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의 심연에서 색과 형태의 신비를 건져 올리는 회화의 구도자

강상중展 / KANGSANGJOONG / 姜相中 / painting   2010_0525 ▶ 2010_0531

강상중_빛의 축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72.7cm_2009

초대일시_2010_0525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예술의전당 갤러리 7 Seoul Arts Center Gallery 7 서울 서초구 서초동 700번지 비타민 스테이션 B1 Tel. +82.2.580.1300 www.sac.or.kr

무한의 심연에서 색과 형태의 신비를 건져 올리는 회화의 구도자 ● 강상중은 인간 내면의 영적 고향에 대한 근원적 사색을 지속해 오고 있는 화가다. 나는 방금 "인간 내면의 영적 고향"이란 말을 사용했지만, 이 말은 그렇게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전존재에 대한 이해를 선행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용어이면서, 인간이 세계내 존재이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이해도 함께 선행되어야 하는 것을 전제한다. 이렇게 어렵고 심오한 문제에 강상중이 뛰어든 것이다. 진실을 말한다면 이런 문제는 지식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식만으로 이걸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바보다. 나는 강상중이 어떤 방식으로 이것을 풀어가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는 화가로서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주제의 필요성에서 이런 문제를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원시종교인 샤머니즘에 대한 자료도 수집하고 인도의 원시 사상에 대한 자료도 수집하며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은 있다. 그가 요가를 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요가는 제대로 하기만하면 상당한 영적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수련방법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수많은 요가 수련자들이 몸 수련을 위한 숙련된 기술자로 그쳐버리고 만다. 옛날에 인도에서 유명한 요가 수행자에게 왕이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다. "요가 수행자여! 그대가 땅 속에 흙을 덮고 들어가 10년을 살아있다 나온다면 그대의 소원을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 요가 수행자는 그 말을 듣고 스스로 땅에 파묻혔다. 10년 후 왕이 요가 수행자를 생각하고 그가 묻혔던 땅을 파헤쳐 보니 놀랍게도 요가 수행자는 살아있었다. 그는 땅 속에서 나오자마자 왕에게 엄청난 재물을 달라고 요구했다. 왕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 요가 수행자야 말로 숙련된 기술자에 불과한 속인이었을 뿐이다. 10년간의 땅속 수행에서도 요가 수행자의 내면은 여전히 속인의 욕망으로 가득한 어리석은 인간이었을 뿐이니 말이다. 내적 깨달음이 없는 행위란 그저 숙련된 기술에 불과할 뿐이다.

강상중_두개의 신성한 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5×53cm_2008
빛-자연, 인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1cm_2010

인간은 그 가장 심오한 내면에 무한을 지닌 존재자이다. 우리 각자는 하나하나가 우주의 무한성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자인 것이다. 성리학에선 인간과 우주를 하나로 보았고 동양사상에선 모든 인간이 원래가 완성된 성품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보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란 '에고'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불행,야망,공포,시기,질투,미움,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정으로 우리가 '나'라고 하는 착각에서 벗어나 그것이 비어있음을 직시할 때, 우리의 근원이 무한자임을 깨달을 것이다. 기독교식으로 본다면 우리의 근원은 저 무한한 초월자에 닿아 있는 것이다. 강상중의 그림은 무한자에 이르기 위한 끝없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그의 그림은 아름답다. 순수하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를 전체와 하나가 되게 만든다. 지식과 논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 그려진 형태는 그의 내면에서 흘러나온 것이고, 그의 그림에 칠해진 색채는 그 마음의 환희의 반영이다. 어려운 이야기가 필요 없이 그저 화면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들이 하나로 연결된 전체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것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과 동물들과 수수께끼의 도형은 이 모두가 생명의 빛 속에 하나로 연결된 존재임을 아름다운 색과 형태의 오케스트라로 보여주고 있다. 시간을 넘어서서 그의 그림은 고태적 이미지와 오늘의 이미지가 융합하는 기묘한 제3의 형태미를 연출하며 우리의 가슴속에 잊을 수 없는 인상을 각인 시키는 것이다. 강상중은 무한한 우주의 심연에서 수수께끼에 찬 영혼의 샘을 응시하며 색과 형태의 신비를 건져 올리는 회화의 구도자다. ■ 임두빈

강상중_빛-사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72.7cm_2009
강상중_빛-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06

그래도 그림이 좋다. 그리기가 주는 즐거움은 삶보다 고되다. 그림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신체의 대화이다. 화가는 거짓된 이미지와 참된 이미지 사이에서 고뇌하는 자들이다. 내가 미쳐야 남이 행복해진다. 적어도 그림을 그린다면 항상 지녀야 할 필수품은 뭐라고 생각하나? 가난함, 고독, 어리석음, 그리고 빵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남에게서 빼앗는 자, 함부로 이야기 하는 자, 무엇이든 죽이는 자, 도피 하는 자, 남에게 헌신하는 자, 항상 기쁨을 주는 자,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남을 탓 하는 자, 고통을 주는 자, 꿈을 꾸게 하는 자, 욱박 지르는 자, 사회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자, 세상의 모두모두― 그들은 진정으로 가르침을 주는 고마운 분들이다. ● 그림은 쉬워야 한다. 구구절절 이야기는 문자가 하는 역할이다. 빛은 존재의 궁극원인이요 출발점이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무한의 꼭짓점 이다. 색채는 이 꼭짓점을 향한 화가들의 발악이다. 문명은 엄격한 구속을 주고 문화는 무한한 자유를 준다. 문명과 문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신화의 상상력은 무질서한 공상과는 분명히 다른 진실이 있고 세계를 고정 시킨다. 아무리 변한다고 해도 변해서는 안 되는 것, 인위적으로 변질시켜서는 안 되는 귀중한 것이 신화에 담겨있다. 신화와 연관된 생명, 대지, 생성과 소멸 등은 영감의 근원이다. 자연의 모든 생명체들은 그들을 탄생시킨 숙명적인 환경, 공간 위에서 피나는 경쟁을 하고, 거대한 생명력으로 빛과 관련된 거대한 질서 속에 존재하며 창조를 존속 시킨다. ● 그리는 행위는 생명을 표현하는 한 수단이다. 생명에 관한 관심은 바로 내용이 되고, 그 그림은 곧 화두이다. 그림이 화두가 되려면 그림이 투명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 선명한 원색은 신앙이고 깨끗함은 믿음 그 자체이다. 빨강은 빨갛고 노랑은 노랗고 파랑은 파랗다 그것은 진실이다. 그림은 가르침의 표현이 아니라 소통의 표현이다. 소통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심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너무 믿지 마라. 글은 그림 그리는 이유를 가끔 설명한다. ■ 강상중

Vol.20100525d | 강상중展 / KANGSANGJOONG / 姜相中 / painting

2025/01/01-03/30