린 전망을 통해서 그렇게 분절된, 분절되면서 연장된 세계를 본다.

김형무_단상채집-헤테로토피아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162cm_2010
김형무_단상채집-헤테로토피아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162cm_2010

『단상채집 - 복제된 일상』展(2007), 『단상채집 - 시대유감』展(2009), 『단상채집 - 헤테로토피아』展(2010). 작가가 매번 전시 때마다 자신의 작업에 부친 주제다. 전시 때마다 주제는 조금씩 다르지만, 이 주제들은 특정 시기나 전시에 한정된다기보다는 작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면서 작업에 일관성을 부여해주고 있는 사실상의 계기로 보이고, 상호 작용하는, 상호 내포적인 개념으로 보인다. ● 이 주제들은 하나같이 단상채집이라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다. 작가의 작업이 일상으로부터 단상에 해당하는 사고의 편린들을 채집하는 과정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단상 곧 사고의 편린들 내지는 사고의 조각들은 일관된 사유 혹은 논리적인 사유와는 구별된다. 그때그때 작가의 레이더에 포착된 그것들은 현실적인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것이기도 하고, 의식적이면서도 무의식적인 것이기도 한, 다분히 우연적인 계기에 기인한 것들이다. 단상은 통일된 전망을 전제로 세계를 이해하는 근대적 자의식과는 비교되는, 파편화된 세계인식에 바탕을 둔 후기 근대적 자의식을 반영한다. 그 자의식에 의하면, 세계도 조각나 있고, 그 세계를 대면하는 나도 파편화돼 있다. 후기 근대적 자의식은 무엇보다도 세계를 일관되고 총체적인 전체로서 조망할 수 있다는 근대적 발상을 허구로 본다.

김형무_단상채집-헤테로토피아_캔버스에 혼합재료_116.7×91cm_2010

여하튼, 작가는 이렇게 조각난 세계의 편린들을 복제된 일상에서, 특히 복제된 일상이 그대로 반영된 잡지에서 찾는다. 잡지에는 현실을 빼닮았지만, 사실은 조작된, 연출된, 만들어진, 온갖 유혹적인 이미지들로 넘쳐난다. 현실을 복제한 것이지만, 현실 그대로를 재현한 것은 아닌 이 인공적인 이미지들이 현대인의 현실인식을 말해준다. 즉 그 이미지들에선 현실을 빼닮은 일종의 가상현실이 구현되고 있는 것이며, 현실과 가상현실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인식이 현실인식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며, 그 자체가 자연스런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인공적인 사실(문화적인 사실)이 자연적인 사실로 둔갑할 때 일종의 신화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는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잡지야말로 현대판 신화가 생산되고 유포되고 소비되는 장인 셈이다. ● 이런 사실, 이런 현실인식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작가는 잡지를 작업을 위한 주된 텍스트로 삼아, 잡지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정교하게 오려낸다. 그리고 이렇게 차용된 이미지의 편린들을 컴퓨터 작업을 통해 복제한다. 현실을 복제한 잡지 이미지를 재차 복제한 것인데, 이렇듯 거듭 복제된 현실이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라 개념을 떠올려준다. 여기서 복제된 현실은 현실과의 유사성을 일정정도 유지하고 있지만, 복제된 현실을 재차 복제한 현실은 현실로부터 멀어진 만큼 현실과의 관계가 흐릿해지고, 종래에는 현실과는 상관없는 자족적인 존재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현실을 닮았지만 현실과는 상관없는 이미지, 현실로부터 유래하지 않은 이미지, 복제된 현실에 기인한 자족적인 이미지가 실현되는 것이다.

김형무_단상채집-헤테로토피아_캔버스에 혼합재료_91×116.7cm_2010

이처럼 일단 이미지가 자족성을 획득하고 나면 그 이미지는 현실을 자유자재로 재구성하고 재편집하는 훌륭한 건축 재료가 되어준다. 마침내 세계를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재구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고정된 세계(엄밀하게는 세계인식)를 해체하고 허물어 세계를 재구조화하는 일과 관련이 깊고, 그 기획이 세계를 재편하는 일에 복무하는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의사 내지는 유사 유토피아 사상과도 통한다. 세계의 구조와 구성요소를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재구성하고 재편집하는 과정을 통해서 세계와 세계인식 자체가 자연스런 사실이 아니라, 사실은 자연을 가장한, 조작되고 연출된 것임을 주지시킨다. ● 작가의 작업실엔 이처럼 잡지에서 오려낸, 의사 내지는 유사 유토피아 제국을 축성하는 데 쓰일 건축 재료들로 가득하다. 주로 각종 포즈를 취한 사람들이 많고, 알만한 사물들, 그리고 더러는 알 수 없는 사물들이다(엄밀하게는 사람들과 사물들의 복제된 이미지). 주로 지평선을 중심으로 화면을 상하로 양분하는 풍경을 배경으로, 그리고 근작에선 무슨 프레임(그 자체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과 틀의 메타포에 해당하는)을 연상시키는 기하학적인 형태의 구조물을 배경으로 이 이미지들이 포치된다.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일종의 탈맥락화와 재맥락화의 과정이 생겨나는 것인데, 이미지가 원래 속해져 있던 잡지로부터 이미지를 분리해낸다는 점에서 탈맥락화가, 그리고 작가가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재구성해 놓은 화면(의사 내지는 유사 유토피아 제국) 속에 재배치한다는 점에서 재맥락화가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김형무_단상채집-헤테로토피아_캔버스에 혼합재료_91×116.7cm_2010
김형무_단상채집-헤테로토피아_캔버스에 혼합재료_91×116.7cm_2010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세계의 구조가 재편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세계의 구조와 더불어 그 세계를 명명하고 규정하던 의미도 덩달아 재구성된다. 말하자면 의미란 인식의 재료이며, 인식은 언제나 관계에 대한 인식이다. 관계의 망(선입견의 전망?)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인식도 의미도 불완전하거나 아예 불가능해진다. 그 선 이해 탓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 누구를 쳐다보는지, 그의 손끝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즉각적으로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이미지가 관계의 망 밖에 놓여질 때(재배치되어져서 전혀 새로운 관계의 망을 형성시킬 때) 이처럼 즉각적인 의미나 뚜렷했던 의미는 불현듯 길을 잃고 모호해져버린다. 그의 손짓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그의 몸짓이 무슨 의미인지 오리무중에 빠지고, 심지어는 그의 표정마저 추상적인 기호로서 다가온다. 친숙했던 기호가 졸지에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증유의 기호로 변질되는 것이다. ●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낯설게 하기에 연동된다. 작가의 작업에서 낯설게 하기는 핵심적인 의미기능을 수행하는데,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선입견의 전제를 걷어내고 나면 세상은 온통 낯설게 보이고, 이때의 선입견의 전제 자체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대개는 이데올로기의 소산임을 주지시키는 것이다(우리는 항상 외부로부터 주어진 이데올로기의 전망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세계를 이해한다). 해서, 궁극적으론 어떠한 선입견의 전제나 이데올로기의 전망 없이 세계 자체와 낯설게 대면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며, 의미가, 그리고 그 의미가 투사된 세계가 전혀 새롭게 생성되고 갱신되는 역동적인 현장에로 초대하는 것이다. ■ 고충환

Vol.20100707f | 김형무展 / KIMHYOUNGMOO / 金亨武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