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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706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우덕_GALLERY WOODUK 서울 서초구 잠원동 28-10번지 한국야쿠르트빌딩 2층 Tel. +82.2.3449.6071
나는 그들을 생각한다. ●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라는 책의 저자 에프라임 키숀(Ephraim Kishon)은 현대미술이 지닌 진취적인 덕목들이 역설적으로 대중과의 교감에서 괴리와 몰이해를 가져왔고, 예술의 상업화와 복잡한 이해관계에 따라 만들어진 상품미학은 '일상적 의미'들을 무력화시키고 대중들에게 소외감과 당혹감을 선사했다고 주장했다. 이브 미쇼(Yves Michaud)는 시장경제 원리, 미학의 맹목성과 지배성, 비평의 비건강성, 예술가들의 후퇴와 신앙상실, 그리고 대중의 부재와 소외 등 현대미술이 위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적했다. 원인이 무엇이던지 불가항력적인 것은 예술가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삶을 영위하고 예술 활동을 한다는 그 태생에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일상성의 경계를 넘어 대중들이 경험하고 지향하는 감각의 반경이 급속도로 변화함에 따라 예술의 의미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것만도 사실인 것 같다. 원론적인 분석으로,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자본주의가 갖는 속성 중에 예술에 대한 반 예술적 습성, 즉, 창조적 노동이 제거되고 물적 생산화 혹은 물화됨으로 자유로운 창조적 노동과 자본주의는 대립성을 갖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자본주의가 포화될수록 진지한 노동보다는 자본이 지배하는 미학의 기준에 의해 예술성 자체가 소외될지 모른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현대미술이 겪는 문제들에 대해 해석의 타당성를 생각하기에 앞서, 더 진지하게 요구되는 부분은, 1차 생산자들이 어떤 관점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추구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생산물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에 대한 관객의 당혹감과, 그와 반대로 소비의 친절함이 교차함으로 빚어내는 블랙 코미디같은 촌극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각성 일 것이다. 더불어 그 촌극 속에 불청객이 되어버린 작가 주체의 의식의 흔들림도 주목하고 간과하지 말아야 할 관점인 것이다. 자본의 경전이 지시하는 지점과 교환적 성격의 가치는 예술의 진지함과는 별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교환의 성격을 넘어 투자적 대상으로 전이된 예술품에 대해 우리는 '성공신화'와 같은 시각으로 비유해야하는 불편함도 도사리고 있다. 위에 열거된 관점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분명 할 말은 없다. ● 그것은 창작행위를 하는 사람의 자세와 의지, 태도에 따라 각기 다른 관점이 존재하기에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기 쉬운 함정일 수도 있겠다. ● 다만, 이 문제들에 대한 시각이 정통하다 하더라도 작가는 이미 그를 둘러싼 생활세계에 잡다하지만 매우 중요한 난제와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야하는 숙명에는 변함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 그러한 고민들 속에서 스스로 인내하기 위해 비등한 고민을 갖고 살았던 존재들에 대한 존경심, 그 한계를 극복하고 승화하려했던 열망과 존경심이 때론 의식의 오마주(hommage)를 바탕으로 형식의 오마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번 전시에서 박찬상은 '나는 그들을 생각 한다'라는 주제 하에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해왔던 형상의 의미와 기법적 측면에 그가 직시하는 현실에 문제들을 특별한 인격성을 빌어서 드러내고 있다. ● 도마 안중근, 예수, 고흐, 전태일 열사, 무명가수, 유관순, 최근 사망한 유년의 마이클 잭슨의 형상들이 그의 작업의 소재가 되고 그 형상들이 상징으로서 우리에게 각인 될 수 밖에 없었던 삶의 의미를 의식의 흐름과 조합하고 있다. ● 전태일 열사와 안중근 의사, 예수와 마이클 잭슨, 무명가수와 고흐 그리고 유관순의 얼굴에서 궁극적으로 그들이 추구했던 삶에 대한 진지한 가치와 의식을 통해 현재 자신의 중심을 재확인하고, 각오를 다지며, 작가 스스로의 예술관을 지켜 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은 작가의 신념이 투사된 자기 고백적 과정처럼 보인다. ● 에드문트 후설(Husserl, Edmund)은 예술가가 자신이 처한 삶의 현상을 작업의 소재로 삼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예술가이기에 앞서 현상의 담지자로서, 실증적 탐구자로서의 생활세계를 이해하고 관찰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아마도 작가 박찬상은 자신의 주변에 대한 성찰과 내면의 성찰을 통해 자신이 인용한 대상들이 포괄적으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가치에 귀 기울이길 권면하는 듯 느껴진다. 안중근의사와 전태일 열사를 비유한 형상에서는 희생정신을 생각할 수 있겠고 예수와 마이클 잭슨에서는 신성과 슈퍼스타라는 평가에 앞서 지극히 인간과 자연을 사랑했던 인간의 모습이, 그리고 무명가수와 셀러리맨에게서는 삶의 소박한 집념이 배어나온다. ● 이 모습들은 모두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인격의 다양성이자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형상들이지만 우리가 물화되고, 자본에 포획되어 노예가 되는 순간부터 의식의 진공이 시작되면서 이기심과 욕심에 가리워질 가치들이다. 아마도 박찬상은 그가 생활세계를 경험하고 느끼는 환경 속에서 현재 우리가 잃어버리는 가치와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우리가 인갑답게 산다는 것에 대해 각성하기를 권유하는 듯 하다. 경제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도시화의 명목 속에 가정이 해체되며 신앙의 가치가 욕망 속에서 부유할 때 누군가는 그것을 이용해 권력의 바벨탑을 쌓고, 어떤 자는 바로잡기 위한 분노의 몸짓으로 자신의 형상을 해체하고 몸을 던지는 비극이 되풀이 되는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우리 자신의 형상일지 모르겠다. 이번 전시에서 박찬상이 생각한 그들의 실체는 자신이 닮고자하는 모습이자 우리가 잃어버리기 쉬운 것들에 대한 상징이다. ● '나는 그들을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이 명제가 앞으로 그에게 얼마나 유효할진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현실의 반성과 각성없는 작업들은 매너리즘의 반복에 불과하고 정작 작가 자신을 물질화 도구화시키는 것은 자본이 아니라 생활세계를 담지하는 관찰의식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작가 박찬상은 명리하게 잘 알고 있는듯하다. ● 오른편 어께 전방 회전근의 석회화 건염을 수술 후, 휴식을 마다하고 전시를 열심히 준비했던 작가에게 기실, 현대미술의 위기와 구차한 미학과 담론들은 이제 특별한 유효성이 없는 듯 보인다. 이미 그에게 기준이나 가치나 미학보다, 작가로서의 삶 자체가 그들을 생각함으로써, 그리고 그들이 응시했던 생활세계를 그가 같이 바라봄으로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라고 교감할 뿐이다. ■ 정화성
Vol.20100706f | 박찬상展 / PARKCHANSANG / 朴贊相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